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작아진 피라미드, 커진 마스타바/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작아진 피라미드, 커진 마스타바/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고왕국 5왕조 시대(기원전 2494~ 345년)를 거치면서 피라미드의 규모는 현저하게 작아졌다. 반면 귀족들의 마스타바 무덤은 규모가 점차 커졌을 뿐만 아니라 무덤 내부의 장식도 더 화려해졌다. 권력 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프타솁세스의 무덤은 이 시기 귀족 무덤의 대표적인 예다. 그는 5왕조 파라오 니우세르라(재위 기원전 2445~2321년) 시대의 인물인데, 파라오의 사위로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최고 지위까지 올랐다. 그의 무덤은 니우세르라의 피라미드 인근에 만들어졌다. 모시던 왕의 무덤 바로 옆에 무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특권이었다. 실제로 파라오가 직접 무덤의 위치를 정해 줬을 가능성도 있다. 프타솁세스의 마스타바는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각각 50m, 40m가 넘고 높이도 7m에 이른다. 이 무덤은 고왕국 시대의 개인묘 가운데 가장 큰 축에 속하는 것이다. 니우세르라의 피라미드가 밑변의 길이는 약 80m, 높이는 50m가 조금 넘었던 것을 감안하면 피라미드와 마스타바의 크기 차이는 이전 시대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그의 무덤은 내부의 구조도 무척 복잡한데, 규모와 복잡함을 염두에 둔다면 건설에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투탕카멘 무덤 발굴 100주년/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투탕카멘 무덤 발굴 100주년/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2년 11월 4일.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한 무덤의 입구를 발견했다. 이날 카터는 일기장에 ‘무덤의 첫 번째 계단들이 발견됐다’(First steps of tomb found)라고 무덤덤하게 썼다. 문장 자체는 무덤덤했지만 그가 글씨를 쓴 방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일기장의 줄에 맞춰서 글씨를 쓰지 않고 대각선 방향으로 썼다. 오랜 노력 끝에 얻은 결실에 카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발견한 무덤은 바로 투탕카멘의 무덤이었다. 카터는 투탕카멘 무덤을 찾기 위해 이미 5년 넘게 ‘왕들의 계곡’에서 조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고 결국 후원자였던 카나본 백작은 1922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지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그렇게 ‘최후의 순간’에 극적으로 발견됐다. 투탕카멘 무덤 발굴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투탕카멘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유일한 왕묘는 아니다. 1939년 피에르 몽테가 타니스에서 발굴한 21, 22왕조 시대의 왕묘들도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됐다. 그러나 이 무덤들의 보존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의 입을 열게 한 사나이/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의 입을 열게 한 사나이/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세라피움 발굴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집트 학자이자 당시 이집트 고문물관리국장을 지내고 있던 오귀스트 마리에트(1821~1881)의 후임으로 내정된 가스통 마스페로(1846~1916)가 이집트에 도착한 것은 1880년의 일이었다. 젊고 열정적이었던 마스페로는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사카라 남쪽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스페로는 곧 굉장한 유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이미 사라져 버린 상태였지만, 과거에는 커다란 상부 구조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건축물의 지하 구조였다. 이 지하에 있는 방들의 벽면에 문자들이 아주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스페로는 이곳을 피라미드의 지하 구조라 생각하고 크게 흥분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선임자이자 존경하는 선배였던 마리에트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러나 마리에트는 자신이 30년 동안 이집트에서 발굴을 했지만, 그런 사례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시큰둥해하며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까지 보였다. 마리에트의 말대로 당시까지 피라미드 내부에는 어떤 문자 기록도 남겨지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렇지만 마스페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계속 발굴 작업을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 텍스트’의 등장/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 텍스트’의 등장/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피라미드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3, 4, 5왕조 시대에 지어진 피라미드들 내부에는 벽화는 물론이고 간단한 문자 기록도 남겨져 있지 않다.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귀족 무덤들 내부가 화려한 부조로 장식된 것과 분명하게 대비된다. 