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칼럼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인간의 부재-대량살상 시대의 미학/미술평론가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인간의 부재-대량살상 시대의 미학/미술평론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각국 정부는 포스터, 영화 같은 대중매체를 동원해 ‘위대한 투쟁’에 참여하라고 청년을 독려했다. 조국에 봉사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전쟁에 나간 청년은 서부전선의 무시무시한 현실에 부딪혔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프랑스 북동쪽 베르? 지역에서는 300일 동안 전투가 계속됐다. 군인들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극한적인 공포 속에서 집중포화가 끝나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수류탄과 포탄, 독가스는 전쟁 선전물이 만들어 낸 기사도적 환상을 와르르 무너트렸다. 헤밍웨이가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주인공 프레더릭 헨리를 통해 말하듯이 전쟁은 신성하지도 영광스럽지도 않았으며, 군인들은 죽은 후 ‘그냥 땅속에 파묻는 것만 빼면 시카고 도축장의 가축 수용소에 수용된 가축이나 다를 바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당대의 지적 분위기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전쟁을 재현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발로통이 그린 전장은 기하학적으로 구조화돼 있다. 앞쪽에 언덕의 경사면이 보인다. 비가 내리는 것인지, 총탄이 빗발치는 것인지 무수한 빗금이 그어져 있다. 건너편 언덕에는 타다 만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두 언덕 사이에 포탄이 떨어져 희고 검은 연기가 뭉
  • [배민아의 일상공감] 옷에 대한 단상/미드웨스트대 교수

    [배민아의 일상공감] 옷에 대한 단상/미드웨스트대 교수

    어린 시절 외출에서 돌아오신 엄마의 손에는 가끔 커다란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한 해가 다르게 쑥쑥 성장하는 4남매의 계절별 옷 장만을 위해 지인의 자녀들에게 물려받은 옷을 수시로 싸 들고 오신 것이다. 엄마의 옷 보따리를 푸는 건 늘 내가 먼저였다. 무심함이 특기인 오빠에게 옷은 그저 몸을 보호하는 기능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고, 남동생은 용돈을 안 쓰고 모아서 자기가 원하는 옷을 사 입길 원했으며, 체구가 작은 막내는 맞는 옷이 별로 없었기에 엄마의 보따리 옷들은 성별, 색깔, 크기에 상관없이 대부분 내 몫이었다. 다행히 그 옷들은 나쁘지 않았고, 심지어 어쩌다 한 번씩 사 주셨던 새 옷보다 더 고급스러운 옷도 많다. 비록 헌 옷이지만 두 번째 주인이라는 마음으로 엄마의 보따리를 즐겁게 풀곤 했다. 여러 색 물방울무늬가 있던 큰 코트는 소매를 접은 채로, 또 펴서, 그 후에는 팔목이 깡충 나올 때까지 몇 해를 두고 가을이면 즐겨 입던 잇템이었다. 발목 위로 쑥 올라오는 짧은 바지는 허리만 맞으면 괜찮다며 다른 천을 바지 끝에 나팔 모양으로 덧댄 엄마의 바느질로 두 해 정도 입을 수 있었는데, 의외로 마음에 쏙 드는 패션이었다. 가끔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면
  • [장수철의 생물학을 위하여] ‘우성=우수한 것’이란 착각/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장수철의 생물학을 위하여] ‘우성=우수한 것’이란 착각/연세대 학부대학 교수

    우성과 열성은 무엇일까. 키가 크면 우성일까? 지능지수가 높으면 우성일까? 힘이 더 세면 우성일까? 사람들은 흔히 ‘우수한 것’을 우성이라 착각하지만 우수한 것이 우성은 아니다. 유전학에서 우성은 양친에게서 물려받은 두 유전자 중 하나만 있어도, 그것이 무엇이든 그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양친으로부터 다지증 유전자와 정상 유전자를 물려받은 사람은 다지증을 나타내기 때문에 다지증 유전자가 우성이다. 멘델이 유전 현상에서 우성과 열성을 발견한 것은 생물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멘델은 흰색 유전자만 둘을 가진 흰색 순종 꽃과 보라색 유전자만 둘 가진 보라색 순종 꽃을 교배하면 그 자손들은 모두 보라색 꽃만 나오는 현상을 관찰했다. 이처럼 자손들에게 두 가지 유전자 특징 중 어느 하나만 나타나는 것을 완전 우성이라 불렀다. 반면 흰색 꽃은 흰색끼리 교배할 때만 나타나므로 열성이라 했다. 멘델은 보라색 순종과 흰색 순종을 교배해 얻은 1대 잡종 자손이 보라색 꽃만 나타나는 결과를 보고 흰색 유전자가 없어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1대 잡종 자손끼리 교배한 결과, 2대 자손들의 꽃은 보라색 꽃과 흰색 꽃이 3대1 비율로 나타났다.
  • [박상현의 테크/미디어/사회] 정의감 앞세운 네티즌 수사대 지나친 언행, 집단 린칭은 아닌가/오터레터 발행인

