세종로의 아침
  • [세종로의 아침] 더 늦기 전에/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더 늦기 전에/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나라 안에 용암이 만든 비경들이 꽤 많다. 제주도 중문의 주상절리가 대표적이고 경북 경주 양남면의 부채꼴 주상절리도 빠르게 입소문을 타고 있다. 중부권에서는 연천, 포천 등 경기 북부와 강원 철원 등에 비경이 많다. 포천의 비둘기낭폭포(천연기념물 537호)는 이제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명소 반열에 올랐고, 연천의 재인폭포 역시 그간의 부침을 극복하고 옛 명성을 되찾아 가고 있다. 이뿐이랴. 세계적으로 드문 형태의 베개용암(천연기념물 542호) 등이 한탄강과 임진강 일대에 검은 현무암의 세계를 펼쳐 놓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다 보니 이를 돈벌이로 삼으려는 이들도 생겨난다. 돈은 욕심을 부르고, 욕심은 과욕을 부르기 마련이다. 올해 초 연천에서 현무암 주상절리를 무단 채취해 반출한 절도단이 경찰에 검거됐다. 이를 묵인해 준 공무원들도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해 보면 이들이 불법 채취해 조경용으로 판 현무암은 얼추 5500t, 시가 6억 4000만원 정도다. 드러난 게 이 정도니 그간 얼마나 더 많은 현무암 주상절리들이 수난을 겪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현무암 주상절리들은 밖으로 노출돼 있어 불온한 손길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
  • [세종로의 아침] 블랙리스트 규명만큼 중요한 것/함혜리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블랙리스트 규명만큼 중요한 것/함혜리 문화부 선임기자

    지난해 10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한 미술주간 행사를 앞두고 담당 공무원이 기자 몇 명과 간담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시각예술을 총괄하는 부서의 과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담당 공무원은 “침체된 미술을 살리고 싶은데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없다”고 토로했다. 예술 부흥은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이고 정부는 측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주도적으로 살리겠다고 하는 발상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입을 열지 않고 내내 있다가 나오면서 한마디했다. “블랙리스트부터 없애세요.” 다른 뜻은 없었다. 정부가 주관하는 사업에서 배제되고 공모에서 예선 탈락하는 일들을 겪은 누군가 “블랙리스트에 들어 있어서 나는 안 된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고 한 말이었다. 전문성이 뛰어난 사람들은 배제되고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조직의 수장이 되거나 정부 주도의 각종 사업과 예산을 따내 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밖으로 내몰렸으니 미술판이 침체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의욕도, 결집력도 사라진 미술계에는 깊은 적막감만 가득했다. 정부가 분위기를 띄운다고 이벤트를 만들고, 외국 컬렉터들을 초청하고, 선심 쓰듯 젊은 작가들의 미술품 직거래 장터를 열어
  • [세종로의 아침] 페더러의 눈물/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페더러의 눈물/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나달과 다시 메이저 결승 코트에 설 줄은 몰랐다. 테니스에는 무승부가 없지만, 할 수만 있다면 나달과 우승을 나누고 싶다.” 테니스에 아무리 까막눈이라도 ‘로저 페더러’라는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스위스 사람인 아버지, 남아공 출신의 어머니를 따라 두 나라 시민권을 손에 쥐고 바젤에서 태어난 페더러는 2000년대 중·후반 세계 남자테니스를 쥐락펴락하던 선수였다. 테니스 황제로 불릴 만큼 이른바 ‘클래스’가 달랐다. 그는 2003년 윔블던 첫 우승 이후 2012년 같은 대회까지 모두 17개의 메이저 우승컵을 들어 올리면서 피트 샘프러스 이후 최고의 남자 테니스 선수로 추앙받았다. 9년 동안 무려 49차례나 메이저대회 8강에 진출했고, 이 가운데 27번 결승에 올라 역대 가장 많은 승수를 올렸다. 지난해까지 메이저대회 결승전 통산 전적은 17승10패, 승률은 58.8%였다. 그런데 라파엘 나달만 아니었다면 승률은 부쩍 치솟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페더러는 2006년 프랑스오픈 결승을 시작으로 나달과 8차례 메이저 결승에서 만나 그 가운데 6번을 패했다. 잔디 코트인 윔블던에서만 두 번 이겼을 뿐이다. 일반 투어 대회로 넓히면 11승23패, 승수에 견줘
  • [세종로의 아침] 행복주택의 진화/류찬희 경제정책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행복주택의 진화/류찬희 경제정책부 선임기자

