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런던올림픽
  • 결선 못 가도 스타 인터뷰 2시간 걸려

    ‘올림픽의 꽃’ 육상 남자 400m 준결선이 열린 5일 오후(이하 현지시간) 런던 스트랫퍼드의 올림픽스타디움. 오스카 피스토리우스(26·남아공)가 4번 레인 출발대에 섰다. 두 다리 없이 태어나 장애인 최초로 비장애인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블레이드 러너’다. 미소를 지으며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긴장감이 역력했다. 출발 총성이 울렸다. 8명의 선수들은 터질 듯한 심장을 안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지난해 대구 세계육상선수권 챔피언 키라니 제임스(20·그레나다)가 앞서기 시작했다. 스타트가 늦었던 피스토리우스는 보폭을 넓히며 막판 스퍼트했지만 격차는 그대로였다. 46초54, 8명 중 꼴찌. 4일 예선 기록이자 올해 최고기록이었던 45초44는 물론 자신의 최고인 45초07에도 한참 못 미쳤다. 망연자실하면서도 그는 관중에게 손 들어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잠시 고요했던 지하의 믹스트존은 다시 전쟁터가 됐다. 그런데 기다린 지 30분이 넘어도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 기록에 실망해 그대로 믹스트존을 빠져나간 게 아닐까.”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언제쯤 나오느냐고 진행요원에게 슬쩍 물어봤다. “한참 멀었어요. 예선 때도 경기가 끝나고 1시
  • 포기 없는 도전… 꼴찌도 아름다웠다

    런던올림픽 개막 다음 날인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올림픽파크 내 아쿠아틱스센터. 남자 개인혼영 400m 예선에 출전한 아흐메드 아타리(카타르)는 5분21초30이란 기록으로 당당하게(?) 터치패드를 찍었지만 조 최하위에 머물렀다. 같은 조 1위였던 선수에게는 1분 이상 뒤졌고, 마이클 펠프스(미국)가 갖고 있는 세계기록 4분03초84와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관중들은 결승점을 향해 열심히 물을 타는 아타리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기록은 형편없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도전 정신. 금메달보다 더 아름다운 꼴찌들에게 보내는 갈채는 아타리만이 아니었다. 조정 남자 싱글 스컬에서는 입문 3개월의 ‘초짜’ 하마두 지보 이사카(니제르)가 2000m 레이스를 8분39초66에 완주했다. 1위보다 1분39초가 늦은, 역시 꼴찌였지만 배운 지 이제 막 3개월이 지난 솜씨치고는 제법이었다. 수영선수였던 그는 니제르수영연맹의 도움으로 이집트에서 2주 동안 조정을 배우고 튀니지 국제조정센터에서 두 달 기량을 연마한 뒤 이번 대회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와일드카드를 받고 나섰다. 이사카는 “나를 보면서 내륙국가인 우리나라에서도 조정을 배우려는
  • 앤디 머리, 황제를 제물로 ‘4전 5기’

    두드려도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윔블던의 육중한 문. 테니스를 사랑하는 영국인의 염원은 자기네 땅에서 열리면서도 지난 수십년 늘 다른 나라 선수들이 품기만 했던 윔블던대회 우승컵을 자국 선수가 들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앤디 머리(25)를 ‘영국의 희망’으로 떠받들었다. 그 윔블던 정상이 머리에게 활짝 열렸다. 비록 메이저대회가 아닌 올림픽이지만 정상의 값어치는 같을 터. 더욱이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를 상대로 빼앗은 자리였기에 104년 만에 되찾은 정상의 무게는 더 묵직했다. 머리가 6일 영국 윔블던의 올잉글랜드클럽에서 열린 런던올림픽 테니스 남자단식 결승에서 페더러를 3-0(6-2 6-1 6-4)으로 완파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달 전 윔블던대회 결승에서 역전패해 2위에 그친 아쉬움도 완벽히 털어냈다. 당시 머리의 결승 진출에 영국인들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다. 1936년 프레드 페리 이후 자취를 감춘 대회 우승컵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영국 전역이 들썩거렸다. 그러나 그는 처음 오른 결승에서 페더러를 만나 우승이 좌절됐다. 2008년 US오픈과 2010년과 지난해 호주오픈에서 준우승에 머무른 데 이어 올해 윔블던에서
  • 공중서 1080도 비트는 ‘양1’의 정체는?