    [박상현의 테크/미디어/사회] 정의감 앞세운 네티즌 수사대 지나친 언행, 집단 린칭은 아닌가/오터레터 발행인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끄는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인터넷 탐정, 네티즌 수사대가 등장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몰려들면 반드시 엉뚱한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 역시 전 세계가 똑같다. 하지만 미국에서 네티즌 수사대의 폐해가 가장 심각하게 드러난 것은 2013년 보스턴마라톤 대회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 때였다. 이 사건의 전개는 네티즌 수사대가 뛰어들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모인 결승선 주변에서 터진 두 개의 사제폭탄에 세 명이 사망하고 십여 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범인은 폭탄을 놓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고 행적이 묘연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길거리였기 때문에 폐쇄회로(CC)TV들이 설치됐 있었고 워낙 유명한 대회이다 보니 방송국 카메라도 모여 있어 다양한 각도로 촬영된 영상들이 인터넷에 풀렸다. 사람들은 인기 온라인 커뮤니티인 레딧(Reddit)에 모여 각종 영상을 분석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범인을 찾아나갔다. 미국의 네티즌 수사대는 특히 결승선에 선수들이 도착하고 있는데도 그쪽을 바라보지 않고 현장을 떠나는 사람들을 주목했다. 범인이라면 할 법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네티즌 군중심리에 좌우, 의심이 사실
  • [데스크 시각]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김동현 사회2부 차장

    [데스크 시각]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김동현 사회2부 차장

    박성민 대통령비서실 청년비서관 임명은 공정한가? ‘공정하지 않다’고 보는 이들의 비판 지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경력’이고, 나머지는 ‘경쟁’이다. 아직 경력이 부족한 박 비서관이 경쟁 없이 1급 공무원이 된 것은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반면 ‘공정하다’고 보는 이들은 청년비서관이 본래 정무직이기 때문에 공채와 같은 경쟁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또 청년 문제를 고민하고 해법을 찾는 자리인 만큼 경력보다 청년과의 공감대가 더 중요하다고 맞선다. 형식적으로는 ‘공정하다’는 이들의 말이 더 논리적이다. 정무직은 대통령이 국정 철학을 펼치기 위해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으면 쓰고 싶은 사람을 임명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정무직 인사 채용에 공정의 잣대를 들이 대는 것은 맞지 않다. 만약 박 비서관 임명을 문제삼으려 한다면 모든 정무직과 소위 낙하산이라고 불리는 공기업과 공공기관장 임명도 비판해야 한다. 결국 정무직인 박 비서관의 임명을 ‘공정하다’, ‘공정하지 않다’로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 비서관에 대한 공정 논란은 그냥 정치적 공세일까. 그렇지 않다. 이번 인사를 가장 강하게 비판하고, 분노한 이들은 20대 남성이다. 정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파라오, 최초로 동쪽을 치다/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파라오, 최초로 동쪽을 치다/이집트 고고학자