이렇게 파라오들이 자신의 무덤 내부를 장식하지 않은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통해 다른 계층 사람들과의 구별 짓기를 시도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5왕조 시대 말엽이 되면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피라미드 내부에 드디어 문자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5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우나스(재위 기원전 2375~2345년) 시대의 일이다. 이때부터 피라미드 내부에 남겨지기 시작한 문자 기록을 ‘피라미드 텍스트’라고 부른다. 이 문헌은 파라오의 업적을 기록한 일종의 역사 기록 같은 것은 아니고, 파라오가 사후 세계에서 부활하는 과정을 돕기 위해 쓰여진 일종의 기도문이라 할 수 있다. 파라오를 비롯해 왕비 등 소수의 왕족들에 의해서만 독점적으로 사용되던 이 기도문은 훗날 중왕국 시대에는 그 형식이 조금 바뀌어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던 목관에도 쓰이게 된다. 이집트 학자들은 이 관에 쓰인 중왕국 시대의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가 왜소해진 까닭/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가 왜소해진 까닭/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솁세스카프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우세르카프는 자신의 무덤을 다시 피라미드로 짓기 시작했다. 사후라의 시대부터는 파라오의 이름에도 다시 태양신의 이름 ‘라’가 포함됐다. 태양 신앙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했던 솁세스카프의 노력은 이렇게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 솁세스카프 이후에 지어진 피라미드들은 이전 시대의 피라미드들보다 규모가 눈에 띄게 작아진다. 기자에 지어진 4왕조 시대의 피라미드들은 그 높이가 각각 146미터, 143미터, 65미터에 이르는 데 반해 5왕조 시대의 피라미드들은 겨우 50미터가량의 높이로 지어졌다. 이 피라미드들은 공학적 완성도도 상당히 떨어져 여전히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기자의 피라미드들과는 달리 돌무지 형태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피라미드의 규모가 작아지고 완성도도 급격히 쇠락한 이유로는 먼저 경제적인 불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5·6왕조 시대에는 나일강의 범람이 예전보다 작은 규모로 일어나게 돼 이집트 전체의 농업 생산력이 줄어들었다. 이것은 결국 고왕국이 몰락하는 배경이 됐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피라미드의 쇠락을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경제적 상황 변화와 더불어 이집트의 주요한 의사 결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가 버려졌던 순간/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가 버려졌던 순간/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멘카우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솁세스카프라는 이름의 파라오였다. 그런데 이 인물은 갑작스럽게 선대로부터 이어지던 관습을 포기하고 마스타바 형식으로 자신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렇게 피라미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 직후에 버려졌다. 마스타바는 직사각형 형태의 상부 구조를 갖고 있는 무덤을 뜻한다. 이 형식은 피라미드가 왕묘로 사용되기 이전, 즉 초기 왕조 시대 동안에만 왕묘로 사용됐다. 피라미드가 왕묘로 사용되기 시작한 고왕국시대에 이르러선 귀족들의 무덤만이 이 형식으로 지어졌다. 솁세스카프의 이러한 일탈적 선택에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이집트의 대표적인 신앙 체계가 되는 태양신앙은 4왕조 시대 동안에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키워 갔다. 태양신앙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은 태양 신관단의 권력이 점차적으로 커져 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파라오 입장에서는 이들 태양 신관단의 비대해진 권력이 부담이 됐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피라미드는 태양과 연관이 매우 깊은 상징물이다. 그런 만큼 피라미드를 파라오가 거부하는 것은 태양 신관단을 견제하는 데에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솁세스카프는 분명히 태양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대피라미드와 피라미드군/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대피라미드와 피라미드군/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스네페루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쿠푸(재위 기원전 2589~2566년)라는 이름의 파라오였다. 쿠푸는 그의 아버지가 지은 피라미드들보다 더 크고, 더 가파른 피라미드를 짓기 시작했다. 그의 도전은 결국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그의 피라미드는 높이 146m, 밑변의 길이가 무려 230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로 완성됐다. 쿠푸의 건축가들은 ‘쿠푸의 지평선’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피라미드를 통해 스네페루의 시대 때부터 목표가 된 ‘50도대의 피라미드 외부 경사각’도 달성했다. 이 50도대의 피라미드 경사각은 피라미드 건축에서 일종의 표준이 되는데, 이 표준은 피라미드의 규모가 작아지고 공학적 완성도도 떨어지게 되는 5왕조 시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지된다. 