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 [문화마당]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송정림 드라마 작가

    [문화마당] 삶의 가장 빛나는 순간/송정림 드라마 작가

    해마다 사람들로 넘쳐나던 벚꽃길에 차단막이 세워졌다. 출입금지. 사람들은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며, 마스크로 꽃향기도 출입금지시키고는 종종걸음으로 꽃나무 밑을 걸어간다. 함께 만나 얘기 나누고 산책하고 꽃 보고 여행하고 일하고…. 이 모든 일상의 시간에 ‘잠시 멈춤’ 팻말이 붙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멈추고 나서야 깨닫는다.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소소한 행복들이 일상의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는 것을.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는 그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는 자유와 행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물고기는 자신이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 땅에 올라오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때가 행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다. 행복한 순간엔 행복한 줄을 몰랐다가 행복이 지나고 나서야 안다. 행복은 그렇게 언제나 떠나가면서 제 모습을 보여 준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그리 거창한 시간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소설이 있다. 남편이 저세상으로 떠난 후에 그가 남긴 여덟 개의 모자를 보며 추억을 서술하고 있는, 박완서 선생의 자전적 소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 그 소
  • [문화마당] 2020 문학, 혁신을 요구받다/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문화마당] 2020 문학, 혁신을 요구받다/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계간 ‘자음과모음’ 봄호 특집 ‘작가-노동’이 화제다. “원고료로 생활이 가능한 ‘전업 평론가’는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문학평론가 장은정이 구체적 숫자로 답했기 때문이다. 2009~2019년 11년 동안 그가 발표한 글은 176편, 원고 매수로 5728매다. 대가는 총 3390만원, 한 달 평균 46만원이다. 이른바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에 속해 상당히 많은 발표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이 정도다. ‘전업 평론가’는 불가능하다.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은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창비 등 주요 문학 출판사의 내부 독회에 바탕을 둔 차세대 평론가 운영 체제를 말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들 출판사는 내부 편집위원, 편집자, 외부 평론가 등과 정기 독회를 갖췄다. 여기서 문예지 발표작, 단행본 시집과 소설집, 장편소설을 토론하고 작품성·대중성·가능성 등을 고려해 잡지에 청탁하거나 단행본 계약을 한다. 이때 참여하는 외부 평론가는 등단 5년 이내 ‘젊은 평론가’들이다. 이유는 두 가지. 우선, 한 사람이 모두 좇아서 읽지 못할 정도로 작품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이들이 분담해 읽고 일정한 논의 구조를 거쳐 좋은 작가를 가
  • [문화마당] 이야기의 이야기/이양헌 미술평론가

    [문화마당] 이야기의 이야기/이양헌 미술평론가

    오래된 이야기로부터 출발해 보자. 첫 번째는 한 여인이 왕에게 들려주는 1000개의 일화에 관한 것이다. 공동체가 축적해 온 원형적인 적층 문학이자 ‘천일야화’로도 잘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서사’(narrative)에 관한 흥미로운 질문을 불러들인다. 16번째 밤이 되었을 때 셰에라자드는 현자 두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뛰어난 의사로 한센병을 앓고 있는 왕을 치료해 주고 그에게 총애를 받지만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되려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는 처형 직전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책을 왕에게 선물한다. 두반의 목이 잘리고 왕은 허겁지겁 책을 펼친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페이지들뿐이다. 왕은 돌연 쓰러져 죽음을 맞이한다. 두 번째는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어느 수도원의 이야기로, 특정한 책을 읽은 젊은 사제들은 모두 죽음에 이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번째 시학으로 알려진 이 책은 많은 이들이 찾아 헤맸으나 아무도 읽어 본 적 없는 그의 희극론이 쓰여 있다고 전해진다. 텅 비어 있거나 존재하지 않는 책은 어째서 죽음과 관계되는가. 두 이야기는 일종의 상동적 관계를 맺고 있다. 표면적인 차
  • [문화마당] 경찰서의 겨울나그네/이진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피아니스트