    지난 회에서 소개한 ‘최초의 여성 파라오’ 메르네이트의 왕위는 그의 아들 덴에게 큰 문제 없이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그 계승이 메르네이트 사후에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덴이 성년이 돼 이루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파라오 덴과 관련 있는 유물들 가운데는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파라오 덴의 상아 라벨’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유물이다. 현재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에서 소장 중인 하마의 상아로 만들어진 가로, 세로가 각각 5.4센티미터, 4.5센티미터인 이 라벨은 기원전 3000년 즈음에 만들어졌다. 덴의 상아 라벨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에밀 아멜리누가 아비도스에 있는 덴의 무덤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물의 구체적인 출토 맥락은 기록되지 않았다. ‘보물 찾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19세기 당시 고고학 발굴의 한계였다. 상아 라벨에는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의 머리 끄덩이를 잡고 곤봉 같은 것으로 내려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때리는 인물은 파라오이고, 맞는 인물은 ‘파라오의 적’이다. 파라오가 누군가의 머리채를 잡고 내려치는 이런 스타일의 장면은 너무나 전형적인 것이어서 이집트 문명기 내내 그러니까 거
  • [이은혜의 책 사이로 달리다] 사회의 여백/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의 책 사이로 달리다] 사회의 여백/글항아리 편집장

    2019년 10월 초 도쿄에서 태풍 하기비스를 만났다. 태풍의 위력은 대단해 사람이 날아갈 정도였다. 호텔에 이틀간 갇혀 있었더니 먹을 것이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신주쿠 번화가로 나갔다. 거리에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문 연 음식점을 찾아 걷던 그때 반갑게도 길에 등을 대고 얼룩처럼 붙어 있는 사람 몇 명을 만났다. 바로 노숙인들이었다. 평소 번드르르하게 꾸민 백화점 주변에 기웃거리지도 못했던 그들은 태풍으로 백화점이 문을 닫자 건물 포치 아래서 하늘을 향해 누운 채 여유 있게 비를 감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본이란 나라는 청결함의 대명사인데, 누구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청결한 일본이라도 일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청결하지 않은’ 무언가가 제 몫을 찾아 속속 거리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미셸 푸코는 언젠가 레몽 루셀이나 앙토냉 아르토와 같은 이들의 작품을 보고는 놀라워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특이성, 즉 사람들이 정신병적 증상이라 부르는 것을 부정하기보다 이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꿔 작품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푸코는 여기에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한 사회가 자격을 박탈해 배제시킨 이들이 작품에 등장해 긍정
  • [성태윤의 경제 인사이트] 엘살바도르는 자국 화폐 왜 포기했나/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성태윤의 경제 인사이트] 엘살바도르는 자국 화폐 왜 포기했나/연세대 경제학부 교수

    최근 중앙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 정부가 비트코인을 법정 화폐로 채택하겠다고 밝히면서 관심의 대상이 됐다. 특히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금융감독과 조세징수 관점에서 디지털 가상자산에 대한 규제 및 감독을 강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발표여서 주목받는 뉴스였다. 국제금융시장에서 합법적인 외환거래를 우회하거나 세금 포탈 내지는 불법적인 자금세탁 등에 디지털 가상자산이 사용되는 문제와 이에 대한 규제 방안의 필요성이 국제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이었기에 해당 조처는 더욱 관심을 끌었다. 일단 비트코인을 법정 화폐로 채택했다고 하면 기존의 엘살바도르 화폐를 대체하거나 이와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개념은 아닌데, 그 이유는 엘살바도르는 이미 2001년 자국 통화 ‘살바도란 콜론’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즉 엘살바도르는 현재 자국 화폐 대신 미국 달러를 사용하고 있다. 흔히 ‘자국 통화의 달러화’(dollorization)라고 부르는 조처인데, 달러를 발행하는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화폐 대신에 미국 달러를 공식적인 화폐로 사용하는 경우다. ‘자국 통화의 달러화’는 비단 엘살바도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비슷한 시기인 2000년
  • [세종로의 아침] 중국 외교의 자충수/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중국 외교의 자충수/김규환 국제부 선임기자

