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사람이니까/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사람이니까/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물신(物神)주의라는 말이 있다. 자본주의에서의 상품과 돈(자본)처럼 눈에 보이는 대상이 신처럼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걸 뜻한다. 영화와 문학 작품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범죄의 뿌리를 따지고 보면 결국 돈을 얻고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다.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죽는다. 돈만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폭력은 그럴싸한 말의 포장을 제쳐 두고 보면 결국 더 많은 돈, 그리고 더 많은 권력을 얻기 위한 결과다. 영화 ‘올빼미’는 권력을 향한, 혹은 권력을 지키기 위한 욕망이 가져오는 끔찍한 결과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권세가 불러일으키는 소용돌이 속에서 보통 사람들의 사소해 보이는 일상, 애정, 우애와 신뢰는 힘을 잃는다. 진실, 올바름, 윤리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더 많은 돈, 명예, 권세를 얻고 유지하기 위한 살벌한 현실정치 투쟁에서는 공허한 말들로 치부된다. ‘올빼미’가 보여 주는 모습을 지금 세계 곳곳에서 목격하고 있다. 화제작인 정지아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서 물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홀대받는 것의 의미를 곱씹게 된다. 자신이 믿었던 이념을 따라 살았던 아버지의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애도의 조건/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애도의 조건/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글에서 둘을 구별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슬픔에 빠지지만 시간이 흐르면 슬픔을 이겨 낸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큰 고통을 느끼게 되는 상실의 대상은 연인, 가족, 국가, 자유, 이상 등 삶에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들이다. 특히 가족의 죽음은 남은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하지만 그런 상실조차도 깊은 애도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상처가 아문다. 그렇게 인간이 상실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과정이 애도다. 제대로 된 애도가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애도의 과정을 온전히 통과하지 못하고 상실의 아픔에 눌려 있다면 우리는 죽고 싶거나 남을 파괴하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이것이 우울증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는 의식 속에서의 상실이지만 우울증은 무의식 속에서의 상실이다. 의식 속에서 상실한 대상과 그 이유를 정확히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고통을 감당할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이 무엇을 왜 상실했는지를 모르면 애도에 실패한다. 무조건 슬퍼한다고 애도가 아니다.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왜 상실했는지를 정확히 밝히고 풀어야 한다.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궁핍한 시대의 글쓰기/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궁핍한 시대의 글쓰기/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요즘은 말과 글의 역할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이 종종 든다. 나만 그런 건 아닌 듯하다. 문학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이들이 대개 비슷한 고민을 한다. 탈진실(post-truth)의 태도가 세상을 지배한다. 남들이 쓴 글을 찬찬히 새겨듣고 자기 생각과 감각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말과 글이 엉터리라고 하더라도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면 옳다고 받아들인다. 아무리 타당한 글도 ‘우리 편’이 아니면 설득력 있는 근거가 있어도 배척당한다.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글에도 뒤틀린 당파주의가 작동한다. 말과 글의 위기 상황이다. 최근에 읽었던 문학상 수상소감에서도 비슷한 우려를 발견했다. “소설을 쓸 때 이따금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이 소설에 관심을 가져 줄까? 관심이 뭐 그리 중요한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은 결국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제 안에 머무르며 저를 성장시킬 수는 있어도,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요.”(이서수, 길동무 창작기금 수혜 소감) 이서수 작가는 문학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에 답답함을 느낀다고 하지만 문학이 그런 역할을 하던 시대는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이웃 나라를 아는 법/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이웃 나라를 아는 법/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서양 문학을 연구하고 틈틈이 한국문학 평론을 하는 내게 친숙한 것은 서양 문화와 문학이다. 