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현의 이방사회] 여유 없을 때 진면목 드러난다

[박철현의 이방사회] 여유 없을 때 진면목 드러난다

입력 2020-08-10 17:38
수정 2020-08-11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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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던 고도 성장기 및 버블 시기의 일본은 온갖 여유로움이 넘쳐흘렀다. 동남아시아 및 아프리카에 대한 순수한 경제원조(ODA) 규모는 세계적으로 톱 수준이었고, 문화 및 기초과학 분야에 들어가는 투자 및 지원도 어마어마했다. 버블은 1992년에 붕괴했지만, 진정기까지 생각한다면 1990년대 중후반까지 J팝과 재패니메이션은 황금기를 구가했다. 2000년 이후 일본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를 보면 거의 이 시기의 연구다. 그전까지 당연시됐던 재일 조선인, 부락민, 아이누족 차별 등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여론도 이때 나왔다. 직접적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 없지만, 경제적 여유가 이러한 움직임에 조금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불과 20여년 만에 일본은 180도 다른 사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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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현 일본 테츠야공무점 대표
박철현 일본 테츠야공무점 대표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려던 아베노믹스는 2019년 소비세 인상의 직격탄을 맞았다. 각종 스캔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아베 정권은 올해 들어 코로나19로 무능함을 증명하는 중이다.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비전이 전혀 없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크루즈선을 2월에 경험하면서 의료 인프라를 확충하겠다고 했지만, 최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지인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무엇이 달라졌다는 건지 모르겠다.

A씨는 7월 21일 39도의 고열을 겪었고 25일부터 미각을 잃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 문의했지만 검사 대상자가 아니고, 굳이 검사를 하고 싶으면 2만 4000엔 자비 부담으로 가능하다는 답을 들었다. 증상이 그렇게 심하지 않아 자가격리를 하고 있었는데, 같은 달 27일 고토구의 한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양성 확진자인데 인터뷰를 하다 보니 당신 이름이 나왔다며 이것저것 물어보더란다. 17일 두어 시간 동안 밥을 같이 먹었고, 앞서 언급한 증상을 설명하자 병원 측은 “당신은 농후접촉자이며 확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럼 어떡해야 하냐고 물어보자 보건소에서 연락이 갈 거라고 하길래 기다렸고, 그날 오후 보건소에서 연락와서 똑같은 질의응답을 거친 후 미나토구 보건소에서 연락이 갈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다시 “당신들은 누구냐”고 묻자 “우리는 고토구 보건소”라는 답을 들었다. 그는 잘 이해가 안 됐지만 일단 전화를 끊었는데, 미나토구 보건소에서 연락이 안 왔다고 한다. 만 하루가 지나도 연락이 없어 직접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고토구에 확인한 후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고, 한 시간 후 미나토구 보건소는 “29일에 어디어디 클리닉 가서 검사를 받으라”고 알려 줬다. 29일 PCR 검사를 받고 30일 확진 판정을 받았다.

확진자가 됐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그렇게 증상이 심한 것은 아니니 그냥 바깥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2주 정도 있고 증상이 악화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버이쓰 배달음식은 비싸기 때문에 하루에 두어 번 집 근처 편의점으로 도시락을 사기 위해 외출한다고 한다. 의심으로부터 열흘, 감염으로부터 2주일 만에 확진자 판정을 받은 셈이다. 또 다른 확진자의 이야기를 들어 봐도 비슷한 패턴이다. 즉 2월이나 8월이나 검사 시스템에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들이 반드시 하는 부탁이 있다. 절대 익명으로 해 달라는 것이다. 한국 신문의 칼럼이니 괜찮지 않냐고 하면 요즘엔 다 일본어로 번역된다면서 자기 신분이 밝혀지면 큰일난다는 것이다. 순간 이와테현의 첫 감염자가 떠올랐다. 신분이 노출되는 바람에 일하는 회사에 클레임 전화가 수십 수백통이 걸려오는 등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도 아닐 텐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당사자, 혹은 해당 지역을 차별한다.

코로나뿐만이 아니다. 일본 정부의 최근 모습을 보면 ‘여유’가 너무 없다. “적 기지 미사일 타격 능력을 갖추겠다는데 주변국을 왜 고려해야 하나”라는 고노 다로 방위상의 신경질적인 발언이 찬사를 받는다. 참고로 고노 방위상의 아버지는 버블이 붕괴되는 그 험난한 시기에 자신의 명의로 위안부 담화를 발표한 고노 요헤이다. 많은 것을 바라진 않는다. 아버지 세대의 품격이라도 배웠으면 한다.
2020-08-1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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