대피라미드를 포함한 일군의 피라미드들이 기자에 건설되던 4왕조 시대는 피라미드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대피라미드야 말할 것도 없고, 대피라미드 이후에 지어진 기자의 피라미드들도 규모와 공학적 완성도 측면에서 그 이전과 이후에 세워진 모든 피라미드들을 간단하게 압도한다. 쿠푸 직후의 왕위에 오른 제데프라(재위 기원전 2566~2558년)의 경우에는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아부라와시에 피라미드를 지었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최초의 온전한 피라미드/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최초의 온전한 피라미드/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굴절 피라미드에서의 시행착오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작업을 이어 간 파라오의 건축가들은 결국 애초부터 목표로 했던 온전한 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를 완성했다. 대신 이 피라미드의 외부 경사각은 굴절 피라미드 상부와 같이 약 43도로 만들었다. 스네페루는 이 피라미드를 보고 분명히 만족했을 것이고, 실제로도 이곳에 매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피라미드는 오늘날 ‘붉은 피라미드’라고 불린다. 외부를 감싸고 있던 외장석이 다 떨어져 나가고 내부 석재가 노출돼 피라미드가 붉은 색깔로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다. 질 좋은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던 외장석은 현재의 붉은 피라미드에서는 볼 수 없지만, 굴절 피라미드 하단부와 기자에 있는 카프라 피라미드 상단부에서는 오늘날에도 확인할 수 있다. 붉은 피라미드의 내부에서는 흥미로운 변화가 하나 나타난다. 그건 바로 현실, 즉 실제로 파라오의 시신이 매장됐던 공간의 방향이다. 피라미드는 거의 항상 북면에 입구가 만들어지고 그 입구에서부터 남쪽으로 나 있는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현실에 이를 수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도달하게 되는 현실 역시 남북 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것은 붕괴 피라미드와 굴절 피라미드에서 공통적으로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다슈르의 굴절 피라미드/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다슈르의 굴절 피라미드/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스네페루가 메이둠에서 선왕의 피라미드를 이어서 짓는 것과 함께 다슈르에서 건설하기 시작했던 자신의 피라미드도 처음에는 외부 경사각이 메이둠 피라미드와 같이 50도대 초반으로 맞춰져 있었다. 이 피라미드가 절반 정도 완성됐을 때 메이둠에서 피라미드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건축가들은 지나치게 가파른 피라미드의 경사각 때문에 붕괴가 일어났다고 진단했고, 그 진단을 토대로 다슈르 피라미드의 설계가 변경됐다. 약 54도의 경사각으로 지어지고 있던 피라미드 상단부의 경사각이 43도로 낮춰진 것이다. 이렇게 하면 피라미드 상부에 걸리는 하중을 줄일 수 있는 만큼 이것이 피라미드의 붕괴 가능성을 낮추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건축가들은 판단했던 것 같다. 실제로 오늘날 이 피라미드 내부에서는 균열 흔적을 다수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런 균열들도 건축가들이 피라미드의 설계를 변경하게 하는 배경이 됐을 것이다. 결국 다슈르 피라미드는 외부 경사각이 한 번 꺾인 독특한 모습으로 완성되게 됐다. 이중의 경사각을 갖고 있는 이 피라미드는 오늘날에는 ‘굴절 피라미드’라고 불린다. 유례가 없는 아주 특별한 형태로 만들어졌지만, 굴절 피라미드도 높이가 105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실패의 경험’ 메이둠 피라미드/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실패의 경험’ 메이둠 피라미드/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조세르가 최초의 피라미드를 계단식으로 만든 이후 두어 세대 동안은 계속해서 계단식 피라미드가 왕묘의 형식으로 사용됐다. 세켐케트, 카바 등의 피라미드는 보존 상태가 썩 좋지는 않지만, 계단식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완전한 사각뿔 형태의 피라미드가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인 3왕조 말기~4왕조 초기의 일이다. 처음으로 일반형 피라미드로 지어지기 시작한 것은 오늘날 ‘붕괴 피라미드’라고 이름이 붙여진 피라미드다. 메이둠에 있는 이 피라미드가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외벽은 무너져 내리고 중앙부만 남아 현재는 3층 석탑 같은 모습으로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붕괴 피라미드는 3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인 후니(재위 기원전 2637~2613년)의 무덤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니는 피라미드가 완공되기 이전에 사망했고, 그의 후계자이자 사위였던 스네페루(재위 기원전 2613~2589년)가 장인의 무덤을 이어받아 지었다. 피라미드의 내부와 부속 시설이 어느 정도 완성돼 있는 것을 볼 때 붕괴는 완공 직전이나 직후에 일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피라미드는 애초에는 계단식 피라미드로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건설되는 도중에 일반형 피라미드로 설계가 변경됐다.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누비아의 이집트 정복 교훈/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누비아의 이집트 정복 교훈/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누비아라는 지역은 이집트 문명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집트와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공간이었다. 