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현의 이방사회
  • [박철현의 이방사회] 30년 전의 일간지가 그립다

    [박철현의 이방사회] 30년 전의 일간지가 그립다

    두 개의 일간지를 구독하고 있다. 집에서는 종이로 된 ‘아사히신문’, 인터넷으론 ‘니혼게이자이신문’을 받아 본다. 아사히신문은 정기구독한 지 벌써 만 5년이 지났다. 직접적 계기는 이 신문사에 다니는 지인이 부탁해 왔기 때문이지만, 원래부터 리버럴 성향이 강한 편집 방침과 기풍을 좋아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나보다 더 즐겨 본다. 소학생신문까지 세트로 구독한 이유도 있지만, 주말판이나 문화면에 한국 관련 뉴스가 매우 많이 등장한다. 아이들은 한국영화, 케이팝 아이돌, 한국어 서적 관련 뉴스는 물론 최근에는 복잡한 한일간의 정세까지 읽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사고의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즉 백지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그들이 혐오의 감정을 때때로 내뱉는 산케이신문을 보느냐, 아니면 사회적 약자 편에 서고 차별과 혐오를 배격하는 아사히신문을 읽느냐를 놓고 보자면 아무래도 후자에 손이 간다. 하얀 종이에 뭐든 마구잡이로 입력된다면 산케이의 편협보다 아사히의 사해동포주의가 훨씬 낫다.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간 큰딸은 얼마 전 구입한 휴대폰을 사용해 때때로 정치적 사안에 관한 질문을 해 오기도 한다. 나도 일본 정치를 잘 모르긴 하지만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문답
  • [박철현의 이방사회] 차별과 혐오 조장하는 한국 언론

    [박철현의 이방사회] 차별과 혐오 조장하는 한국 언론

    요즘 한국 뉴스를 거의 안 본다. 바쁜 것도 있지만 그냥 낚이기 싫어서다. 자극적인 제목에 끌려 클릭했다가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경험 한두 번이 아니다. 가만 보면 이젠 ‘속보’ 및 ‘단독’은 헤드라인에 자동으로 붙는 것 같다. 매번 ‘이번엔 안 속아야지’ 하면서도 유혹을 참지 못하고 클릭해 버린다. 아니, 단독이라니까 궁금하잖아. 이 낚임의 횟수를 정량적으로 따져 보면 아마 수백 번은 될 것 같다. 어려서 익힌 속독법이 위력을 발휘해 글을 매우 빨리 읽는 편이지만 그래도 기사 하나 읽는데 3~4분은 족히 걸린다. 삼백 번 낚였다고 가정하면 약 1000분, 즉 16.6시간이다. 이젠 나도 빼도 박도 못 하는 중년이다. 중년의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 줄 아는가. 그 귀중한 16.6시간을 넷플릭스의 인간 다큐멘터리 아무거나에 투자했다면, 최소한 타인의 삶이라도 엿볼 수 있었을 거다. 물론 괜찮은 기사를 보기도 한다. 그럴 땐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려 한다. 현장 기자의 기사를 받아 보니 너무 좋은 내용이라 보다 많이 알리고 싶어 헤드라인을 자극적으로 달았구나라고. 하지만 그런 기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제목도 내용도 부실한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다. 처음 몇
  • [박철현의 이방사회] 밀접접촉자의 ‘코로나 블루’

    [박철현의 이방사회] 밀접접촉자의 ‘코로나 블루’

    “네? 진짜예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1월 10일부터 사흘간 매일 거래처 아는 사람과 식사를 했다. 그런데 15일 오전 그분한테서 연락이 왔다. 14일 오한과 발열 증세가 나타나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는데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자네도 걸렸을 가능성이 크다며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말한다. 일본에서는 코로나에 걸리면 이상하게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문화가 있다.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 문화에 더해 아베 정권 시기의 ‘자기책임’ 이데올로기가 정착되는 바람에 일단 코로나에 걸리면 뭔가 죄인이 된 분위기다. 괜히 그런 마음 갖지 마시고 몸조리 잘하라고 전하긴 했지만 걱정이 몰려 오는 건 사실이다. 10일부터 만난 사람들 리스트를 뽑아 보는데 한도 끝도 없다. 하필이면 신년 벽두부터 일거리가 쏟아져 들어와 클라이언트만 열 명 넘게 만난 것 같다. 매일 출근하는 현장 일꾼들에, 아내와 네 아이까지 다 밀접접촉자가 된다. 긴급사태 선언이 떨어지고 정부의 시책에 따라 단체회식 등은 하지 않았지만 일은 해야 하니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다. 얼추 잡아도 수십 명은 된다. 양성 확진을 받은 것도 아니고 밀접접촉자일 뿐인데 어디까지 연락해야 하나
  • [박철현의 이방사회] “이제 시험 공부 안 해도 돼?”