그 이유가 내가 영미문학을 연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요즘은 학교에서도 세계사를 필수로 배우지 않는다고 하던데, 오래전 학교에서 배웠던 세계사에서도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건 서양사와 서양 문화였다. 일면 이해할 만하다. 17세기 이래 세계사를 서양 문명이 선도한 것은 부인하기 힘들며 그 영향력은 여전하다. 특히 2차대전 이후는 미국이 두드러진다. 영문학 전공자로서 나는 미국 문학과 문화 혹은 그 이전 세계제국을 경영했던 영국에서 배울 건 배워야 한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내 경험을 돌아보면 그렇게 지리적으로 먼 서양 문화는 친숙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동아시아 이웃 국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게 없다는 걸 동아시아 교류 관련 공동연구에 참여하면서 실감했다. 그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제도권 교육에서 이웃 나라인 중국, 일본, 우리와 비슷한 식민지 경험을 지닌 베트남, 대만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과목이나 국가관 관계를 다룬 균형 잡힌 교육 과정을 찾기 힘들다. 균형 잡힌 교육이란 매사를 자국 중심으로만 바라보는 편협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이상한, 비범한/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이상한, 비범한/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장안의 화제작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두고 여러 말이 나온다. 제목이 눈길을 끈다. ‘이상한 변호사’. 영어 표기로는 ‘extraordinary attorney’, 평범함(ordinary)에서 벗어난(extra) 독특하고 비범한 변호사라고 적었다. 변호사 우영우를 두고 이상하다고 보든(자폐 스펙트럼), 비범하다고 보든(뛰어난 법무 능력) 모두 남들이 내리는 판단이다. 그렇게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쉬운 답이 있다.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게 기준이 된다. 하지만 다수가 같은 생각을 한다고 해서 언제나 옳은 건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인류 문명의 변화나 발전은 불가능했다. 문명사는 의견을 묵살당하며 이상하다고 여겨졌던 소수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리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예컨대 민주공화국에서는 성적소수자가, 노동계급이, 유색인종이 원리적으로는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가진 몫을 찾아간 것을 들 수 있다. 당연히 장애인도 포함된다. 따져 봐야 할 건 정상과 비정상, 옳고 그름, 맞고 틀림을 나누는 기준이 얼마나 타당한가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우영우는 이상하지만, 우영우가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이상하다.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그래도 부모인데’라는 말/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그래도 부모인데’라는 말/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자식을 같이 키우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모성(母性)의 힘은 생명체를 상당한 시간 동안 몸에 품고 기르다가 세상에 내놓기에 생물학적 본능에 따른 강한 연대감에서 나온다고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종종 모성을 신비화하는 오류에 빠진다. 그렇다면 부성(父性)은 어떤가?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대표작 ‘율리시스’에서 썼던 표현이 마음에 남는다. “부성은 법적 허구다.” 아버지와 자식 관계는 법적 관계, 그것도 허구적인 관계에 가깝기에 관계를 유지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많은 한국 소설이 모성과 부성의 성격을 다뤄 왔지만 특히 황정은 소설의 관점이 독특하다고 생각해 왔다. 부모 캐릭터, 특히 아버지 캐릭터를 대하는 까칠하고 냉정한 서술의 배경이 궁금했다. 황정은 에세이 ‘일기’에 실마리가 있다. “그래도 부모인데 가족인데. 이 말은 그래서 아무런 입장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의견도 생각도 마음도 아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이 입장이고 의견이고 생각이고 마음일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부모이고 가족’이라는 말은 그중 어느 것도 아닐 뿐 아니라 누군가를 죽음으로 등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문명인이란 존재/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문명인이란 존재/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넷플릭스의 한국형 SF 드라마 시리즈 ‘고요의 바다’를 보면서 일본의 정치철학자 사이토 고헤이가 쓴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서 읽은 구절이 떠올랐다. “소를 기르는 데는 방대한 토지가 필요한데, 어떡하면 될까? 공장에서 생산하는 인공육으로 대체하면 된다.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질환은 어떻게 할까? 유전자 공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 자동화는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 주겠지만, 로봇을 움직이기 위한 전력은 어떻게 확보할까? 태양광 발전으로 충당할 수 있다!” 사이토는 이런 입장을 기술 가속주의(accelerationism)라고 비판한다. 