    [문화마당] 경찰서의 겨울나그네/이진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피아니스트

    오스트리아 빈에 살 때 경찰서에서 고발장과 함께 출두요구서를 우편으로 받은 적이 있었다. 외국인청과 함께 경찰서는 유학생들을 가장 떨게 하는 무서운 존재였다. 현지체류 신청 등을 하기 위해 한번은 거칠 수밖에 없는 기관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네 동사무소와 파출소 가듯이 드나들면 되는 곳인데,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죄지은 사람처럼 바싹 긴장하고 들어가게 된다. 성을 A부터 Z까지 나열하고, 서너 개 방에 나누어 배정한다. 한국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성인 김씨와 이씨는 K와 L로, 바로 앞뒤에 놓인 글자이니 같은 방에 배정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에 그 방에 불친절하고 깐깐한 담당자가 자리잡게 되면 그가 은퇴하던지 부서를 바꾸지 않는 한 그 도시에 사는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고생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출두요구서의 내용은 이랬다. ‘음악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위층에 사는 이웃이 고발을 했고, 반대 의견을 들어 봐야 하니 출두를 해라.’ 그 당시 나는 집에서 연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성악을 전공하는 룸메이트와 살고 있었는데, 그 노랫소리를 윗집 사람은 “소음공해”로 고발했던 것이었다. 유학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룸메이트의 통역을 도와주기 위해 경찰서에 함
  • [문화마당] 굳건히 건재하십시오/김이설 소설가

    [문화마당] 굳건히 건재하십시오/김이설 소설가

    개학이 미뤄진 두 아이와 보내는 하루 일과란 단순하기 그지없다. 새 학기를 시작도 못했으니 새 학년 공부를 할 수도 없고, 학원도 휴원을 했으니 숙제마저도 없는 상태. 집에 틀어박혀 그저 세 번의 식사와 쌓아 둔 책 읽기와 미뤄 두었던 영화 보기가 하루의 전부가 되고 있다. 아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실 책이나 영화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요즘이다. 코앞에 닥친 두어 개의 마감 원고도 지지부진하기 이를 데 없다. 온종일 텔레비전 뉴스를 보거나 핸드폰으로 쉴 새 없이 새 소식을 받아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찬다. 바야흐로 흉흉한 요즘이다. 확진환자와 사망자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뉴스는 종일 코로나19에 대해 이야기하고,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의 개학이 3주나 연기됐다. 생필품이 된 마스크 때문에 온 나라가 앓는 중이고(사재기를 한 사람들은 천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아침마다 재난 문자 알림이 울려댄다. 경제는 위축되고 있으며 개인의 일상은 걱정과 불편으로 가득하다. 이 와중에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진영 싸움만 벌이고 있으니, 국민들의 짜증을 돋운다.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나라가 사이비 종교 때문에 휘청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한 편의 부조리극
  • [문화마당] 이 시간을 건너는 법/송정림 드라마작가