    중국에 ‘전랑(戰狼·늑대전사) 외교’가 득세하고 있다. 루사예(盧沙野) 프랑스 주재 중국대사는 얼마 전 “전랑외교는 우리의 정당한 방어책”이라며 “이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해외 늑대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전랑을 보유해야 한다”며 “늑대가 있는 곳에서는 적극 반격해 국가의 존엄과 이익을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수부대 출신 주인공이 아프리카 내전에 뛰어들어 중국인을 구출해 낸다는 중국판 애국주의 영화 ‘전랑’에서 따온 늑대전사는 직업 특유의 수사는 온데간데없고 독설만 내뱉는 중국의 외교관을 지칭한다. 전랑외교는 중국을 건드리면 가차없이 달려들어 물어뜯는 공세적 중국 외교를 상징하는 말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전랑외교는 2019년 말쯤 등장했다. 중국 대사들이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목소리를 높여 중국을 방어하면서다. 대표주자는 ‘싸움닭 외교관’으로 통하는 자오리젠(趙立堅) 외교부 대변인과 루 대사. 북한 주재 대사를 지낸 류샤오밍(劉曉明) 한반도사무특별대표, 리양(李楊)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주재 총영사가 거론된다. 자오 대변인은 2019년 신장(新疆)위구르족 재교육 강제수용소를 강력히 비판하는 서방 37개국의 성명이 나오자
  • [가꾸고 나누고 다듬는 우리말] 일상의 말들이 소통의 핵심/이경우 어문부 전문기자

    [가꾸고 나누고 다듬는 우리말] 일상의 말들이 소통의 핵심/이경우 어문부 전문기자

    <2>행정의 언어 ㉠“시험위원 선임은 시험 실시 직전에” ㉡“중간평가단을 구성하여 10월까지 평가를 실시하고” ㉢“사교육비 조사를 실시하고” ㉣“관련 업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위촉 행사 실시” 생소한 외국어도 보이지 않는다. 어려운 한자어도 없다. 그렇다고 문장이 꼬인 것도 아니다. 무슨 시비를 걸려고 하나 궁금해하는 독자도 있겠다. ‘실시’다. 행정기관의 공문서에서 가장 많이 보이고, 기업이나 단체의 자료, 언론매체의 기사에서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익숙하지만 마냥 편하지는 않다. 군대를 연상시킬 수도 있다. “준비된 사수부터 사격 실시, 낮은 포복 실시.” ‘실시’는 전형적인 군대용어다. 명령을 내린다. 군살이 조금도 붙지 않았다. 간결성 하나는 좋지만 딱딱함, 뻣뻣함, 무거움이 붙는다. 행정기관이나 다른 곳에서 쓰는 ‘실시’라고 이런 뜻빛깔을 크게 탈색시킨 건 아니다. 때로 기관의 권위까지 얹은 것처럼 보인다. ㉠의 ‘실시’는 ‘시작’으로 대체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다. 일상에선 누구도 ‘시험 실시’라고 하지 않는다. 행정기관의 냄새가 물씬 난다. ㉡에선 ‘실시’를 빼고 ‘평가하고’라고 해도 충분하다. ㉢은 ‘사교육비
  •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연지곤지와 가락지의 유래/전 국립고궁박물관장

    [정종수의 풍속 엿보기] 연지곤지와 가락지의 유래/전 국립고궁박물관장

    보통 혼인 증표로 신랑 신부가 반지를 주고받는다. 혼례를 치르는 신부는 이마와 볼에 붉은 점으로 화장을 하는데, 이를 연지곤지라 한다. 연지는 붉은 물감으로 여자들이 입술과 뺨, 미간 등에 바르거나 찍는 것이고, 곤지는 이마 가운데에 연지로 찍는 붉은 점이다. 이런 연지곤지의 유래가 사뭇 재미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후세 부인들은 모두 얼굴에는 붉은 연지(丹注)를 찍고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낀다. 연지라는 것은 옛날 천자의 여러 첩이 월경이 있을 때 월경이 있다는 것을 표시해 임금을 모시지 않았던 데서 유래한 것이라 했다. 월경을 하면 모시기가 어렵고, 이를 스스로 말하기도 어려워 얼굴에 붉은색으로 점을 찍어 표시한 것이다. 사마천도 ‘사기’에서 “정희가 월경을 하므로 임금 모시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희는 한나라 경제의 네 번째 부인으로, 월경이 있어 황제나 제후를 모시지 못하는 것을 정희의 이름을 따 ‘정희의 병’이라 했다. 당나라 때는 얼굴에 연지를 찍은 모습이 예쁘게 보여 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또 중국 오나라의 손화라는 부인 뺨의 상처 치료에 흰 수달피 가루에 옥가루와 호박가루를 섞어 발랐는데 흉터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부인들이 모방했
  • [전경하의 시시콜콜]감사원장