인류가 처한 환경 파괴의 문제를 새로운 과학기술의 개발로 해결할 수 있다는 태도다. ‘고요의 바다’에서는 기술로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하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과는 파국이다. 할리우드 영화도 비슷하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터스텔라’의 기둥 서사는 인류가 살 수 없게 된 지구를 버리고 이주해 살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영화에서는 다채로운 과학 개념이 시각적으로 흥미롭게 펼쳐지지만 내가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가졌던 물음은 이것이었다. 인류의 잘못으로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이제는 다른 곳으로 이주하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넘치는 정보, 부족한 지혜/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넘치는 정보, 부족한 지혜/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컴퓨터로 제작된 현란한 이미지를 과시하는 마블 코믹스 신작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며 했던 생각. 영화의 호흡이 매우 가빠졌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쉴 새 없이 다음 장면이 이어지면서 어느 한 장면을 차분히 바라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국내외 대개의 영화가 이렇다. 이제는 이미지의 부족이 아니라 이미지의 과잉이 문제다. 영화만이 아니라 넘쳐나는 이미지 속에 그 이미지의 의미를 따져 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인상 깊게 봤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가 뉴욕비평가협회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을 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보고 듣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기본이며, 이런 생각을 내게 알려 준 것은 영화다.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면 외부의 정보를 받고 처리하는 동안에도 진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우리 시대는 남의 말과 모습을 찬찬히 듣고 살피기보다는 내 말을 더 많이 강하게 해야 인정받는 세상이 됐다. 내 주장을 위해 더 많은 정보를 모은다. 그런데 그렇게 정보를 모으는 동안 그 정보가 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는 잊는다. 생각할 여유가 사라진다.  누구나 결핍보다는 넘침을 좋아하고 빈곤보다는 풍요를 갈망한다. 정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국립대를 줄인다고?/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국립대를 줄인다고?/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부쩍 한국에 대학다운 대학이 있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질적인 측면과 양적인 측면 모두에서 그렇다. 여기서는 너무 적은 수의 국립대학 문제를 논하겠다. 한국에는 2021년 기준 426개 (전문)대학이 있다. 국공립은 57개교, 사립 369개교다. 학생수로는 재적 학생 295만명 중 63만명(21%)만이 국공립대를 다닌다. 국공립대는 해방 이후 19개에서 2020년 54개로, 거의 늘지 않았다. 사립대는 10개에서 285개로 폭증했다. 국가가 고등교육을 책임지지 않은 결과다. 이런 현황은 교육 선진국과 비교해도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학은 압도적으로 국공립대가 많다. 한국고등교육 체제의 틀을 제공한 미국과 비교해도 기형적이다. 2019년 기준 미국의 (전문)대학생은 대략 1660만명이다. 공립대학 재학생은 1300만명(78%)이다. 미국 사립대는 1600여개로 숫자로는 공립대와 엇비슷하지만 학생수는 공립대가 훨씬 많다.  사정이 이런데도 수도권 집중 심화와 학령 인구 감소 등을 이유로 지난 10여년간 반강제적으로 국립대 통폐합이 이뤄졌다. 나빠지는 교육 여건에서 대학이 생존책을 모색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로 국립대 통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대중지성은 없다/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대중지성은 없다/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문학선생이자 평론가로서 꽤 오랫동안 이런저런 작품을 읽으면서 갖게 된 물음. 인간은 과연 이성적인가? 인간은 이성적이기보다 감정과 정념(passion)에 휘둘리지 않는가?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옳으므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믿기에 옳다고 합리화하지 않는가? 정념이 지닌 힘과 한계를 강조한 별종 철학자가 스피노자다. 스피노자를 다룬 책 두 권을 읽었다. ‘에티카’를 강의한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진태원)과 스피노자의 삶과 사상을 정리한 ‘고용한 폭풍, 스피노자’(손기태). 새삼 주목한 건 대중을 대하는 스피노자의 시선이다.  뛰어난 작가나 예술가가 대중에게 오해받고 고독한 삶을 강요받은 사례는 많다. 스피노자도 그렇다. 태어나고 속했던 유대교의 전통적 교리나 관습에서 벗어나려 했던 스피노자는 파문당한다. “모든 저주가 그를 덮칠 것이며 주께서 하늘 아래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 없애실 것이다”라는 저주와 함께. 대중에게 신앙의 자유, 사유의 자유를 지킬 걸 요구했던 그에게 돌아온 건 광신도의 살해시도였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택한 길은 분노나 슬픔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지성이었다.  