    나라가 어수선하다. 현 정부의 대표 정책을 대대적으로 손봐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한쪽으로 치우친 정치적 이념에 따라 결정된 정책이나 국민들로부터 외면받는 정책은 폐기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권 교체 여부와 관계없이 영속돼야 할 정책도 있다. 우리나라 주택 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춤을 췄다.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았던 정책도 지난 정부에서 추진했다는 이유만으로 갈아치우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공공임대주택 정책이 누더기처럼 복잡해져 수요자는 물론 정책을 추진하는 공무원조차 헛갈릴 정도다. 관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부적격자가 오랫동안 눌러앉아 정작 입주를 필요로 하는 수요자들의 기회를 빼앗는 부작용도 불러왔다. 행복주택은 지금까지 나온 공공임대주택 가운데 상품 구성이 가장 뛰어나다. 인근 시세보다 20~40% 저렴한 임대료로 6년(최장 10년)까지 거주할 수 있다. 입주자 선정도 객관적이다. 그래서 공급할 때마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높은 청약 경쟁률을 기록하면서 완판을 이어 가고 있다. 정권 교체 여부와 관계없이 행복주택 정책을 유지, 확대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행복주택은 집을 ‘사는(buy) 것’이 아닌 ‘사는(live) 곳’이라는 개념에 맞아떨어지는
  • [세종로의 아침] ‘방아쇠’와 ‘용병’ 사이…/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방아쇠’와 ‘용병’ 사이…/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그를 경기 뒤 인터뷰에서 본 건 서너 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 110㎏의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말하는 본새가 얌전했다. 목소리도 높지 않아 말귀를 알아 듣기 쉽지 않았다. 늘 눈망울이 촉촉히 젖어 있어 착하고 순수하며, 설핏 슬픔의 기운마저 어렸다. 한국농구연맹(KBL) 코트에서 다섯 시즌을 보내며 특별귀화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는 리카르도 라틀리프(28·삼성) 얘기다. 그는 한 팀에서 호흡을 맞추는 마이클 크레익처럼 랩이나 댄스로 좌중을 사로잡을 능력도, 지난 시즌 오리온에서 뛰었던 조 잭슨처럼 당돌한 발언으로 취재진을 들었다 놓았다 하지도 못했다. 2014~15시즌 오리온, 다음 시즌 LG 유니폼을 입었던 트로이 길렌워터와 같은 ‘야수의 얼굴 뒤에 감춰진 소녀 감성’이었다. 그런 라틀리프가 궁지에 몰려 있다. 지난 10일 SK와의 경기 도중 최준용이 부상 위협을 끼쳤다며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그의 옆머리를 차례로 찍었다. 일부는 서부극에서 총 방아쇠를 당긴 뒤의 동작을 연상시킨다며 흥분했다. 동영상을 돌려 보면 아주 도리질을 칠 정도는 아니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자가 편집자들에게 기회 있으면 하는 주문이 ‘용병’이란 표현을 자제해 달라
  • [세종로의 아침] 중국의 이중적 이웃 사랑/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중국의 이중적 이웃 사랑/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중국인들의 이웃 사랑은 각별하다. 중국인들이 좋은 이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지를 보여 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생겼을 정도다. 그 성어는 ‘백금으로 집을 사고, 천금으로 이웃을 사며, 좋은 이웃은 돈으로도 바꿀 수 없다’(百買屋, 千買隣, 好隣居不換)이다. 1500여년 전 남북조시대 ‘남사’(南史)의 ‘여승진전’(呂僧珍傳)을 보면 그 내력이 나온다. “송(宋)나라 계아(季雅)는 성품이 올곧아 윗사람의 눈밖에 났다. 남강(南康) 태수로 있던 그는 태수직을 언제 그만둘지 몰라 새로 기거할 집을 보러 다녔다. 그가 산 집은 여승진의 옆집이었다. 보국(輔國) 장군을 지낸 여승진은 매우 강직하면서도 인자하다는 평판을 얻고 있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계아가 찾아와 인사를 올리자 여승진이 “집을 얼마 주고 샀느냐”고 물었다. 그가 집값으로 1100만냥을 치렀다고 하자 여승진은 “100만냥이면 충분한데…. 너무 비싸게 샀다”며 의아해했다. 계아는 “100만냥으로 집을 사고, 1000만냥으로 이웃을 샀습니다.” 이웃이란 바로 여승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내심 감동한 그는 계아를 반갑게 맞으며 함께 오순도순 여생을 보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역시 이웃 사랑이