    1963년 감사원이 설치된 이후 제24대 최재형 감사원장까지 전·현직 감사원장은 18명이다. 독립성 보장을 위해 감사원장 임기는 4년으로 돼있지만 지켜지지 않을 때가 많다. 4년 임기를 채우고 몇 년을 더하는 감사원장도 있었으니 감사원장 임기는 모를 일이다. 감사원장 출신으로 국민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15대 이회창 원장일 거다. ‘대쪽’이라 불린 이 전 원장은 김영삼 정부 감사원장 때 청와대와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까지 감사했다. 총리가 된지 4개월 만에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며 사퇴해 김영삼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후 대선에 3번 출마했지만 모두 졌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그리고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졌다. 특히 정치 은퇴 선언을 깨고 나온 3수 도전에서 15.1% 득표에 그쳤다. 1997년 득표율 38.7%, 2002년 46.6%의 절반도 안된다. 감사원장에서 총리로 직행한 인물 중에는 김황식 전 원장도 있다. 그는 광주지방법원장 시절 법원 내부 통신망을 통해 직원들에게 보낸 글에서 자신을 ‘중도저파’(中道低派)라고 했다. 겸손한 리더십으로 평가받으며
  • [한 컷 세상] 농성 중 관심사는?

    [한 컷 세상] 농성 중 관심사는?

    자영업자를 위한 손실보상제와 관련해 국회 본관에서 57일째 농성 중인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책상 위에 놓인 책들. 최근 정치권에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기후변화, 소상공인들의 문제, 디지털 자본주의 등 정치 이슈를 짐작할 수 있다.
  • [2030 세대] 댄디/김현집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역사·철학과

    [2030 세대] 댄디/김현집 공군사관학교 교수부 역사·철학과

    댄디, 댄디하다. 영어로 댄디(dandy)는 옷 잘 입는 사람, 옷에 관심 많은 사람을 가리킨다. 차려입지 않은 듯, 힘을 주지 않고도 멋스러워 보이는 사람, 이것도 댄디다. 댄디한 사람으로 18세기 영국인 ‘보 브러멜’이 있다. 이 브러멜이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남성 정장의 스타일을 만들었다. 댄디는 댄디즘(dandyism)을 만들었고, 문학 스타일, 삶의 태도, 미학, 예술인의 모습까지 일컫기에 이르렀다. 위티한 오스카 와일드, 흰색 플란넬 바지를 입은 TS 엘리엇이 댄디라 할 수 있다. 위트, 댄디, 플란넬, 지금은 자주 쓰는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들을 무엇이 대체했을까. 댄디 하면 떠오르는 사람으로 조금은 생소한 영국의 20세기 연극평론가 케네스 타이넌을 꼽고 싶다. 케네스 피콕 타이넌. 1927년생이다. 자기 아버지의 성(姓)인 중간 이름 피콕(Peacockㆍ공작새)에서 벌써 댄디의 냄새가 물씬하다. 타이넌은 영국 최고의 연극 평론가이다. 적어도 내 생각엔. 글을 뼈를 파고들게 잘 쓰고, 그 글 안에 통찰을 담았다.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롤모델이었다. 타이넌은 옥스퍼드에 입학하던 날 보라색 사슴가죽 슈트와 황금빛 새틴 셔츠를 입었다. 가난한
  • [금요칼럼] 내게 만약 돈이 있다면/전민식 작가