스피노자가 평생 고민했던 화두는 종종 이성보다는 충동과 정념에 이끌리는 대중과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대학을 옮기자/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대학을 옮기자/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대선 정국에서 가장 홀대받는 분야는 교육정책, 특히 고등교육정책이다. 그만큼 정치, 외교, 사회 분야의 굵직한 이슈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교육 문제는 수많은 이슈가 얽혀 있어 쉽게 풀기 힘든 문제라는 게 주된 이유로 보인다. 김종영 교수의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이 문제를 푸는 방도를 제시한다. 저자는 ‘왜 한국만 교육지옥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 원인을 더 나은 상징자본(학벌 간판)을 얻기 위해 몰리는 병목현상이라고 설명한다. 학벌대학을 향한 고속도로에서 한 방향으로만 모두가 달리기 때문이다. 학벌대학 학위를 둘러싼 극심한 경쟁이 병목을 일으킨다. 병목을 방지하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넓혀야 한다. 서울대(수준) 10개를 전국에 만들어서 병목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설명과 고뇌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력감을 느낀다. 달걀로 바위를 두드리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설령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더라도 그것이 문제라는 게 분명하다면 계속해서 부딪치고 해법을 고민하는 노력은 필요하다. 그 점에서 이 책을 읽으며 눈길을 끈 것은 지역(경제)과 대학의 관계를 설명한 대목이다. “도시의 성공 열쇠는 기업 유치가 아니라 인재를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무지의 민주주의/오길영 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무지의 민주주의/오길영 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SF영화에 한 획을 그은 ‘매트릭스’를 종종 비평 수업에서 다룬다. 여러 흥미로운 주제가 있다. 예컨대 윤리의 기준은 무엇인가? 영화에는 진실의 길을 택했다가 환멸감에 빠져 동료를 해친 사이퍼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무지가 축복이다.” 이런 주장에 동의할지는 각자의 몫이고 무지의 길을 택하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들의 삶을 훼손할 수는 없다. 사이퍼의 잘못은 거기에 있다. 사실이나 진실도 부정되고, 옳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기 때문에 옳다고 주장하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다. 그렇다고 윤리의 기준이 달라질 수는 없다. 삶의 주체로서 ‘내’ 인생이 소중하면 또 다른 주체인 다른 사람의 인생도 그에게는 중요하다.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도 이것과 관련된다. 자유민주주의는 굴곡진 한국 현대사에서 자주 오해된 개념이다. 자유주의(liberalism)의 고갱이를 납작하게 해석한 결과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한다. 거기에는 민주공화국의 핵심이고 헌법에도 보장된 사상과 언론의 자유도 포함된다. 동시에 누군가의 말을 자유롭게 반박하고 반대하고 비판할 자유도 인정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그렇게 사상, 말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수상 소감을 들으며/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수상 소감을 들으며/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어느 문학상 시상식에서 문학의 울림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글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표현하지만 가끔은 생생한 육성을 통해서도 그렇게 한다.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와 독일 작가 예니 에르펜베크가 전한 수상 소감을 들으며 오랜만에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한때 문학의 정치라는 말이 떠돌았다. 나는 문학과 정치가 그렇게 쉽게 연결될 수 없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정치는 집단적 행위다. 권력을 기반으로 공동체를 움직이는 행위다. 문학은 창작과 수용에서 집단적 주체가 아니라 개별 주체와 관련된다. 좋은 문학이 가져올 수 있는 감성의 충격과 변화, 고유한 내용과 형식이 주는 낯설게 하기, 그를 통한 새로운 감각과 인식은 문학의 소중한 역할이다. 그러나 그것을 꼭 문학의 정치라 부를 이유는 없다. 문학의 정치 담론이 떠올랐다가 곧 시들해진 이유다. 문학에 무거운 짐을 지울 이유가 없다. 문학은 그렇게 창작과 독서에서 개별적 행위이지만 거기에 담기는 새로운 감성과 인식의 창조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문학은 제도 정치처럼 거창하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읽은 이의 마음을 조금 움직일 수는 있다. 그런 사소한 울림에서 세상의 변화가 시작된다고 믿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이번 대선, 바라는 건 딱 하나다/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이번 대선, 바라는 건 딱 하나다/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코로나19 팬데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 직전에 운 좋게 중동부 유럽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 루카치의 도시 부다페스트를 가 보고 싶었던 나에게 그때 여행은 일종의 문화탐방이었다. 