    [박철현의 이방사회] “이제 시험 공부 안 해도 돼?”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던 지지난주 아내가 메시지를 보내 왔다. ‘미우 핸드폰 확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우는 큰딸이고 올해 중학교 3학년이다. 아직 핸드폰이 없다. 편차치가 꽤 높은 지역의 모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핸드폰을 사 주기로 했다. 아,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기가 우리한테 그러겠다고 했으니까. 원래 고등학교 들어가면 핸드폰 해 주려고 했는데, 그런 조건을 내거는 바람에 골치 아파졌다. 그 명문 고등학교는 공립이라 시험을 봐서 들어가야 하는데, 모의고사를 치면 간신히 턱걸이 수준이거나 몇 점 모자라는 결과가 나와서 그렇다. 합격 예상률도 딱 절반인 50%이다. 그래서 내기 중간에 굳이 그 학교가 아니라도 비슷한 편차치의 학교에 들어가도 핸드폰을 사 주기로 했다. 그 며칠 후 아내의 메시지가 온 것이다. 이해가 안 됐다. 일본에는 수시라는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추천입학이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1월에 결정된다. 하지만 아내는 핸드폰 확정이라고 보내 왔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아내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 오빠는 모르겠구나. 일본에선 들어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다 따로 원서를 낸 후에 시험을 쳐. 그런데 그
  • [박철현의 이방사회] 일하다 죽는다는 모순

    [박철현의 이방사회] 일하다 죽는다는 모순

    사람이 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먹고살기 위해서다. 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거나 꿈을 실현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 ‘먹고사는 것’이 해결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택배노동자들의 죽음은 아이러니하다. 어떻게든 먹고살려고 일을 해 왔는데 과로사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택배업 산업재해 현황’을 살펴보면 올해 상반기에만 9명이 산재로 사망했고 그중 7명은 뇌심혈관계 질환, 즉 과로사였다. 2012년부터 작년까지 보통 1년에 2.25명꼴이었던 택배업 종사자들의 죽음이 올해 들어 상반기에만 9명에 달했다는 말이다. 누가 봐도 이상하지만 그들의 노동환경은 나아지지 않았고, 그들의 죽음은 사회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10월 들어 한진택배 소속으로 일하다가 고인이 된 박모씨의 메시지 캡처 화면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알려지고, 이를 계기로 택배 상하차 일을 해 봤다는 사람들이 현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했다. 대중의 비난이 거세지자 대형 택배회사들은 비로소 이런저런 조치를 꺼내 들었다. 오해해선 안 된다. 이들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한 게 아니다. 이미 택배노동자들은 올해에만 여러 명이 죽었다. 정말 큰일이라 생각했었다면
  • [박철현의 이방사회] 도처에, ‘사랑의 불시착’이다

    [박철현의 이방사회] 도처에, ‘사랑의 불시착’이다

    “태권도 도장 다나카 선생이 현빈을 닮은 것 같아. 나는 모르겠지만 일본 여자들이 좋아하는 타입인 건 확실해. 근데 북한 사람들 정말 저렇게 살아? 윤세리는 항상 당당해서 너무 부럽고. 아참 정말 한국 화장품을 북한 장마당이라는 곳에서 살 수 있는 거 맞아? 다 떠나서 말이 통한다는 게 넘 신기하다.” 얼마 전 ‘사랑의 불시착’을 다 본 아내의 문자메시지가 지난 며칠간 줄곧 이런 것들이었다. 2002년 한류 붐이 불기 전에 한국 남자인 나와 결혼하고 2003년엔 ‘겨울연가’가 대히트를 쳤지만 끝끝내 한국 드라마는 보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국 드라마를 다 볼 수밖에 없던 이유는 중학교, 초등학교의 학부모 모임(PTA) 때문이다.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중학교, 셋째와 넷째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그는 두 군데 학부모 모임을 나가야 한다. 게다가 중학교 모임에서는 집행부(부회장)까지 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내가 모임을 주도해야 한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학교가 쉬는 바람에 PTA도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학교 수업이 재개되고 PTA도 활발해지면서 아내는 다른 엄마들로부터 적극적인 질문 공세를 받
  • [박철현의 이방사회] 여유 없을 때 진면목 드러난다