    [금요칼럼] 내게 만약 돈이 있다면/전민식 작가

    나는 가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철이 덜 들었다는 말을 듣곤 한다. 정확하게 철의 의미를 해석할 순 없지만 어감상으로 본다면 세상 물정 모른다는 말인 듯하다. 그래서 철이 뭔지 고민해 본다. 가족에게 사소한 누를 끼치고 지인들에게 가끔 어려운 부탁하고 매달 무탈하게 넘어 갈 기도하며 사는 게 철이 없는 거라면, 확실히 나는 철이 덜 든 게다. 글쟁이가 하루 5시간쯤 자며 글 써보겠다고 버텨도 사실은 철이 덜 든 것이고, 세상 돌아가는 꼴 무시하고 내가 쓰고 싶은 것들만 써대도 철이 덜 든 것이다. 나는 여느 샐러리맨들처럼 들어가는 하루 유지 비용이 적게 드니 다행이라 생각해도 철이 덜 든 것이고, 남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최소 한 주라도 주식을 사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점 역시 철이 덜 든 증거이리라. 세상 돌아가는 대로 움직여야 철이 들었다 말할 수 있을 텐데 글만 쓰며 살아온 시간 동안 익힌 관습들이 세상 변하는 대로 따라가는 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다 보니 늘 뒤처지는 모양새다. 세상 물정에 환한 사람들의 서사를 그려야 그나마 읽힌다 생각해 그리 해 보지만 완성해 놓은 글을 보면 세상에서 동떨어진 인물들만 나타나니 난 역시 세상 물정 모
  • [데스크 시각] 대한민국, 부럽거나 부끄럽거나/김미경 정책뉴스부장

    [데스크 시각] 대한민국, 부럽거나 부끄럽거나/김미경 정책뉴스부장

    “거의 G7이네요. 부럽습니다.” 코로나19 백신 1차 접종이 1200만명에 육박하던 지난 13일 외국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SNS를 통해 이 같은 인사를 받았다. 코로나19와 백신 접종 관련 뉴스를 다루느라 바다 건너 멀리 영국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관심을 갖지 못하다가 지인의 평가에 눈을 돌려 봤다. G7이 아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초청을 받아 앞줄 가운데 서서 기념촬영을 한 것 등에 대한 반응이구나 싶었다. 정상회의 후 일부 언론과 네티즌 등은 대한민국의 위상이 올라가서가 아니라 의전상 참석자 중 대통령을 앞줄에 세웠을 뿐이라며 평가절하했다. 의전은 그렇게 깨알같이 지적하면서도 정작 G7 참석 계기 각종 정상회담 의제와 우리나라의 역할에 대한 보도는 별로 없었다. 이 같은 상황이 아쉬워서였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2일 국무회의에서 G7 참석과 관련해 “대한민국의 달라진 위상과 국격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며 “한국은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 “주요 선진국 정상들은 방역에서도, 경제에서도, 기후변화 등 글로벌 현안에서도 우리나라의 성과를 한결같이 높이 평가했다”며 “한국은 다른 선진국들과 함께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느린 꿈/이송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느린 꿈/이송우

    느린 꿈/이송우 볕이 내린다 끝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햇볕도 늙는다 담뱃불처럼 반짝 타오르면서 나는 볕보다 오래 살 것처럼 핏대를 세우지 않았던가 낡은 외투를 버린다 내 젊었던 몸이 기거한 곳이다 그대 얼굴이 사진 속에서 웃는다 주름진 내 입가가 따라 웃는다 자정 넘어 귀가한 날 요람 속에서 방긋 웃던 아가를 어떻게 안아야 할 줄 몰랐던 나였지만 수학 문제를 풀며 눈물 흘리는 초등학생은 꼭 안아 줄 것이다 꿈에 속도가 있다니 생각해 보지 못한 개념이다. 꿈은 은하수처럼 하늘 먼 곳에서 반짝이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시를 읽으며 내가 지닌 꿈의 개념이 추상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꿈은 느리지만 천천히 찾아오는 것이다. 핏대를 세우던 젊은 날도, 낡은 외투를 불태우던 날도, 사진 속의 그리운 그대가 웃는 날도 기실은 꿈을 향해 느리게 나아가는 순간임을 깨달을 때 마음 안의 햇볕은 비로소 옛 빛을 찾는다. 추적자의 눈을 피해 도적처럼 들른 자정의 집. 요람 속의 방긋 웃는 아가를 어떻게 안아야 할 줄 모르는 아비의 모습. 그 아비를 꼭 안아 주며 눈물 흘리는 초등학생 아이의 모습 속에 우리가 견뎌 낸 지난 시절의 자화상이 스며 있다.
  • [손성진 칼럼] 대선과 적대 정치/논설고문