탐방에서 배우는 것은 방문하는 나라의 역사와 현재 상황을 몸으로 체험하며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우도 그랬다. 2차 대전을 겪으며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였던 오스트리아는 몇 년간의 신탁통치를 거쳐 온전한 국가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자연스럽게 한반도 상황을 비교하게 됐다. 한반도 평화체제 유지와 관련해 염무웅 선생(이하 존칭 생략) 산문집 ‘지옥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를 인상 깊게 읽었다. 분단, 통일, 남북 관계 등 한반도 문제를 천착해 온 글이 눈길을 끈다. 산문 장르도 점점 사적인 얘기나 소소한 개인적 체험을 말랑말랑한 문체로 쓰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염무웅의 글은 강인한 사유를 잘 보여 주는 에세이의 독특한 사례다. 무엇보다 우리와 비슷한 분단의 위험에 처했지만 그것을 슬기롭게 넘어선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되풀이해 언급하는 대목에 눈길이 갔다. 그리고 저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느꼈다. 한반도는 왜 오스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그들이 쓴 가면/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그들이 쓴 가면/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드라마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하 ‘오징어’)이 장안의 화제를 넘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다. 나는 이 잔혹한 드라마가 왜 인기를 끄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할 능력은 없다. 드라마 자체가 지닌 내용과 형식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도 있고, 드라마가 관객들에게 수용되고 소비되는 측면에서 다룰 수도 있겠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나왔다. 여기서는 흥미롭게 본 쟁점을 좀더 살펴보고 싶다. 첫째, 공정성의 문제. ‘오징어’에서 가장 의아한 장면은 첫 게임인 ‘무궁화 꽃’에서 나온다. 어린이가 즐기는 놀이라는 형식과 잔혹한 내용의 부조화가 눈길을 끈다. 게임 참가자는 계약서의 둘째 조항인 “탈락”의 의미가 즉각적인 죽음이라는 걸 사전에 알지 못하고 게임을 한다. 그 결과 거의 학살이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이 죽는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참가자 중 누구도 이 잘못된 계약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세 번째 계약 조건인 “참가자의 과반수가 동의할 경우 게임을 중단할 수 있다”는 점만 상우(박해수)가 지적한다. 하지만 그 조항은 힘이 없다. 언뜻 자발적 동의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계약은 ‘오징어’보다 더 지옥 같은 게임 밖 현실에서 벌어지는 살벌한 생존 게임 앞에서는 무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무엇을 가르치는가/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무엇을 가르치는가/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얼마 전 이병곤 교장의 인터뷰를 읽었다. 대학 선생으로서 ‘교육’의 의미를 묻게 됐다. 교육의 뜻은 가르쳐서(敎) 기르는(育) 것이다. 무엇을 가르치는가? 교육의 라틴어 어원(educare)을 살펴보면 “내면에 숨어 있는 재능과 잠재성을 끄집어낸다”는 뜻이다. 한국의 학교 교육은 그 어원에 얼마나 충실한가? 범박하게 말해 이미 알려진 지식을 기계적으로 학습시키고 시험 본 결과로 학벌주의로 위계화된 대학에 진학시키는 걸 교육이라고 여긴다. 그건 입시 준비지 교육이 아니다. 간디학교 사례를 읽으며 눈길을 끈 것 몇 가지를 소개한다. 간디학교는 개교 이후 23년 동안 당해 연도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 0%다. 입시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서고,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친다.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하는 비인가 학교지만 학생, 교사, 학부모 등 구성원이 행복한 학교다. 나는 “행복한 학교”라는 말에 마음이 끌렸다.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그 구성원에게 대체로 불행한 곳이 아니던가. 졸업장을 따기 위해,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재미없고 시대에 뒤떨어진 지식을 억지로 습득하고 시험 성적으로 결과를 평가받는 곳. 중고등 과정을 통합 운영하는 간디학교에서는 다른 학년의 아이들이 함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예술원과 국가/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예술원과 국가/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현대소설의 대표자인 아일랜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삶과 문학을 만화로 다룬 책을 읽었다. 알폰소 자피코가 지은 ‘제임스 조이스: 어느 더블린 사람에 대한 연대기’다. 2012년 스페인 국립 문화상 수상작이다. 재미있고 유익하다. 이 책에는 조이스와 아일랜드 시인 W B 예이츠의 관계가 흥미롭게 묘사된다. 예이츠는 거의 일방적으로 조이스를 후원하고 지지했다.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조이스를 여러 번에 걸쳐 도와주고 조이스의 작품을 높이 평가한다. 한 작가가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이 기본이지만 재능을 인정해 주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조이스는 운이 좋았다. 그런데 조이스는 예이츠에게 같은 마음을 주지 않는다. 아일랜드 문학 아카데미 건립에서 보인 의견 교환이 한 예다. 