    “런던에서 금메달을 따고 코믹한 세리머니를 할 거예요.” 올해 초 인터뷰를 할 때 양학선(20·한국체대)은 해맑은 표정으로 약속했다. 긴장되고 부담스럽기보다는 첫 올림픽이 설레고 들뜨기만 한 ‘철부지’였다. 세상에 없던 기술 ‘양학선’(YANG Hak Seon·난도 7.4)으로 지난해 도쿄세계선수권대회 도마 챔피언을 꿰찬 당돌한 청년은 올림픽 무대마저 거침없이 접수했다. 6일 런던의 노스그리니치 아레나에서 1, 2차 시도 평균 16.533점으로 한국 기계체조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예선에서 1위를 꿰찼던 데니스 아블랴진(러시아·16.399점)을 가볍게 따돌렸다. 하지만 예고했던 ‘웃긴 뒤풀이’ 대신 그저 슈퍼맨 망토처럼 태극기를 어깨에 걸친 채 쉼없이 사진을 찍었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2만명의 관중은 ‘새 챔피언’의 탄생에 뜨거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어릴 적 여의치 않은 형편에도 효성이 지극했던 양학선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전북 고창에 있는) 아버지집을 잘 지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여유 있는 ‘1등’이었다. 8명의 도마 결선진출자 중 가장 마지막에 연기를 펼쳐 더 그랬다. 사실 양학선은 런던에 올 때 세
  • 쑨양 부모,박태환父 만나 “애가 어릴적에...”

    특별취재단 = 박태환(23·SK텔레콤)과 쑨양(21·중국)을 ‘아시아 수영의 대들보’로 길러낸 부모들이 런던에서 만났다. 6일(이하 현지시간) 중국 신화통신에 따르면 박태환의 부모인 박인호-유성미 씨와 쑨양의 부모 쑨취안훙-왕밍 씨는 2012 런던올림픽 남자 자유형 1,500m 경기가 끝난 지난 4일 오후 경기장 인근의 레스토랑에서 만나 20여 분 환담했다. 이들은 애초 수영경기장인 런던 올림픽파크 내 아쿠아틱스 센터에서 보려 했지만 쑨양의 부모와는 달리 박태환의 부모가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경기 후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쑨양의 어머니 양밍 씨가 박태환의 아버지 박인호 씨에게 “쑨양이 어렸을 적부터 박태환을 좋아했다”고 전하자 이에 박인호 씨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 쑨양의 경기를 지켜보고 앞으로 성적이 잘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답례하는 등 상대의 아들 칭찬으로 짧은 만남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박태환은 이번 대회 남자 자유형 200m와 자유형 400m에서 은메달을 따 올림픽에서 2회 연속 2개의 메달을 수확했다. 쑨양은 자유형 400m 우승에 이어 1,500m에서는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어 2관왕에 올랐고 자유
  • 한국, 홈팀 유니폼 입고 ‘브라질 사냥’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사상 첫 4강 진출에 성공한 한국 축구대표팀이 7일(이상 현지시간) 열리는 브라질과의 준결승에 홈팀 유니폼을 입는다. 대한축구협회는 6일 매니저 미팅을 통해 한국이 준결승 경기에서 홈팀으로 결정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은 영국 맨체스터의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리는 브라질과의 4강전에 빨강(상의)-파랑(하의)-빨강(양말)으로 구성된 유니폼을 입을 계획이다. 원정팀이 된 브라질은 노랑(상의)-하양(하의)-하양(양말)의 유니폼을 입는다. 한국은 이번 대회 조별리그 스위스와의 2차전(2-1승)과 가봉과의 3차전(0-0무)에 빨강-파랑-하양 조합의 유니폼을 입고 나서 1승1무를 기록했다. 한국의 홈팀 유니폼은 이번 대회 행운의 유니폼이 됐다. 연합뉴스
  • 사격 김종현, 男 50m소총 3자세 ‘銀’

    한국 남자 소총 대표 김종현(27·창원시청)이 2012 런던올림픽 사격 남자 50m 소총 3자세에서 은메달을 땄다. 김종현은 대회 10일째인 9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울위치 왕립포병대 기지의 올림픽 사격장에서 열린 남자 50m 소총 복사 결선에서 101.5점을 쏴 본선 점수 1천171점과 합계 1천272.5점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김종현은 이번 대회에서 한국에 네번째 메달이자 2000년 시드니 대회 때 공기소총에서 은메달을 딴 강초현(한화갤러리아) 이후 12년 만의 소총 메달을 안겼다. 한국 남자 소총 선수로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이은철(공기소총 금메달) 이후 20년 만의 올림픽 메달이다. 이탈리아의 니콜로 캄프리아니는 본선과 결선에서 모두 대회 신기록을 내며 합계 1천278.5(1천180+98.5)점으로 금메달을 땄다. 동메달은 1천271.3(1천172+99.3)점을 쏜 매튜 에몬스(미국)에게 돌아갔다. 이번에도 마지막 1발이 메달 색을 갈랐다. 캄프리아니가 본선 대회 신기록인 1천180점으로 사실상 우승을 예약한 가운데 나머지 선수들이 은-동메달 경쟁을 벌인 이날 결선에서 김종현의 막판 ‘뒷심’이 빛을 발했다. 본선
  • “올림픽은 아시아인들의 게임”