    [손성진 칼럼] 대선과 적대 정치/논설고문

    바야흐로 대권 레이스다. 벌써 머리가 어지럽다. 내년 대선이 어느 때보다 협잡과 음모가 난무할 가능성이 커 보여서다. 나라와 국민을 이끌어 갈 지도자를 뽑는 선거는 한바탕 축제 분위기로 치러져야 할 터인데 그 반대다. 어느 진영이든 ‘백마를 탄 왕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사람들이 큰 무대로 옮겨서 대결을 이어 가고 있다. ‘저쪽 진영’에서 보면 윤석열이라는 대항마를 키운 1등 공신인 추미애가 “내가 윤석열을 잡겠다”며 어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사실 추미애가 아니었다면 윤석열도 대선판에 없었다. 우습게도 윤석열은 추미애가 낳은 ‘옥동자’가 됐다. 윤석열이 없으면 ‘이쪽 진영’에서는 대선을 치르기가 훨씬 수월할지도 모른다. 이쪽 진영에서 보면 추미애는 결과적으로 아군에게 총을 쏜, 이적 행위를 한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대선판을 기웃거리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대선이 인물다운 인물들이 겨루는 장이 되지 않고, 전투욕과 적개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등판하는 장이 된 것은 오롯이 적대 정치의 결과다. 자천타천으로 대권 주자로 떠오르는 최재형 감사원장도 그런 후보 중의 하나일 것이다. 법조계에서만 뼈가 굵었지 윤석열처럼 정치와 잘
  • [김경민의 한국의 미래] 한미 미사일 지침 해제의 함의/한양대 정치외교학과 특별공훈교수

    [김경민의 한국의 미래] 한미 미사일 지침 해제의 함의/한양대 정치외교학과 특별공훈교수

    문재인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한미 미사일 지침이 해제됐다. 고체연료를 쓰는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무제한으로 풀어 주겠다는 한미 미사일 지침 해제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무려 42년 만의 일이니까 말이다.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서울신문 시론을 통해 고체연료를 쓰는 미사일의 사정거리 800㎞의 제한을 풀어 달라는 대미 외교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여러 번 해온 바 있는데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 고체연료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푸는 데 미국이 동의했다는 것은 한국 안보외교의 승리이고, 미국이 한국의 국격을 높게 신뢰한다는 의미다. 그만큼 우리 국민들이 불철주야 노력하며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 온 덕택이다. 고체연료를 쓰는 미사일은 즉각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연결될 수 있어 미사일확산방지체제(MTCR)의 유지를 완강하게 고집하던 미국이 크나큰 양보를 한 것이다. 물론 그동안 미사일 확산 방지 국제회의에서 한국은 사거리 제한을 풀어 달라는 요구를 꾸준히 해 왔다. 그냥 허랑하게 42년을 보낸 결과가 아니고 미사일 외교를 줄기차게 해 온 성과다. 한미 미사일 지침 해제가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미래의
  • [똑똑 우리말] ‘박이’와 ‘배기’/오명숙 어문부장

    요즘에야 한겨울에도 오이가 나오지만 맛으론 여름 오이를 따라올 수 없다. 입맛 없는 여름철 시원한 오이 하나만 있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새콤한 냉국도 좋고 쌈장에 그냥 찍어 먹어도 괜찮다. 살짝 맛이 든 오이소박이까지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한 끼 밥상이 된다. 오이소박이는 4등분해 십자로 칼집을 낸 오이에 부추와 마늘, 고춧가루 등을 섞은 소를 넣어 담근 김치다. 한데 이를 ‘오이소배기’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발음이 비슷해서인지 ‘박이’와 ‘배기’의 표기를 두고 헷갈릴 때가 많은데 의미가 다른 만큼 반드시 구분해 써야 한다. ‘박이’는 무엇이 박혀 있는 사람이나 짐승 또는 물건이라는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소의 양지머리뼈 한복판에 붙어 있는 기름진 고기는 ‘차돌박이’다, 얼굴이나 몸에 큰 점이 있는 사람이나 짐승은 ‘점박이’, 양쪽 눈 위에 흰 점이 있어 언뜻 보기에 눈이 넷으로 보이는 개는 ‘네눈박이’, 장승감으로 박아서 세워 두는 물건은 ‘장승박이’라 한다. 이처럼 ‘박다’의 의미가 살아 있는 경우에 ‘박이’를 붙인다. ‘배기’는 ‘그 나이를 먹은 아이’(한 살배기, 두 살배기)나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런 물건’(공짜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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