예이츠와 버나드 쇼가 주도해 설립을 준비하던 아일랜드 문학 아카데미의 창립 회원으로 조이스를 초대한다. 그런데 조이스는 거절의 편지를 보낸다. “무슨 연유로 저 같은 자의 이름이 그런 아카데미와 연관해 거론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회원으로 저 자신을 천거할 자격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이스가 예술원 등 기성의 국가 조직을 대하는 시각을 예리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별것 아닌 호의/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별것 아닌 호의/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선거를 준비하는 때다. 큰 말이 오고 간다. 으르렁거리는 말이다. 이해한다. 원래 정치는 상대방을 제압해야만 ‘내’가 사는 야수들의 게임이다. 하지만 그런 거친 말을 자꾸 들으면 피곤해진다. 심미안에 거슬린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국가, 민족, 국민을 들먹인다. 공허한 말이다. 아주 가끔 그런 말이 울림을 지니는 때도 있다. 국가와 사회 공동체가 위기에 처한 때가 그렇다. 국가가 침략을 당하거나 지금처럼 심각한 바이러스 방역이 요구되는 때다. 평상시에 사람은 작은 울타리 속에서 의미를 찾고 산다. 가족, 친구, 동료와 맺는 관계가 그것들이다. 그 관계들이 좋을 때 우리는 행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다. 작은 울타리가 헐거울 때 우리는 쉽게 불안해진다. 오래전 한 외국 친구가 했던 질문이다. 한국인들은 낯선 이들을 마추칠 때 왜 대체로 얼굴이 굳어지는가? 우리는 왜 상대방이 나에게 건네는 부드러운 말에 부드럽게 응답하지 않는가? 우리는 의심한다. 무슨 저의가 있는 게 아닌가? 날 이용하려는 게 아닌가? 그래서 표정이 딱딱해진다. 역시 이해할 만하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공정의 기준으로 언급되는 시대에는 자연스러운 방어 메커니즘이다. 상대방을 딛고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평상심 배우기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평상심 배우기

    많이 인용되는 ‘논어’ 구절 하나.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역시 군자답지 않은가.” 통상 이 구절을 군자다움의 덕목을 요약한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렇게 삐딱하게 읽을 수도 있다. 남들이 알아주는 것에 사람들은 목을 맨다. 그런 욕망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가. 그리고 군자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사람들이 돈과 물질과 권력을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자체가 주는 쾌락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소유할 때 남들로부터 받게 되는 부러움의 시선에서 얻는 쾌락이 더 크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그렇게 힘이 세다. 돈, 물질,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는 지식인이나 문화예술인도 예외는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작품과 이름이 인정받기를 욕망한다. 상징권력의 욕망이 내면에서 꿈틀댄다. 2019년 발간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연감에 따르면 국내 주요 문학상의 개수는 238개란다. 이렇게 많은 문학상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마 그렇게 많은 상을 주고받을 만큼 매년 한국문학공간에서 탁월한 작품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까? 지난해와 올해 한국 영화계에는 잇달아 경사스러운 소식이 들렸다. 어쨌든 국제적으로 저명한 상을 받는 건
  •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자산어보’에서 배우는 것

    [오길영의 뾰족한 읽기] ‘자산어보’에서 배우는 것

    좋은 문학과 영화에서 얻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곳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특정한 시대를 다룬 역사소설이나 시대영화를 읽고 보는 이유다. 역사적 사실을 아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건 시험용 지식이다.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에도 나오듯이 중요한 건 누가 뭐라고 떠들었다는 걸 외워 적는 것이 아니다. 공부(工夫)의 본뜻은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왜 배우고 익히는가? 영화에서 정약전(1758∼1816)이 창대에게 던지는 근본 물음이다. 공부에는 학문만이 아니라 기술도 포함된다. 창대처럼 물고기라는 대상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도 공부다. 공부는 단지 입신양명의 수단이 아니다. ‘자산어보’를 보면서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형제의 삶을 좀더 자세히 알게 됐다. 정약용은 실학의 대표자이기에 친숙한 이름이다. 형과 동생인 정약전, 정약종은 이름만 아는 정도였다. 해양생물을 다룬 책 ‘자산어보’의 저자가 정약전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 책의 집필 과정에 숨은 사람과 시대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면서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영화의 힘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을 영화에 비춰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하게 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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