  • [세종로의 아침] 이 세상의 주인공/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이 세상의 주인공/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오가는 행인도, 내닫는 차량도 드물게 한산한 어둠의 거리. 편집국에서 내려다보는 정유년 정초(正初) 새벽의 세종로는 평온하기만 하다. 의혹과 증거가 난무하는데도 ‘모르쇠’만 무성한 새해 초. 초행자라면 주말마다 만들어지는 성난 촛불의 군집이 믿기지 않을 듯한 그 분노의 거리는 이 정유년에 어떤 변신을 거듭할까. 세종로를 포함해 전국 밤거리를 달군 분노의 천만 촛불은 농단(斷)과 그 농단에 휘둘린 대통령을 겨냥한다. 맹자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속 농단이란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이익, 권력을 독차지한다는 뜻을 갖는다. 맹자가 제나라 객경의 자리를 사퇴하려 하자 제나라 선왕이 사람을 보내 잘 대접하겠다는 심경을 전하려 했다는 과정에서 유래한 교훈의 경구. “한 못난 사나이가 있어 농단(높이 솟은 언덕)을 찾아 그 위로 올라가 좌우를 살핀 다음 시장의 이익을 그물질했다. 사람들이 이를 밉게 보아서 그에게 세금을 물리게 됐는데 장사꾼에게 세금을 받는 일이 이 못난 사나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을 회유하려는 선왕에게 전해 경종을 울렸다는, ‘처신을 잘하라’는 경계의 일침일 터. 하지만 그 교훈은 이 땅에선 거꾸로 온 나라를 뒤흔든 비극으로 바뀌었다. 즉각 퇴진
  • [세종로의 아침] ‘K’는 죄가 없다/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K’는 죄가 없다/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최순실 국정 농단’이 세상에 실체를 드러낸 지 두 달여가 지났다. 하지만 최순실 일당으로 인해 빚어진 파장은 도무지 수그러들 기미가 없다. 외려 거대한 블랙홀이 돼 대한민국 전체를 빨아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 때문에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한 사업들이 가려지거나 빛을 못 보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지속성 여부를 걱정하는 것을 넘어 당장 존폐의 기로에 선 것들도 있다. ‘K스마일 캠페인’이 그 예다. ‘K스마일 캠페인’은 우리 국민의 환대 문화 제고를 위해 민관이 함께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직접적으로는 ‘2016~2018 한국 방문의 해’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을 겨냥하고 있지만 좀더 길게 보면 우리나라 관광산업의 성패를 좌우하게 될 환대 문화를 이 기회에 정착시켜 보자는 뜻도 담겨 있다. 한데 ‘K스마일 캠페인’이 좌초 위기에 처했다. 이유야 물을 것도 없다. 최순실 일당의 ‘K스포츠재단’ 때문이다. 정확히는 이 재단의 이름에 쓰인 ‘K’와 캠페인의 첫 글자가 겹쳐서다. 여기저기서 ‘K스마일 캠페인’도 최순실의 손을 탄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됐고, 의혹 제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세종로의 아침] 문화는 ‘봉’이 아니다/함혜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세종로의 아침] 문화는 ‘봉’이 아니다/함혜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2013년 2월 25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조금 쌀쌀했지만 맑았던 날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다. 취임식장에 모인 시민 7만여명과 생방송으로 이 광경을 지켜본 국민들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첫 여자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냈다. 국정 운영을 잘 하라는, 우리와 우리 후세대가 더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직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삼가야 할 일은 뭔지도 모르고 대통령이 된 그는 46개월 후 탄핵이라는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박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강조했던 ‘문화융성’과 ‘창조경제’, 그와 관련된 이해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정책들은 ‘비선 실세’ 최순실과 측근 차은택의 작품이었음이 드러났다. 이들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청와대 수석을 비롯한 주요 보직에 자기 사람들을 심고, 문화·관광·체육 정책 전반에 깊숙이 개입했다. 대표적인 것이 문화융성 정책의 핵심인 문화창조융합벨트 사업이다. 문화 콘텐츠 산업의 기획부터 제작, 소비, 재투자까지 선순환 체계를 갖추고 향후 10년간 25조원의 직간접 경제 효과와 17만명의 고용창출 효과를 거둔다는 거창한 구호를 내건 국가 사업이었다. ‘문화계 황태자’ 차은택이