    [문화마당] 이 시간을 건너는 법/송정림 드라마작가

    친구들이 하나둘 칩거에 들어갔다. 재택근무에 들어가게 돼서, 가게 문을 닫아야 해서, 아이 입학식이 연기돼서, 모임이 취소돼서…. 어쩔 수 없는 이유들로 ‘집콕’하게 된 친구들은 온라인상에서 위로와 정보를 나눴다. 그러다 어느 친구가 물어왔다. “연애소설이나 실컷 읽게 몇 권 추천해 줄래?” 루이스 세풀베다의 장편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는 연애소설만 찾아 읽는 노인이 나온다. 발전만을 좇는 인간행위에 환멸을 느낄수록 그는 연애소설을 읽고 싶어 한다. 그에게 연애소설은, 무거운 현실을 견디는 처방약이었다. 친구가 원하는 연애소설 조건도 그 노인과 같았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했으면 좋겠어.” 고전 중에서 몇 권 골랐다. 시간의 세례를 받아도 사랑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고전을 읽지 않으면 인생에 고전하게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선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강력 추천했다. 차갑게 얼어붙은 심장으로 냉소 지으며 칼바도스를 즐겨 마시는 남자, 라비크. 사랑만 알고 그 밖의 것은 하나도 모르는 여자, 조앙 마두. 그들의 사랑이 어두운 시대 캄캄한 거리에 안개처럼 피어나는 소설이다. 언제든 체포돼 추방될
  • [문화마당] ‘22년 하락 후 반등’ 日출판계의 시사점/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문화마당] ‘22년 하락 후 반등’ 日출판계의 시사점/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최근 일본 출판계에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해마다 일본 출판 관련 통계를 조사해 발표하는 출판과학연구소에 따르면 2019년 일본 출판산업 매출액이 전자책과 종이책을 합쳐서 1조 5432억엔(추정)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0.2% 증가한 것이다. 숫자만 보면 제자리걸음을 한 듯하지만, 지금 일본 출판계는 “바닥을 찍었다”면서 흥분에 싸여 있다. 일본 출판은 1996년 2조 6564억엔을 기록해 매출 정점에 이른 이래 2018년 1조 5400억엔에 이르기까지 무려 22년 동안 연속해서 후퇴와 축소를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세부를 살펴보면, 종이책 및 잡지의 매출은 여전히 줄어들었다. 전년 대비 종이책 매출은 4.3% 감소한 6723억엔, 잡지 매출도 4.9% 감소한 5637억엔이다. 독자들의 호응을 얻은 것은 디지털 쪽이다. 디지털 출판 매출은 3072억엔으로 전년 대비 23.9% 증가했다. 전자만화가 2593억엔으로 29.5%, 전자책이 349억엔으로 8.7% 늘었다. 다만 전자잡지 쪽은 130억엔으로 16.7% 감소했다. 만화 및 라이트노블을 중심으로 디지털 출판이 궤도에 오르면서 관련 사이트 및 앱을 통한 광고 수익도 증가했다. 문예춘추 등에서 직접 운영
  • [문화마당] ‘동시대’의 미술 읽기/이양헌 미술평론가

    [문화마당] ‘동시대’의 미술 읽기/이양헌 미술평론가

    학술적인 비평과 이론을 소개하는 미술잡지 ‘옥토버’(October)는 2009년 가을호에서 흥미로운 설문을 진행했다. 그랜트 캐스터, 권미원, 제임스 엘킨스 등 저명한 비평가와 큐레이터들이 참여한 이 설문에는 ‘동시대 미술(Contemporary art)이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막연한 질문이 담겨 있었다. 현대미술(Modern art)이나 오늘날의 미술(Today art), 지금 여기의 미술(Nowhere art)이 아니라 왜 ‘동시대 미술’인가. 설문 응답자들은 공통적으로, 대단한 전문가들인데도 질문에 대한 근거와 이유를 명확하게 답하지 못했다. 대신 동시대 미술이 바로 그 모호성으로 인해 역사적 규정이나 개념적 정의, 비평적 기준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핵심적인 가치로서 이미 미술계에 확산됐다고 입을 모았다. 동시대 미술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단순히 동시대(the contemporary)와 미술(art)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동시대’ 또는 ‘현재’(the present)를 다루는 미술이라 정의하는 건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이제 막 관객을 기다리는 최신 작품부터 오늘날 만들어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 [문화마당]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는 건/이진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피아니스트

    [문화마당]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는 건/이진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피아니스트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잉크를 머금은 깃털이 날아오른다. 내가 꿈꾸는 자리에, 흐느끼는 자리에 깃털아 내 대신 눈물을 흘려다오.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깃털이 노래의 날갯짓을 한다. 근심 걱정을 날려보낼 수 있도록 눈물아 말라버리지 말아다오.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건반에 손가락이 그림을 그린다. 열 개의 붓이 모자랄 정도로 노래야 흑백의 오선지에 색깔을 입혀다오.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손가락으로 말을 한다. 단호한 스타카토와 숨결 가득한 레가토로 소리야 확고함과 유연함을 표현해다오.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한데 묶어 함께하도록 친구야 관용의 울타리를 만들어다오.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천지의 진동에게 부탁한다. 그의 귀에 속삭일 수 있도록 바람아 한 움큼만 빌려와다오.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모래위에 내 이름 석 자를 적는다. 물에 잠겨 이내 휩쓸려 가더라도 파도야 자연의 섭리에 나를 데려가다오.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위대한 어머니에게 입맞추고 순결한 아이를 보듬어 줄 수 있도록 그대 사랑의 힘을 나에게 실어주오. 점을 찍고 선을 긋는다. 침을 뱉고 뺨을 때리는 사람을 토닥여 주고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아버지여
  • [문화마당] 이만하면 괜찮아/김이설 소설가