    [박철현의 이방사회] 여유 없을 때 진면목 드러난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던 고도 성장기 및 버블 시기의 일본은 온갖 여유로움이 넘쳐흘렀다. 동남아시아 및 아프리카에 대한 순수한 경제원조(ODA) 규모는 세계적으로 톱 수준이었고, 문화 및 기초과학 분야에 들어가는 투자 및 지원도 어마어마했다. 버블은 1992년에 붕괴했지만, 진정기까지 생각한다면 1990년대 중후반까지 J팝과 재패니메이션은 황금기를 구가했다. 2000년 이후 일본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를 보면 거의 이 시기의 연구다. 그전까지 당연시됐던 재일 조선인, 부락민, 아이누족 차별 등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여론도 이때 나왔다. 직접적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 없지만, 경제적 여유가 이러한 움직임에 조금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20여년 만에 일본은 180도 다른 사회가 됐다.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려던 아베노믹스는 2019년 소비세 인상의 직격탄을 맞았다. 각종 스캔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아베 정권은 올해 들어 코로나19로 무능함을 증명하는 중이다.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이 전혀 없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크루즈선을 2월에 경험하면서 의료 인프라를 확충하겠다고 했지만, 최근 코로나
  • [박철현의 이방사회] 이방인이 살아남는 법

    [박철현의 이방사회] 이방인이 살아남는 법

    예기치 못한 코로나19 사태로 지난 몇 달간 밀렸던 공사대금을 얼마 전에 전부 받았다. 두 곳으로부터 1000만엔과 400만엔, 한국 돈으로 1억 5000만원에 달하는 거금이지만, 회수작업에 내가 한 일은 거의 없다. 일을 소개해 준 중개인에게 전화 두어 번 돌린 것이 전부다. 읍소전화를 받은 중개인이 그들과 직접 만나 입금을 재촉했다. 중개인은 중국동포이다. 옌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2002년 일본에 건너와, 누구나 그랬겠지만 온갖 고생을 겪고 지금은 도쿄 아사쿠사에서 제법 유명한 부동산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아사쿠사는 원래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곳이었다. 이 유래는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황거를 비롯한 에도막부의 중심부를 야마노테(山の手), 신분이 낮은 서민들이 거주했던 주변부를 시타마치(下町)라고 불렀다. 우에노는 외지인의 야마노테 출입 여부를 검사하는 관문이고 오카치마치는 황거나 에도막부를 지키는 하급무사들의 거주지였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도쿄 중심부를 감싸듯 운행하는 JR동일본의 순환선 노선 이름은 야마노테선이며 우에노 역은 센다이, 모리오카 등 도호쿠 지역과 니가타로 대표되는 조에쓰 지역 거주민들이 신간센을 타고
  • [박철현의 이방사회] 좀 적당히 해라

    [박철현의 이방사회] 좀 적당히 해라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일본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 4월 8일 발령된 긴급사태선언이 39개 부현에서는 해제됐지만 도쿄, 홋카이도 등 8개 지역은 여전히 외출자숙, 휴업, 휴교 등의 비상조치가 내려진 상태다. 한편 오사카는 독자적인 긴급사태 해제를 결정했다. 경제적으로 견딜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온다. 가장 먼저 위태로워지는 계층은 역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긴급사태 이후의 정부통계 실업률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노무라 소켄 등은 올해 평균실업률은 6%, 잠정실업률은 11%를 기록할 것이라 예상한다. 이 실업 태풍의 초기 피해자들이 바로 외노자다. 정사원과 달리 확실한 고용 보장을 받지 못하는 아르바이트 및 계약직들은 경영자의 간단한 한마디로 해고된다. 해고수당은 물론 실업급여를 못 받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직접 만나 본 서비스업 위주의 경영자들은 공통적으로 사업 규모를 줄였다고 한다. 대량해고가 포함된다. 네팔, 인도, 베트남, 몽골, 타이 등에서 온 외노자가 우선 잘린다. 얼어붙은 구인시장 때문에 해고자들은 다른 곳에 취직할 수 없다. 한두 달은 어떻게든 버티겠지만 상황이 장기화되면 귀국할 수밖에
  • [박철현의 이방사회] 코로나19, 총체적 난국의 일본