  • [세종로의 아침] 다시 또, 박태환과 김연아/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다시 또, 박태환과 김연아/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두 사람과 처음으로 만난 것이 2004년이니 벌써 12년 전 일이다. 유난히 정월 추위가 매섭던 그해 잠실실내수영장에서 까까머리 중학생이던 박태환과 첫 대면을 했다. 열심히 헤엄치다 물속에서 튀어나온 그는 느닷없이 ‘아테네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열다섯 살이었다. 몇 개월 뒤 그는 과연 주위의 수두룩한 형들을 제치고 올림픽 출전 티켓을 따낸 뒤 아테네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선수단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다. 김연아를 처음 만난 건 아테네올림픽이 끝난 그해 10월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이었다. 과천빙상장에서 얼음을 지치다 어머니 박미희씨의 손에 이끌려 나온 그는 미국의 피겨 스타이자 당시 여섯 살 위였던 사샤 코언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었지만 김연아는 그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줄 모르는 듯했다. 백지장같이 하얀 얼굴에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여린 몸매. 하지만 ‘얼음공주’답게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후 20대 후반의 청년이 될 때까지 박태환과 김연아는 다를 것 같지만 비슷한 길을 걸었다. ‘국민 남매’라는 찬사 속에 한 사람은 여름 물속에서, 또 한 사람은 겨울 빙판 위에서 팬들의 절대 지지와 환호를 받으며 한 치 의
  • [세종로의 아침] 대인춘풍, 지기추상/류찬희 경제정책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대인춘풍, 지기추상/류찬희 경제정책부 선임기자

    대인춘풍(待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 공무원들 집무실에 흔히 걸려 있는 액자 속 글귀다. 다른 사람은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감싸고, 자신은 가을 찬서리처럼 매섭고 엄하게 지키라는 뜻이다. 주변 관리가 더욱 요구되는 사람들, 고위 공직자들이 좌우명으로 삼는 글이다. 이를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는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기준이기도 하다. 나라가 시끄럽다. 국정은 공백 상태다. 국민들은 허탈감과 분노에 차 있다. 고위 공직자들이 주변을 잘 관리하고 자신에게는 매서운 잣대를 들이댔다면 국정이 이 정도로 농락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민들을 실망에 빠뜨리고 국가 기강이 무너진 것은 이들이 ‘지기추상’을 잊은 탓이다. 정도를 넘고 분수를 벗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서는 봄바람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스스로 너그럽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국정 혼란의 정점에는 대통령이 있다. 주변의 고위 공직자나 측근들 또한 이 사태를 키운 조력자다. 대통령은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는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 정상적인 의사 결정을 거쳐 냉철하게 정책을 펼쳐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정책을 농단한 주변 인물을 봄바람으로 감쌌다. 비서실장은 대통령 주변의 작은
  • [세종로의 아침] 피해자 코스프레/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피해자 코스프레/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최순실 게이트’를 지켜보며 가장 가슴이 뜨끔해졌던 신조어가 ‘피해자 코스프레’였다. 어처구니없는 국정 농단에 연루된 이들은 하나같이 애꿎은 피해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를 치장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과 독대해 민원을 토로하고 재단에 뭉칫돈을 낸 재벌 총수들, ‘문고리 3인방’의 눈치나 보며 자리를 지켜 국정 시스템을 망가뜨린 고위 관료들까지 그랬다. 하물며 대통령까지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저의 큰 잘못”이라고 스스로 책임을 극히 한정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체육계도 예외가 아니다. 먼저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의 전횡을 막지 못한 문체부 직원들은 그의 ‘오버’를 방조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 전 차관 등이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고 나서자 과거 대한체육회와 산하 경기단체들의 잘못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채찍을 들 때부터 잘못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제 김 전 차관과 그를 따르는 몇몇 간부가 좌천됐다고 문체부가 제대로 주변의 악을 관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A씨는 김 전 차관 등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식으로 포장됐다. 하루아침에