    [문화마당] 이만하면 괜찮아/김이설 소설가

    명절 연휴 동안 짬짬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들여다보면서 곧잘 질투를 느꼈다. 연휴를 맞아 여행을 떠난 이들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멀게는 외국, 가깝게는 국내 여행지에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그들의 사진을 보면서 하다못해 극장이나 카페, 연휴 동안 읽겠다고 쌓아 놓은 책 사진을 보면서도 배가 아팠다. 나에게 절대 주어지지 않을 풍경이기 때문이었다. 언감생심 명절에 책을 읽다니. 집집마다 가풍이라는 것이 있을 터다. 시가는 엄격한 유교주의에 따라 제사와 차례를 지내는 집안이고, 친정은 도시 핵가족의 전형인 집안이다. 결혼 전에는 나 또한 명절 연휴에 여행을 떠나는 일이 잦았다. 전시회를 다니고 친구들을 만나고 내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며칠을 보내도 아무 문제없었다. 책을 쌓아 두고 읽는 일쯤이야. 결혼을 하고 겪었던 첫 명절의 풍경이 아직도 생생하다. 집안의 모든 여자들이 부엌에서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고, 손님이 끊임없이 들이닥치고, 그 와중에 모인 일가친척들의 매 끼니를 따로 챙겨야 했다. 나에게는 힘들고 낯설기만 한 가사 노동의 연속이었는데 시가에서는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결혼한 지 15년쯤 지난 요즘은 그 시절과 많은 풍경이 바뀌었다.
  • [문화마당] 인생이여, 만세/송정림 드라마작가

    [문화마당] 인생이여, 만세/송정림 드라마작가

    아직도 삶에 서툴고 후회를 거듭하는 내가 부끄럽던 날, 그림 한 점을 보았다. 작은 사슴 한 마리가 몇 개의 화살을 맞은 채 피 흘리고 있는 그림이었다. 주로 자화상을 그려 온 프리다 칼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노트에 내 얼굴을 그려 본 적 있다. 나도 모르게 뺨에 눈물을 그리고 있었다. 자화상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게 아니라 마음을 그리는 것이었다. 아니, 마음이 저절로 담기는 것이 자화상임을 그때 알았다. 화살을 맞은 채 피 흘리는 사슴, 그 자화상을 그릴 때의 프리다 칼로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던 걸까.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는,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했지만 총명한 소녀로 자라났다. 열여덟 살 소녀는 집에 오는 버스를 탔다가 큰 사고를 당했다. 옆구리를 뚫고 들어간 강철봉이 척추와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로 빠져나왔고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오른발은 짓이겨졌다. 9개월 동안 전신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칼로는 이 사고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온몸에 깁스를 하고 침대에 누워 두 손만 자유로웠던 칼로가 할 수 있
  • [문화마당] 시민 출판의 시대로/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문화마당] 시민 출판의 시대로/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자기 삶을 스스로 기록하고,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사람과 공유하며, 아카이브해서 후대에 남길 수 있다. 아카이브 방법은 점점 간단해져 블로그 등 디지털 콘텐츠만이 아니라 종이책이나 전자책 같은 형태로 출판하는 것도 이제는 별로 어렵지 않다. 도서관 등에서 이용자들을 상대로 책 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전문 저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이 출판하려 할 때 독자들이 후원 등을 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소셜 펀딩 시스템이 이러한 흐름을 거세게 하는 중이다. 2018년 텀블벅 한 군데에서만 700여권의 신간이 탄생했다. 작년 통계는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꽤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가 쓴 책 콘텐츠를 소비만 하는 출판 객체에 일반 시민들이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가치 있다 생각하는 일상의 어떤 것이든 기록해서 책으로 펴내는 출판 주체가 되는 것을 ‘출판의 민주화’라 한다. 최근 출판계에서는 어르신들의 진솔한 자기 기록이 책으로 나와 화제가 되는 경우가 늘어나는 추세다. ‘출판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또 고령 사회를 맞이해 미래 가치가 높은 ‘시니어 출판’ 영역의 확산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
  • [문화마당] 바벨탑으로부터/이양헌 미술평론가