    [박철현의 이방사회] 코로나19, 총체적 난국의 일본

    고급 일본어 중 ‘부의 스파이럴’(負のスパイラル)이라는 단어가 있다. 보통 이 단어 다음에는 ‘빠졌다’라는 동사가 붙는다. 인과관계로 촘촘히 엮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현상이 더 나쁘게 만드는, 일종의 악순환을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쓴다. 지금 일본이 그렇다. 코로나19를 둘러싼 정치권 및 의료계 대응을 보면 총체적 난국이다. 도쿄올림픽·패럴림픽 연기를 결정했으니까 이젠 코로나 방역대책에 적극 나설 것이라 예상했다. 아베 신조 총리도 3월 말까지 하루 8000건의 유전자 증폭(PCR) 검사가 가능하게끔 하겠다고 공언했다. 국민적 코미디언이었던 시무라 겐이 코로나19에 감염돼 사망한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일본 국민들도 코로나19에 대한 위기의식이 한층 높아졌다. 하지만 검사 실시 횟수 데이터를 보면 그 이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하루 1300여건이던 PCR 검사는 3월 24일 올림픽 연기가 확정된 이후 평균 2000여건으로 늘어났지만 아베 총리가 말했던 ‘8000건’에는 턱도 없다. 이에 대해 가토 후생노동상은 실실 웃어 가며 “정치공세 좀 펴지 마라. 하루 8000건의 검사능력이 있는 것과 실제로 2000여건 검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니
  • [박철현의 이방사회] 이게 다 아베 총리 탓이다

    [박철현의 이방사회] 이게 다 아베 총리 탓이다

    요즘 “일본 왜 그래”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그들의 궁금증은, 당연히 코로나19 대처 방식을 둘러싼 일본 정부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방역 시스템을 갖췄다는 일본이 왜 갑자기 이렇게 됐을까. 예방의학의 최선진국이며 잇단 자연재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체계화된 빈틈없는 매뉴얼, 섬나라의 특성을 살린 원천적 차단, 청결한 위생의식이 자랑이었던 나라다. 그런데 국립감염증연구소는 지난 13일이 돼서야 비로소 민간 제약 기업 및 연구소에 감염자의 항체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지적, 특히 뉴욕타임스의 “절대 따라해서는 안 되는 교과서적 모범을 보여 주고 있는 일본”이라는 기사가 나오자 아베 신조 총리는 긴급회의를 열어 하루 300명분의 진단을 1100명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일본 언론들도 지역사회 감염, 즉 3, 4차 감염이 가시화되자 지난 15일부터 이전과는 다른 심층적인 보도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확진환자 수가 증가하자 드완고, GMO 등 IT 대기업들이 발빠르게 재택근무를 실시했고 18일부터는 소프트뱅크, 히타치 등도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최초 확진환자 발표로부터 한 달이나 지난 시점이었고, 설상가상 일본 후생노동성
  • [박철현의 이방사회] 2020 ‘평등하고 안전한 노동’을

    [박철현의 이방사회] 2020 ‘평등하고 안전한 노동’을

    물리적으론 별다를 바 없는 하루가 지나가는 것인데,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느낌은 확실히 다르다. 마음을 가다듬고, 아무튼 초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딱 좋은 날인 것처럼 느껴진다. 심리적 태도의 변화는 물리적인 풍경을 바꾸어 놓는다. 분명히 평소와 다름없는 길거리인데 갑자기 상하의 트레이닝복을 맞춰 입고 선글라스 쓴 사람들이 숨 가쁘게 뛰고 있고, 집 우편함에는 듣도 보도 못한 헬스클럽의 전단지나 금연클리닉 안내문이 배달돼 있다. 시무식에선 우렁찬 목소리의 개인 계획이 나열된다. 1년 전과 똑같다. 다이어트, 연애, 금연, 금주 발표가 이어진다. 내년에도 아마 똑같은 발표를 할 것이다. 알면서도 일단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신년의 ‘키워드’는 언제나 올바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올해 키워드는 ‘평등하고 안전한 노동’이 되면 어떨까 한다.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민생경제에 역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그 안에는 예년보다 줄어든 산재 발생 건수도 있었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이렇게 가다간 올해도 특히 해외에서 온 이들이 차별받고 사고당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작년 12월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재류자격 약점을
  • [박철현의 이방사회] “사람이 먼저다”

    [박철현의 이방사회] “사람이 먼저다”