  • [세종로의 아침] ‘비루한 충성’이 만연하는 사회/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비루한 충성’이 만연하는 사회/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중국 고대 사상가 한비(韓非·기원전 280~233년)가 펴낸 ‘한비자’는 ‘제왕학의 전범’으로 불린다.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이 책은 전국시대라는 극심한 혼란기에 제왕들이 난세를 평정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방법을 명쾌하게 풀어냈다. 한비자의 ‘열 가지 허물’편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예전에 초공왕(楚共王)이 진여공(晉?公)과 언릉(?陵)에서 전쟁을 치렀다. 초나라는 패하고 공왕은 눈을 다쳤다. 전투가 한창일 때 사마(司馬) 자반(子反)이 목이 말라 마실 것을 찾았다. 시종 곡양(谷陽)이 술을 한 잔 가져와 바쳤다. 자반이 말했다. ‘이건 술이 아닌가? 물려라.’ 그러자 곡양이 말했다. ‘술이 아닙니다.’ 이에 그는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자반은 사람됨이 모주꾼이었다. 일단 한 잔 들어가면 끝을 봐야 할 만큼 술을 좋아하는 그는 끝내 취해버렸다. 전쟁은 초나라의 패배로 끝났다. 공왕은 전투를 다시 하려고 자반을 불렀다. 그러나 술이 덜 깬 그가 ‘가슴이 아프다’며 출전이 어렵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다급한 공왕은 말을 달려 자반의 막사를 직접 찾았다. 막사 안에 술 냄새가 진동하자 공왕은 말없이 되돌아왔다. 공왕이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내가 부상당해 믿을 자
  • [세종로의 아침] 수능일 아침에/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세종로의 아침] 수능일 아침에/김성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1979년 이맘때 지금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격인 예비고사를 앞두고 있던 고3 수험생 신분의 기자는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이른바 ‘10·26 사태’ 직후. “올해 예비고사는 없다더라”, “시험이 내년으로 미뤄진다는데”, “고3생 전원이 유급된다”…. 또래 친구들 사이에 이런저런 ‘카더라’ 소식이 무성하게 번지면서 불안감과 야속함에 깊숙이 빠져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영문도 모른 채 휘돌아치는 세상에서 어찌어찌 대학에 진학했지만, 돌이켜 보면 살얼음을 걷는 위기의 순간들이었다. 2017학년도 대입 수능이 치러지는 오늘 37년 전의 잊고 싶었던 기억이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수많은 고3생과 수험생들이 옛날의 나처럼 불안감과 야속함에 휩싸인 채 수험장에 들어가지는 않을까. 인생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중차대한 시험 앞에서 청춘들이 무겁게 맞닥뜨린 총체적 난국이 야속하기만 하다. 왜 이 땅에선 현대 민주주의 국가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상식의 국가적 치욕이 되풀이되는 걸까. 한 세대가 흐른 지금 다시 만난 그 난세가 어지러울 따름이다. 최근 속속 불거지고 밝혀지는 의혹과 정황들을 보면
  • [세종로의 아침] 당신 선 곳이 가장 아름다운 곳/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당신 선 곳이 가장 아름다운 곳/손원천 문화부 전문기자

    지금 이곳은 가나자와. 일본 이시카와현의 현청 소재지로 우리와 동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도시다. 이 계절에 가나자와를 찾은 건 단풍이 곱다고 해서다. 우리에겐 다소 생경하지만 일본의 전통 문화와 옛 모습이 여태 잘 남아 있고, 특히 가을이면 단풍과 고도가 어우러져 기막힌 풍경을 선사한다고 알려진 곳이다. 국내 한 홍보 업체에 따르면 올해 일본으로 단풍 구경을 가려고 하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검색했던 곳도 바로 가나자와였다. 며칠 동안 지켜본 가나자와의 단풍은 뜻밖에 그리 화려하지는 않은 편이었다. 이시카와현에 속한 다른 도시들의 단풍도 상황은 비슷했다. 아직 일정이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여태까지 본 것으로 판단하자면 소문난 잔치엔 역시 먹을 게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한데 찬찬히 뜯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 지역의 단풍은 수수한 편이다. 우리 내장산처럼 빨간 애기단풍으로 온통 붉게 물든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쭉쭉 뻗은 삼나무 사이에 낙엽활엽수 한 그루가 노랗게 물들어 있거나, 낡은 건물 기왓장 너머로 주황색 나뭇잎을 매단 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모양새다. 분명 ‘오매 단풍 들겄네’라고 할 만한 빛깔은 아니다.