    [문화마당] 바벨탑으로부터/이양헌 미술평론가

    최근 마틴 제이의 ‘눈의 폄하’(서광사ㆍ2019)가 출간됐다. 시각성에 대한 방대한 이론을 20세기 프랑스 철학을 경유해 종합한 이 책은 오랫동안 많은 전공자와 연구자들이 번역되기를 기다려 온 저작이다. 7명의 번역자가 4년 반에 걸쳐 세미나와 교정을 거쳐 완성했는데, 미국에서 1993년 처음 나왔으니 26년 만에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소개된 셈이다. 현대미술의 역사는 서양미술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 기원은 18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와 함께 등장한 예술의 자율성에 있으며, 그러므로 현대미술은 유라시아의 특정한 지역에서 ‘발명’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수많은 사조가 부흥과 쇠락을 거듭하며 전개된 현대미술은 이제 전 지구적인 문제에 응답하는 비엔날레까지 만들어 내고 있다. 동시에 작품과 함께 발전해 온 비평이나 예술이론 역시 구미(歐美)로부터 생산되고 전파됐다. 우리나라와 같은 비서구권은 번역이라는 복잡한 과정 안에서 이를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미술에 관한 이론들이 수입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 출판된 ‘현대미술비평30선’(중앙M&Bㆍ1987)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한국 미술계의 반응을 잘 보여 준다. 책의 서문에는 “한국에서
  • [문화마당] 더 걷고, 덜 일하고, 더 잘 먹고, 술은 줄이고/이진상 피아니스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문화마당] 더 걷고, 덜 일하고, 더 잘 먹고, 술은 줄이고/이진상 피아니스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2020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다. 전 세계적으로 그를 다시금 기리고 그의 음악이 더 자주 연주될 것이다. 필자는 그의 삶의 터전이었던 독일 본과 오스트리아 빈에서 수년간 살아볼 행운이 있었고 음악가로서 그 점을 언제나 감사히 여기고 있다. 신년을 맞이해 인간 베토벤을 조금 더 가까이 알고자 하면 역시 그의 건강 문제를 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청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Ich bin beynahe immer krank”(나는 거의 항상 아프다)라고 할 정도로 그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었다. 그 귓병증세가 심각해질수록 글로써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밖에 없어 편지와 메모가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 250년 뒤 우리는 그의 당시 건강상의 고통을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청력 이상과 더불어 그에 못지않게 그를 괴롭게 한 또 다른 고질병은 설사, 경련을 동반한 복통 증세였다. 실제로 그는 심각한 복통이 청력이 떨어지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복통 증세는 현대의학용어로 ‘과민성대장증후군’이라 일컫는 병이다. 현대인의 대표적 질병이다. 생명에 직접적으로 지장이 없는데, 삶의 질을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 [문화마당] 크리스마스 다음날/김이설 소설가

