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영 충남대 교수·문학평론가
최근에 읽었던 문학상 수상소감에서도 비슷한 우려를 발견했다. “소설을 쓸 때 이따금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이 소설에 관심을 가져 줄까? 관심이 뭐 그리 중요한 것이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은 결국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습니다. 제 안에 머무르며 저를 성장시킬 수는 있어도,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요.”(이서수, 길동무 창작기금 수혜 소감) 이서수 작가는 문학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에 답답함을 느낀다고 하지만 문학이 그런 역할을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문학은 사소해 보이는 생활의 여러 면모가 품은 의미를 따지면서 그것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실험한다. 그런데 그 모든 실험은 언어를 통해 이뤄진다. 일상언어와 문학 언어는 서로에게서 힘을 얻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언어가 혼탁해질 때 문학 언어가 생기 있는 힘을 지닐 수 있을까?
올해 이호철 통일로문학상 수상소감에서 중국 작가 옌롄커는 좀더 명확한 입장을 드러냈다. “지금 (세계의) 정치가들이 지혜롭지 못해 평화롭지 못한데 우리는 모두 평화로운 세계에 살아가길 바란다. 작가가 현실에 대해 써도 국가나 사회가 바뀌진 않는다. 다만 나는 내 마음에 있는 것을 진실하게 표현할 뿐이다.” 나는 최근의 국내외 시국을 보면서 대중민주주의가 지닌 선출 시스템에 의구심을 갖게 됐다. 그렇다면 대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고 해도 사실 내게 뾰족한 방안은 없다. 그러나 옌롄커의 지적대로 지혜로운 지도자를 찾기 힘들다. 천박해진 정치의 언어는 일상언어가 처한 위기를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와 비평가 등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이들은 심한 무력감을 느낀다. 세상의 언어가 혼란해지고 사유가 납작해진다. 깊은 사유와 언어, 그에 기반한 이성적 소통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작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뻔한 말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마음에서 표현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성실하게 쓸 뿐이다. 진실의 등불을 고독하게 지킬 뿐이다. 오래전 어느 외국 시인은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의 현실은 궁핍한 시대의 글쓰기는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2022-10-17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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