    서울신문 칼럼인데 경향신문 이야기를 하게 생겼다. 도의상 해서는 안 되는 짓이지만 그만큼 충격적인 지면 구성이었고, 내용도 저널리즘의 진수를 보여 줬다. 다른 매체가 지소미아나 야당 대표의 단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 경향신문 11월 21일자는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라는 시리즈를 선보였다. 압권은 1면 편집이다. 2018년 1월 1일부터 2019년 9월 말까지 고용노동부에 보고된(어디까지나 보고된!) 중대 재해 사망노동자 1200명의 이름과 나이, 사망 원인을 나열했다. 물론 이름은 동그라미로 표시돼 특정할 수 없도록 했다. 그들은 대부분 건설 및 설비 관련 노동자였다. 사망 원인은 추락사, 끼임 등 흔히 말하는 공사현장에서 벌어지는 사고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 건설현장의 적폐를 말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물량하도급, 재하청, 각종 상납 및 접대, 공무원과의 결탁 등등. 이런 것들 때문에 현장 노동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기본적인 안전시설이 생략된다. 거기에서 비용을 절약해 이윤을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몇십 년 전이라면 모르겠다. 문제는 선진국 말석에 자리잡은 2019년의 대한민국이 아직도 이렇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공사현장의 일을 하
  • [박철현의 이방사회] 내가 알던 일본이 아니다

    [박철현의 이방사회] 내가 알던 일본이 아니다

    지난 11일부터 15일까지 한국을 다녀왔다. 카드 신용사회가 뭔지 실감했고, 한강을 사이에 둔 서울 서초동 강남좌파와 광화문 강북우파의 시간차 집회도 각각 경험했다. 한강 시민공원의 야시장은 불금이라 그런가 보다 했지만,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일요일 밤임에도 대단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다들 월요일 출근 안 하나’라는 오지랖 넓은 걱정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혹자는 서울만 그런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지난 8월 두 차례에 걸쳐 마산, 통영, 울산을 다녀왔다.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도쿄에 사는 내가 느끼기에 서울은 도쿄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다이내믹하고. 지방 소도시들도 한국 쪽이 더 활기찬 느낌이다. 이 느낌은 아마 사람들한테서 오는 것일 테다. 8월 한국에는 마침 일본의 수출 규제 발표, 즉 화이트리스트 국가 제외 건 때문에 어딜 가도 한일 관계 전문가가 수두룩했다. 10월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인선을 둘러싼 정국 때문인지 정치, 검찰, 언론 전문가만 수백명을 만난 것 같다. 어떤 한 텀이 끝나면 수많은 전문가가 탄생한다. 물론 그들의 말에는 틀린 부분도 있겠지만 그래도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 [박철현의 이방사회] 입시제도 자꾸 바꾸지 말아야

    [박철현의 이방사회] 입시제도 자꾸 바꾸지 말아야

    큰딸은 지금 도쿄의 공립중학교 2년생이다. 부모들이 벌벌 떤다는 중2라고 해서 겁을 먹었는데 실제 그 시기를 지내 보니 별 게 없다. 그는 소프트볼부 주장과 학교 학생회장을 하고 있다. 일본 중학교의 학생회장은 중2 가을부터 중3 여름까지 한다. 그 이후엔 고입 수험공부에 매진한다. 서클 활동도 하계대회가 끝나면 중3들은 은퇴한다. 역시 입시 때문이다. 몇 개월 전 아이가 책을 한 권 사왔다. 2019년 고교수험안내다. 혼자 식탁에 앉아 골똘히 책장을 넘기더니 “아빠, 난 고가네이기타고등학교 갈까 봐”라고 말한다. “그래? 좋은 학교니?”라고 물어보니 “응. 서쪽 지역에서는 위에서 다섯 번째. 편차치는 64로 나와”라고 답한다. 그러자 주방에 있던 아내가 “야, 니가 무슨 고가네이기타냐? 공부를 안 하는데. 이대로 가다간 내가 나온 고다이라고등학교 정도밖에 못 가”라고 일침을 놓는다. 편차치를 보니 고다이라는 53, 즉 중위권이다.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먼저 모든 고등학교가 공립, 사립 가리지 않고 서열이 나뉘어져 있고 그것을 당연한 듯이 공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뿐만 아니라 인터넷 웹사이트 ‘민나노 고교정보’에 가면 전국 1만여개 고교 서열이 매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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