    [문화마당] 크리스마스 다음날/김이설 소설가

    ‘마감이 눈앞에 닥쳐 있을 때 내 아파트는 언제나 최고로 깨끗하고, 내 파일은 가장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고, 냉장고는 썩어가는 음식 없이 말끔히 치워져 있다. 반드시 해야 할 무언가가 있을 때, 나는 바로 그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용감무쌍하게 해내겠다고 결심한다.’ 마치 내 일처럼 묘사하고 있는 이 문장은 앤드루 산텔라의 ‘미루기의 천재들’에 수록된 부분이다. 책은 ‘지금 해야 하는 일보다 더 나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편다. 연말이 되면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연초에 세웠던 올해 계획을 적은 페이지를 들춰 보며 한숨을 쉬는 때도 이맘때이지 싶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의 한두 가지는 이뤘을 수 있다. 소액적금 만기, 치과 진료 받기나 밀가루 음식 줄이기 같은 것들. 그러나 올해도 못 해낸 일들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운동하기, 금주·금연, 책 100권 읽기라든지 부모님에게 연락 자주 하기, 야식 먹지 않기 같은 항목들. 그리고 매년 그랬듯이 새해 계획에 올해 못 지킨 항목이 다시 포함될 것이다. 올해 계획 중에는 경장편 두 편 쓰기와 건강검진이 있었다. 경장편, 단편, 중편을 한 편씩 썼으니 그리 나쁜
  • [문화마당] 사랑의 조건/송정림 드라마 작가

    [문화마당] 사랑의 조건/송정림 드라마 작가

    배우 연운경 선생님 초대로 연극을 보기 위해 서울 대학로로 향했다. 혜화역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는데 뺨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첫눈이었다. 첫눈의 응원을 받으며 친구들을 만나, 제목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봤다.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깊은 사유를 던져 준 연극이었다. 연극의 제목인 “그대를 사랑합니다”, 이 말처럼 행복한 고백이 또 있을까. 사랑은, 마음에 품고만 있으면 상대의 마음에 가서 닿지 못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바람 부는 세상에서 털옷처럼 따뜻하고, 피곤한 몸을 감싸는 하얀 홑이불처럼 부드럽다. 강풀이 지은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연극의 주인공들은 젊지 않다. 네 명 모두 노인이다. 성격 까칠하고 입담 거친 우유 배달부 김만석 할아버지는 새벽 배달 길에 파지 줍는 할머니 송씨와 마주친다.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동네 사람 모두를 깨우며 우유 배달을 다니는 괴팍한 김만석 할아버지와 이름도 없이 칠십 평생을 ‘송씨’로 불리며 살아온 송이뿐 할머니. 그들은 서로 걱정하고 생각하는 사이가 된다. 김만석 할아버지는 골목길 모퉁이 어디쯤에서 불쑥 나타나 송씨 할머니에게 우유 한 통을 건네곤 한다. 그리고 비탈길을 내려가는
  • [문화마당] 책이 말한다, 이 부정의한 세상에/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문화마당] 책이 말한다, 이 부정의한 세상에/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2019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또한 달리는 말에서 갈라진 벽의 틈새를 보듯, 2010년대도 훌쩍 지나갔다. 2009년 아이폰 출시와 함께 ‘스티브 잡스’가 열어젖힌 ‘제4차 산업혁명’의 봇물에 휩쓸려 그사이 삶의 전 영역이 ‘좋아요’와 ‘하트’ 놀이에 중독됐다. ‘생각을 빼앗긴 세계’에서 우리는 어느새 정보와 상호작용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됐다. 머리 한쪽이 늘 멍한 산만함에서 우리 정신을 지켜 주는 것은 역시 호흡 긴 서사인 책밖에 없다. 지난 10년 동안 책의 대지에 핀 꽃들은 자주 불(不)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먼저, ‘정의란 무엇인가’가 사유의 어둠 속에 찬란한 빛을 던졌다. 만연한 부정의에 경악한 독자들은 ‘분노하라’는 시대의 명령을 따랐다. 무엇에 분노했는가. 불공정이다.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라며 학자금 대출과 알바 인생에 절망하는데, 장학금 챙겨 가며 공부한 전직 법무부 장관의 딸이 보여 준 세상, 즉 특권을 통해 쌓은 스펙을 제 능력인 양 자부하는 ‘20 vs 80의 사회’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불평등이다. 부의 세습이 노골화돼 부익부빈익빈이 갈수록 심화되고, 성실한 노동을 통한 계층 상승의 사다리가 끊어진 ‘2
  • [문화마당] 오늘의 이미지, 이미지의 오늘/이양헌 미술평론가