  • [세종로의 아침] 인맥으로 굴러가는 나라에서/함혜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세종로의 아침] 인맥으로 굴러가는 나라에서/함혜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최순실 파문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럽다. 그동안 나돌았던 괴이한 풍문들이 사실이었음을 밝혀 주는 정황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 모두는 허탈감과 자괴감에 빠져 있다. 최순실 게이트가 이슈의 블랙홀이 돼 모든 뉴스를 덮어 버리는 가운데 문화예술계의 성추문도 어물쩍 꼬리를 감추는 분위기다. 나라가 결딴나려는 상황에서 그게 무슨 뉴스 거리나 되겠으며 덮고 간들 어디가 덧날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나 문화예술계의 성추문이 파급효과나 죄질의 경중만 다를 뿐 권력형 갑을 관계를 악용한 범죄라는 점에서는 매 한가지다. 문화예술계의 지명도 있는 인사들은 대단하게 사회적 영향을 미치는 실력자는 아니지만 그들이 활동하는 세계 안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다. 전시회 기획을 하며 작가 선정 권한이 있는 큐레이터도, 대학의 예능계 학과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무명 작가, 작가 지망생 등 이해관계에 있는 여성들에게 이들은 절대 갑의 위치에 있다. 그들과 관계가 형성되면 문화계라는 상상계 진입이 가능하고, 반대로 잘못 보이면 그 세계에서 경력을 아예 포기해야 한다. 그러니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해도, 어떤 요구를 해 와도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다. 문화예술계
  • [세종로의 아침] 밸런타인과 CJ컵/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세종로의 아침] 밸런타인과 CJ컵/최병규 체육부 전문기자

    CJ그룹이 내년 10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최하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대회 ‘CJ컵@나인브릿지’의 총상금은 925만 달러(약 105억원)에 달한다. 이 대회는 향후 10년 동안 계속된다. 매년 소요되는 비용은 얼추 300억원 이상이다. 보통 국내외를 막론하고 1개 투어 대회당 소요되는 총상금에다 대회 운영비, 대회 코스 사용료, 대행사 수수료, 기타 비용 등을 합쳐 ‘액면가’인 총상금의 3배가량으로 추산된다. CJ컵@나인브릿지의 경우 총상금 105억원의 세 곱절인 300억원 남짓의 거액이 쓰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 대회는 ‘대충 하려면 아예 시작도 말고,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그룹 최고경영자의 의지에 따라 유치 전담팀을 꾸려 1년 이상 공을 들인 결과물이란 게 CJ 측의 설명이다. 보통 3~5년인 개최 계약 기간을 10년으로 대폭 늘리고 통상 600만 달러(일반 투어대회 기준) 안팎인 총상금 역시 메이저대회에 버금가는 925만 달러로 늘려 대회 개최에 ‘베팅’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CJ그룹은 2001년에도 미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CJ나인브릿지’ 대회를 성사시켰다. 이 대회는 그 몇 해 전 박세리의 ‘맨발샷’에 꿈틀거리던 국내 골프의 잠재
  • [세종로의 아침] 정곡을 찌르는 투기대책을 기대한다/류찬희 경제정책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정곡을 찌르는 투기대책을 기대한다/류찬희 경제정책부 선임기자