선사시대 동안 누비아는 이집트 지역과 문화적으로 경쟁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집트에서 고대국가가 탄생한 이후로는 계속 착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 사회에서는 필수품으로 쓰였다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이국적 물품들이 아프리카 내륙으로부터 이집트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 누비아였던 까닭도 있고, 이 지역에서는 무엇보다 이집트 문명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금이 다량으로 생산되기 때문이었다. 파라오들은 고왕국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누비아에 대한 군사적 원정을 시작했다. 더 나아가 이집트인들이 거주하는 요새를 이곳에 짓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부헨 유적이다. 고왕국이 붕괴된 이후 누비아 지역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은 감소했지만, 다시 이집트가 통일돼 중왕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이 영향력은 회복됐다. 중왕국의 파라오들은 더 본격적으로 누비아를 착취하기 위해 제2급류 남쪽으로 요새들을 짓기도 했다. 이 요새들은 연쇄적으로 이어지며 누비아를 착취하는 물리적 기반이 됐다. 센우스레트 3세는 이 요새들 가운데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셈나에 비석을 세워 이곳이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나일강의 죽음’과 아스완/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나일강의 죽음’과 아스완/한국 이집트학 연구소장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950㎞ 떨어진 곳에는 아스완이라는 도시가 있다. 이곳이 고대 이집트의 남쪽 경계였다. 이 이남은 누비아라는 지역이다. 누비아는 이집트와는 문화적으로 분명하게 구별되는 공간이었고, 누비아인들의 겉모습도 이집트인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황금의 주요한 산지인 데다 이집트에서 위신재로 소비되던 상아나 흑단, 동물 가죽 등이 아프리카 내륙으로부터 이곳을 통해 이집트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누비아를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그 결과 아스완에는 교역을 위한 시장이 형성되게 됐고, 이런 지역적 특수성은 지명에도 잘 남아 있다. 아스완이라는 지명은 고대 이집트어인 스웨네트(swenett)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이 스웨네트라는 단어의 뜻이 ‘무역’이다. 물론 이집트인들에게 누비아인들은 침입을 막아야 할 이민족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스완은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도 여겨졌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요새 유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스완에는 1899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호텔이 하나 있다. 바로 올드 캐터랙트 호텔(Old Cataract Hotel)이다. 서구의 부유층들을 위해 세워진 이 호텔에는 지난 100여년 동안 수많은 유명 인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어느 이집트학자의 행운/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어느 이집트학자의 행운/이집트 고고학자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유명한 사카라의 북부에는 세라피움이라는 이름의 유적이 있다. 이곳은 아피스신의 화신으로 여겨지던 성스러운 황소들의 집단 무덤이다. 이 황소들은 인근 멤피스에 있었던 프타 대신전에서 신으로 숭배됐는데, 이 신성한 소들에 대한 숭배는 오늘날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처럼 한 마리의 소를 특정해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하다가 그 소가 죽으면 다른 소를 선택해 다시 신으로 섬기는 방식으로 1000년 이상 이어졌다. 이곳에서 발견된 다량의 비문에는 소들이 사망한 시기가 왕의 재위 연도와 함께 쓰여 있기 때문에 이집트 역사의 편년 체계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됐다. 세라피움의 발견 과정에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학자가 한 명 등장한다. 바로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다. 마리에트는 1821년 프랑스의 불로뉴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주 불로뉴박물관을 찾았다. 이집트 미라에 매료됐고 그것이 이집트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놀랍게도 독학으로 고대 이집트어와 콥트어를 공부했다. 고대 이집트어는 1822년에 샹폴리옹에 의해 해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가 청소년이 됐을 무렵에는 이 고대어를 공부할 수 있는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자동차와 투탕카멘 무덤의 발견/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자동차와 투탕카멘 무덤의 발견/이집트 고고학자