    [문화마당] 오늘의 이미지, 이미지의 오늘/이양헌 미술평론가

    2014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찍힌 한 장의 사진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인기 있는 토크쇼 진행자이자 해당 시상식의 사회를 맡은 엘런 디제너러스가 찍은 셀카(selfie)가 그것인데, 그 안에는 줄리아 로버츠, 브래들리 쿠퍼, 제니퍼 로런스, 브래드 피트, 앤젤리나 졸리, 채닝 테이텀 등 쟁쟁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 이미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320만번 이상 리트윗됐다.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셸 오바마의 포옹 장면인 ‘4년 더’(Four more years)를 뛰어넘는 기록을 남기면서 온라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이 됐다. 엘런은 이 게시물에 다음과 같은 트윗을 덧붙였다. “If only Bradley’s arm was longer. Best photo ever.” 해석하면 ‘브래들리의 팔만 조금 더 길었더라면. 완전 역대급 사진’이랄까. 오늘날 가장 가치 있는 이미지란 무엇일까.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모나리자나 위대한 인상주의 회화, 혹은 앤디 워홀이나 김환기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인가. 이들을 떠올렸다면, 당신은 아직 이미지에 관해서는 전통적인 개념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
  • [문화마당] 박수의 맛/이진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피아니스트

    [문화마당] 박수의 맛/이진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피아니스트

    교향곡의 1악장이 열광적으로 끝난다. 박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지휘자는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며 청중을 향해 돌아서서는 눈을 부릅뜨고 손사래 치며 박수를 거절한다. 겸언쩍은 헛기침을 뒤로하고 이내 잠잠해지면 다음 악장을 시작한다. 느린 악장도 이내 너무 아름다웠는지 누군가의 박수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순간 그 한 사람의 손뼉 소리보다 더 무시무시한 성난 청중의 “쉬잇!” 소리가 공연장 전체를 압도해 버린다. 드디어 대망의 4악장이 끝나는 순간, 두 번의 참혹한 실패에 의한 쪽팔림과 눈치 때문에 일단 끓어오르는 박수는 자제하고 주위를 살펴야 한다. ‘아직 끝난 게 아닐 수도 있어’, 아니면 ‘혹시 5악장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클래식은 역시 어려워’라는 기억을 가진 채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독일 쾰른 필하모니에서 이스라엘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이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을 때가 기억난다. 1악장의 장대한 카덴차를 신들린 듯 연주한 뒤 마지막 음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이걸 어쩌지. 박수 안 치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마치 양손에 자석이 달린 양 끌어당기는 두 손을 안간힘으로 떼어내는 기분
  • [문화마당] 부모님의 가심비, 가인이어라!/이은선 소설가

    [문화마당] 부모님의 가심비, 가인이어라!/이은선 소설가

    “송가인이 나오냐? 아빠는 오케이!” 가족 대화의 난장이 펼쳐진 채팅방, 아빠의 답변에 나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안 갈겨, 절대!”를 반복하던 엄마의 톡이 “그럼 한 장만 끊어!”로 바뀌었고, 콘서트 표를 예매하려던 사위는 매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내친김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표가 생각보다 안 비싸다”, “VIP는 이미 매진이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대동강에 한이 흐르고, 영동에는 부르스를 추는 사람이 넘쳐났다는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곡이라고도 했다. 안 간다고 할 때와는 전혀 딴판인 말을 들으며 나는 순식간에 엄마 아빠의 옛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단칸방에 살면서 월부로 전축을 들여놓고 음악을 듣던 때의 이야기였다. 엄마는 내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을 때 ‘내 이야기를 쓰면 소설책 열 권은 나온다’며 꼭 시댁 험담과 아빠에 대한 불만, 옆집 누가 바람나서 도망갔고 또 누가 보증 섰다 잘못됐는지 상세하게 전해 주며 결론을 맺었다. 정작 소설가는 난데, 엄마가 내 자랑을 할 적마다 에피소드들을 덧붙여 준 덕에 나는 나도 모르는 내 어린 시절도 갖게 됐다. 아빠는 딸이 작가가 된 기념으로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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