    서울 강남 아파트 값 폭등과 청약 열풍을 잠재우기 위해 정부가 대책을 내놓을 방침이다. 하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양이다. 정부의 고민은 여론의 주문대로 강력한 거래 규제 수단을 들이댈 수 없다는 데 있다. 거래를 직접 옥죄는 정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정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택 투기의 본질은 집을 사고팔아 단기 시세 차익을 내거나, 투명성이 떨어지는 임대 수입을 올리는 것이다. 투기는 짧은 기간에 얻는 불로소득을 제대로 환수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할 때 만연한다. 불로소득 환수, 투명한 임대시장 확보로 조세 정의가 이뤄지면 주택 투기는 사그라든다. 이게 주택 투기를 막는 지름길인데 정부는 또 여론에 밀려 거래 규제 정책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다. 아파트 분양권 전매제한 규제 강화를 예로 들자. 분양권은 거래가 인정되고, 엄연히 시장에서 자리잡은 주택 상품이다. 웃돈이 붙어 거래된다고 거래 자체를 옥죄는 수요 억제책은 바람직하지 않다. 거래는 자유롭게 허용하되 투기성 거래를 골라낸 뒤 높은 양도세를 부과해 가수요를 막는 게 올바른 투기 대책이다. 분양권을 팔아야 할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분양권 보유 기간에 따라 높은
  • [세종로의 아침] 우리 안의 이슬람포비아/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우리 안의 이슬람포비아/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두려움에 무릎 꿇었다고 본다. 축구대표팀은 지긋지긋한 ‘아자디 악몽’에 또 붙들렸다. 이란 선수들의 월등한 피지컬, 개인기, 경기운영 능력과 경험을 우리 선수들은 쫓아가지 못했다. 경기력에서 완패였다. 그런데 경기 외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제대회 출전을 위해 테헤란에 발을 디딘 이들은 곧 삭막하고 황량한 풍경에 압도되곤 한다. 산은 민둥산이고 모래바람이 온 도시를 뒤덮는다. 매캐한 내음이 가득하다. 청소년 시절 이곳에서 패배를 경험했다는 남자농구 대표팀의 한 선수는 지난달 공항 입국장을 나서자마자 “정말 정이 안 가는 곳”이라고 뇌까렸다. 축구대표팀 선수들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아자디 악령에 붙들렸던 것 같다. 이란 어디를 가나 나란히 붙어 있는 호메이니와 하메네이, 두 최고지도자의 초상이 그라운드를 떡하니 내려다보고, 언뜻 봐도 독일과 같은 아리아인으로 분류돼 우울하기 짝이 없는 표정의 이란인들은 텃세와 심리전을 일삼고, 극성스러운 응원은 그라운드에서 우리 선수끼리 의사 소통도 불가능할 정도고, ‘주먹감자’와 ‘침대축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번 이란과의 대결을 앞두고는 새로운 메뉴가 하나 더해졌다. 경기가 열린 날이 이란이 맹주를 자처하는 시아파
  • [세종로의 아침] 린뱌오 죽음과 음모론/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린뱌오 죽음과 음모론/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1971년 9월 13일 새벽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식 후계자 린뱌오(林彪), 그의 부인 예췬(葉群)과 아들 린리궈(林立果), 수행원 등 9명을 태우고 가던 비행기가 몽골 사막에 추락, 전원 사망했다.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중국 현대사의 최대 미스터리로 떠올랐다. 중국 당국은 사고 3주가 지난 뒤에야 “린뱌오가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도망가다 연료 부족으로 추락사했다”며 “그는 마오 암살 계획을 세웠다가 사전에 발각됐다”고 밝혔다. 소련 당국은 비행기가 원인 불명으로 추락했는데, 시체와 서류 등이 모두 불타 버리는 바람에 탑승객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일각에서는 중국군이나 소련군의 미사일 발사로 비행기가 격추됐다는 음모론이 무성했다. 음모론은 요즘도 유령처럼 떠돈다. 천안함 폭침과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 굵직굵직한 사건에 해명되지 않은 의문이 생길 때마다 고개를 쳐든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수년 전 ‘세계 10대 음모론’을 소개했다. 9·11테러 미국 정부의 자작극설, 미 공군기지 ‘에어리어 51’ 외계인 거주설, 엘비스 프레슬리 생존설, 아폴로 11호 달 착륙 연출설, 셰익스피어 가공인물설, 예수 결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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