    얼마 전 ‘자동차가 인류 문명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여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꽤 재미있는 ‘이집트학적인 이야깃거리’가 떠올랐다. 바로 투탕카멘 무덤이 자동차가 탄생했기 때문에 발견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때마침 11월은 투탕카멘 무덤 발굴이 이루어진 달이기도 하고, 특히 올해는 그 발견이 이루어진 지 99주년이 되는 해인 만큼 이번 칼럼에서는 그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한다. 발굴을 비롯해 고고학자들의 학술 활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후원자가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대학이나 정부, 학술기금, 연구재단 같은 곳들이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00년 정도 전까지는 주로 고문물에 관심이 많은 대부호나 유럽의 귀족들이 후원자 역할을 맡았다. 투탕카멘 무덤을 발굴한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에게도 든든한 후원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 후원자는 영국의 귀족이었던 조지 에드워드 허버트, 즉 5대 카나번 백작이었다. 카나번은 상당히 부유한 귀족이었다. 영국 I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다운턴 애비’(Downton Abbey)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근사한 성이 바로 카나번 백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의 역사, 막 시작되다/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피라미드의 역사, 막 시작되다/이집트 고고학자

    초기 왕조 시대의 내적 분열을 통합한 카세켐위에 이어서 왕위에 오른 것은 조세르(재위 BC 2667~2548년)라는 이름의 파라오였다. 이 조세르의 시대부터 이집트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로 이때부터를 이전 시대와 구분해 ‘고왕국 시대’라고 부른다. 다만 카세켐위에서 조세르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 과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심지어 카세켐위의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조세르가 아니라 다른 파라오였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을 정도로 이 시대의 연대기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조세르를 고왕국의 첫 파라오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널리 쓰이고 있는 조세르라는 이름은 후대의 기록에서만 발견될 뿐이고 조세르 당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이 파라오의 실제 이름은 ‘신성한 몸’이라는 뜻을 가진 ‘네체르케트’였고, 조세르가 남긴 여러 기념물들에는 모두 다 이 이름이 쓰여져 있다. 오늘날에 더 널리 쓰이는 조세르라는 이름이 ‘고결한 자’라는 뜻인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네체르케트를 부르던 일종의 별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세르는 다양한 업적을 남긴 파라오였다. 그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국론 통합한 파라오 카세켐위/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국론 통합한 파라오 카세켐위/이집트 고고학자

    파라오들의 이름은 항상 특별한 틀 안에 쓰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틀의 모양만 기억하면 비록 글자를 읽어 내려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파라오의 이름임을 간단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실제로 1822년 최초로 이집트 문자 해독에 성공한 샹폴리옹도 특별한 틀 안에 쓰인 단어가 파라오의 이름임을 가정하는 것에서부터 성공적인 해독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파라오의 이름을 담는 틀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 더 널리 알려진 것은 ‘카르투슈’라고 불리는 틀이다. 밧줄로 만들어진 타원형 모양의 이 틀은 고왕국 3왕조시대 말부터 등장하는데, 이후로도 계속해서 쓰여 고대 이집트 문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사용됐다. 카르투슈보다 먼저 사용되기 시작한 또 다른 틀이 있다. 바로 ‘세레크’라고 불리는 사각형 모양의 틀이다. 세레크는 카르투슈보다 앞서 초기 왕조 시대부터 사용됐다. 이후 카르투슈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호루스의 이름’이라고 불리는 파라오 제3의 이름을 쓰는 용도로 사용됐다. 사각형 모양의 세레크는 가운데 부분에 파라오의 이름이 쓰여지고, 그 아래쪽에 주로 세로로 홈을 낸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다. 이 부분은 ‘왕궁 정면 문양’이라고 불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투탕카멘과 할머니의 머리카락/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투탕카멘과 할머니의 머리카락/이집트 고고학자

    투탕카멘의 무덤은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발견했다. 무덤은 도굴이 되지 않았고, 이집트에서 도굴되지 않은 왕묘가 발견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에 이 발굴은 즉각적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발굴은 여전히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2022년은 바로 이 고고학적 성과가 이루어진 지 정확하게 100년이 되는 해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는 벌써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지난 6월 22일부터 서울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투탕카멘 무덤 발굴 100주년 기념 전시회’가 시작됐다. 전시는 내년 4월까지 계속된다. 