    “극동 국가 선수들의 성공은 석연치 않다. 하지만, 서구 국가들은 스포츠 강국이라는 주도권을 상실했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인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이 6일자 ‘올림픽의 새로운 힘, 아시아인들의 게임’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아시아 선수들의 선전과 이를 바라보는 서구인들의 시각을 이렇게 대변했다. 이 신문은 런던 올림픽 개막 이후 일주일 동안 올림픽 금메달 3개중 1개를 아시아인이 차지했다면서 지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최종 결과에서는 챔피언 중 28%가 아시아인이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이에 대해 “단지 중국, 한국, 북한, 일본, 카자흐스탄 선수들이 성공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얘기하는 세계의 역사가 이제 아시아의 역사가 돼버렸다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신문은 그러나 올림픽에서 아시아 선수들의 성공에 대해 “약간은 석연찮은 점이 있다”라고 서구인들의 의심 어린 시각을 소개했다. 중국 여자 수영 선수인 16살 예스원의 남자보다 빠른 기록, 한국 펜싱 선수인 신아람의 항의, 아시아 4개 배드민턴 복식조의 져주기 경기 등이 그 예로 지적됐다. 특히 예스원이 400m 개인혼영 마지막 50m 구간에서 남자 우승자인 미국
  • 男 도마 양학선, 한국체조 첫 ‘金’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체조의 새 역사가 열렸다. 한국 체조의 대들보 양학선(20·한체대)이 런던올림픽 남자 도마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 양학선은 6일(현지시간) 런던 노스그리니치 아레나에서 끝난 결선에서 1,2차 시기 평균 16.533점을 획득, 2위 데니스 아블랴진(러시아·16.399점)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시상대 꼭대기에 섰다. 1960년 로마 올림픽부터 참가해 온 한국 체조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체조는 그간 은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4개만 땄을 뿐 52년간 금메달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다 혜성과 같이 등장한 ‘도마의 신(神)’ 양학선을 앞세워 마침내 ‘약속의 땅’ 런던에서 염원을 풀었다. 양학선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이어 올해 최고의 선수들이 참가하는 올림픽마저 정복하면서 2년 만에 세계도마를 완전히 평정했다. 예선 성적 2위로 결선에 오른 양학선은 8명의 출전자 중 가장 나중에 연기를 펼쳤다. 올해 유럽선수권대회 챔피언 출신으로 양학선을 견제할 선수로 평가받은 루마니아의 플라비우스 코크지가 1,2차 시기 평균 16.033점을 기록해 양학선
  • 2년 만에 세계 평정한 ‘도마 神’ 양학선

    런던올림픽 체조 남자 도마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어 한국 체조사에 한 획을 그은 양학선(20·한체대)은 도전 2년 만에 세계를 평정한 ‘도마의 신(神)’이다. 체조를 먼저 시작한 형을 따라 광주 광천초등학교 3학년 때 체조에 입문, 9년 만에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여의치 못한 집안 사정, 게다가 지독히도 술을 즐기던 아버지 밑에서 체조 선수 양학선은 홀로 컸다. 광주체중에 진학해 오상봉 당시 감독(현 광주체고 감독)의 권유로 도마를 시작한 양학선은 일찍 두각을 나타내며 한국 체조를 이끌어 갈 기대주로 평가받았다. 대한체조협회에 등록된 그의 현재 키는 159㎝. 그는 남다른 점프력으로 키가 작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 만번 도마 위를 날았다. 도마는 출발선에서 25m를 달려 스프링보드(구름판)를 밟고 높이 135㎝, 너비 95㎝, 최대 길이 105㎝인 도마(뜀틀)를 양손으로 짚고 공중회전을 한 뒤 매트에 착지하는 종목으로 얼마나 높이 뛰었는지, 얼마나 동작이 화려한지, 얼마나 정확하게 착지했는지를 따진다. 부단한 훈련으로 양학선의 기량은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광주체중 3학년이던 2007년 전국종별대회에서 3관왕에 오르며 체조인들의 관심을 받은 양
  • 한국 체조 올림픽 금메달 도전사

    특별취재단 = 1960년 로마 올림픽부터 올림픽에 출전해 온 한국 체조가 첫 금메달이라는 숙원을 풀기까지 52년이 걸렸다. 한국은 출전권을 얻지 못한 1972년 뮌헨, 1976년 몬트리올 대회와 정치적인 이유로 불참한 1980년 모스크바 대회를 빼곤 모든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에 도전했으나 그때마다 2%가 부족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역대 대회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4개씩 따낸 한국 체조는 안방에서 열린 1988년 서울 대회에서 첫 메달을 구경했다. 도마에 출전한 박종훈이 동메달을 목에 걸면서 메달의 계보가 시작됐다. 1992년에는 도마의 유옥렬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1991년과 1992년 세계선수권대회 도마를 잇달아 제패한 그는 금메달의 염원을 풀어줄 후보로 급부상했으나 깜짝 기술을 선보인 비탈리 셰르보(독립국가연합)에게 밀려 동메달에 머물렀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는 한국 체조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 원년으로, 한국 남자 체조는 이번 런던올림픽까지 6회 연속 단체전 출전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1996년 애틀랜타 대회도 두고두고 아쉬운 대회로 꼽힌다. ’여 1’과 ‘여 2’ 기술을 앞세워 도마에서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여홍철이 착지에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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