투탕카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현재 모두 다 이집트가 소장하고 있다. 이 유물들은 해외 반출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는 상태다. 특히 황금 마스크나 황금관 등 주요한 유물들은 이집트의 법률로 일시적인 해외 반출조차도 완전하게 금지하고 있다. 이집트의 문화재 가운데 상당수가 과거 제국주의 시대 때 해외로 반출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집트인들이 투탕카멘 유물에 대해 엄격하게 구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고고학 유물이 먼 거리를 이동하면 아무래도 손상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만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파라오, 최초로 동쪽을 치다/이집트 고고학자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파라오, 최초로 동쪽을 치다/이집트 고고학자

    지난 회에서 소개한 ‘최초의 여성 파라오’ 메르네이트의 왕위는 그의 아들 덴에게 큰 문제 없이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그 계승이 메르네이트 사후에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덴이 성년이 돼 이루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파라오 덴과 관련 있는 유물들 가운데는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파라오 덴의 상아 라벨’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유물이다. 현재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에서 소장 중인 하마의 상아로 만들어진 가로, 세로가 각각 5.4센티미터, 4.5센티미터인 이 라벨은 기원전 3000년 즈음에 만들어졌다. 덴의 상아 라벨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이집트학자 에밀 아멜리누가 아비도스에 있는 덴의 무덤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물의 구체적인 출토 맥락은 기록되지 않았다. ‘보물 찾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19세기 당시 고고학 발굴의 한계였다. 상아 라벨에는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의 머리 끄덩이를 잡고 곤봉 같은 것으로 내려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때리는 인물은 파라오이고, 맞는 인물은 ‘파라오의 적’이다. 파라오가 누군가의 머리채를 잡고 내려치는 이런 스타일의 장면은 너무나 전형적인 것이어서 이집트 문명기 내내 그러니까 거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최초 여성 파라오 메르네이트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최초 여성 파라오 메르네이트

    고대 이집트의 역사 속에는 적잖은 여성 파라오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해 신왕국의 기틀을 닦은 하트셉수트, 중왕국 12왕조 시대의 소베크네페루, 고왕국 6왕조 시대의 니토크리스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이집트 문명이 탄생한 직후인 초기 왕조 1왕조 시대(기원전 3000년경)에도 이미 여성 파라오는 있었다. 바로 ‘네이트 여신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메르네이트(Merneith)였다. 메르네이트의 역사적 실체는 아비도스의 움엘카브 유적에서 고고학적으로 분명하게 확인된다. 움엘카브 유적은 초기 왕조 시대의 왕묘군인데, 이곳에 있는 무덤 가운데 ‘Y무덤’이라고 이름 붙여진 무덤이 메르네이트의 무덤이다. 40개가 넘는 부속 무덤과 함께 만들어진 메르네이트의 거대한 무덤은 인근에 세워진 다른 남성 파라오들의 무덤과 규모에서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가장 큰 축에 속한다. 다만 무덤 내부에서 발견된 다양한 기록물과 석비에 쓰여진 그의 이름은 당시 왕명을 쓰는 데 사용되던 ‘세레크’와 함께 쓰여지지는 않았다. 이것은 여성이 파라오직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저항이 낳은 결과로 추정된다. 실제
  •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3400년 전 이집트의 도시와 주거지

    [곽민수의 고대 이집트 기행] 3400년 전 이집트의 도시와 주거지

    지난 8일 이집트에서 새로운 발굴 소식이 왔다. 이집트 발굴팀이 룩소르 서안에서 신왕국 18왕조 아멘호테프 3세 시대(기원전 1390~135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도시 유적을 발견했다는 소식이었다. 발굴단을 이끌던 자히 하와스 박사는 몇 달 전부터 룩소르에서 놀라운 발굴이 이뤄지고 있고, 그에 대한 공식 발표가 곧 있을 것이라고 뜸을 들여 왔다. 그의 예고대로 새롭게 알려진 유적 발굴 소식은 굉장한 것이었다. 다만 하와스가 발굴 성과에 대해 설명하며 “많은 외국팀이 이 도시를 찾으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 주장은 다소 과장된 것이다. 이번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유구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파형(波形)으로 만들어진 벽체다. 그런데 그것과 거의 똑같은 형태의 벽체가 이번 발굴 현장에서 150m가량 떨어진 장소에서 이미 1930년대에 프랑스 팀에 의해 확인됐다. 이 두 지점은 동일한 층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만큼 같은 취락에 속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이번 이집트 팀의 발굴은 완전히 새로운 성과라기보다는 1930년대 조사를 토대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와스의 말은 일종의 ‘선전용 멘트’였던 셈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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