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도서관의 청춘들에게/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도서관의 청춘들에게/작가

    전 지구를 뒤흔들던 코로나가 이제 잠잠해질까 하는 안도감을 가장 크게 체감했던 곳이 바로 도서관 식당이다. 지난 2년 넘는 동안 꽁꽁 문을 닫았던 식당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 여느 때처럼 백반을 주문하고는 점심을 먹고 있는데, 청년 네 명이 우르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그들을 향해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열리는 나의 시각과 청각! 한창 취업 준비를 하는 청년들인가 보다. 식당에서 일부러 쾌활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그들을 감싸는 기운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당장 내년, 나의 신분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삶, 예측 불가의 불안함은 ‘공포’와 맞먹는다. 그들을 바라보며 대뜸 떠오르는 말은 겨우 이것. ‘그래도 다 지나가게 돼 있다.’ 얼마 전 싸이월드가 다시 열리고, 나도 십몇 년 전의 앨범을 되찾았다. 옛날 사진들을 보면서 그때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몰랐다고들 한다. 한창 아이 키우고, 매일 쪽잠 자며 부대끼던 나날들. 물론 그때가 소중한 시간이긴 한데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나이를 먹은 아기가 식탁에 앉아 혼자서도 밥 잘 먹는 지금이 좋다. 저 청년들은 언젠가 기어이 밥벌이를 해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 식당에서 점심을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지금, 이 순간/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지금, 이 순간/작가

    지난 3월 초 만두 에세이 ‘아무 걱정 없이, 오늘도 만두’가 나온지라 책에 수록된 전국 만둣집 35군데를 천천히 돌면서 책을 선물해 드리고 있다. 내 발로 직접 가서, 소위 말하는 ‘내돈내산’(내 돈 주고 내가 산) 하면서 먹어 보고 느끼면서 한 편 한 편 쓴 글이기 때문에 어느 곳 하나 정이 안 가는 곳이 없었지만, 유독 마음이 쓰이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그 집에 가면 늘 주방 맞은편 방에 한 할머니께서 단정하게 앉아 계셨는데, 할머니의 시어머님이 북에서 내려오셔서 동네 사람들에게 만둣국을 끓여 대접한 것을 시작으로 할머니가 받아서 운영하시고, 지금은 손녀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만둣국을 먹은 후 출간까지 1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책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할머니는 여전히 건강하실지…. 따끈따끈한 신간을 들고 곧장 달려갔다. 잠깐 점심 장사만 하는 곳인데, 아주 조용하고 아늑하다. 혼자 와서 먹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 개운한 만둣국 맛은 어떻고! 혼자 조용히 맛을 음미하고 있는데, 어머님 세 분이 들어오신다. 워낙 조용한 가게인지라 세 친구분 나누는 대화가 저절로 들어와 꽂힌다. 이야기 소리가 들리자마자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경건한 세차 의식의 비밀/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경건한 세차 의식의 비밀/작가

    코로나 확진자 추이의 상승 기세가 예사롭지 않더니, 이제는 주변 사람 중 반 정도는 앓아누웠다가 일어나는 것 같다. 나도 결국 그 대열에 합류해 한동안 고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나의 시청각 레이더망!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에 살다 보면 유난히 자주 마주치는 사람군이 있다. 그중 한 명. 은퇴하고 집에 온종일 계시는 게 거의 분명한, 한 할아버지다. 그분의 일과 중 내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 들자면 식후 연초. 시간대가 딱 그러하다. 식사 후에 바람도 쐴 겸 1층으로 내려와 담배를 태우시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이건 그분의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과로 보인다. 아니, 일과가 아니라 거의 ‘종교의식’과도 같은 것인데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중소형 차가 한 대 있는데, 그걸 그렇게 애지중지 여겨서 보이기만 하면 닦는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황사가 지나가면 그땐 비상이고. 눈이 오면 득달같이 책받침 같은 것을 가지고 나와서 눈이 더 쌓일세라 계속 털어낸다. 식사하고 나오는 시간, 한 손에는 어김없이 생수병을 들고 있다. 담배를 맛있게 다 피우시고는 생수병에 든 물을 자동차 앞 유리에 뿌리고 수건으로 닦는 것이다. 이쯤 되면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그 섬에 가고 싶다/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그 섬에 가고 싶다/작가

    오후 4시, 어김없이 출출해지는 터라 늘 가던 우리 동네 김밥의 천당으로 갔다. 들어가서 보니 옆 테이블에 한 고1이나 고2 정도 돼 보이는 청춘들 네 명이 앉아서 라면과 김밥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있다. 모두 철근이라도 반으로 접어서 씹어 먹을 시절. 여자 친구 한 명도 딴 남학생들에 지지 않고 걱실걱실 아주 잘 먹는다. 아마 처음으로 알바 면접을 본 모양이다.  “나 오늘, 처음으로 빵집 알바 면접 봤는데, 바로 됐어.”  “와, 진짜? 언제부터 나가는데?”  “바로 올 수 있냐고 하는데, 내가 호구냐? 다음주부터 나간다 그랬지.”  이때 여학생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온다. 갑자기 당황하며 엄마 전화라고, 쉬! 다들 조용히 하라고 하는 여학생.  “아아, 복잡하게 됐네. 집으로 들어오래.”  전화를 끊더니 난감해한다.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는 대화. 아무리 봐도 딸 또래의 아이들이었기에 아무 상관없는 이 아줌마에게도 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냈는지 궁금함과 걱정스러움이 교차한다.  “엄마가 처음에는 ×× 뭐라 하더니 그냥 들어오래. 그럼 나 알바 안 해도 되는 건가?”  “빵집에 지금 전화해. 못 나간다고.”  엄마께서 따님을 굉장히 강하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엄마 독립 만세/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엄마 독립 만세/작가

    우리 집 근처도 여느 동네와 같이 ‘김밥의 천당’이 있다. 가격도 6000~7000원 선으로 부담 없고, 메뉴도 골고루 갖춰져 있는지라 거의 매일 그곳에서 끼니를 해결한다. 그저께는 딱 점심시간에 걸려서 가게 됐다. 아주머니는 주문이 열 몇 개나 밀리는 바람에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분주히 움직였다. 홀과 배달 담당인 남편분이 전화를 받아 주문을 넣으면 그 수많은 메뉴를 다 외워서 딱딱 만들어 내놓는데, 놀랍다. 아저씨도 정신없이 주방의 템포에 맞춰 보려고는 하지만, 영 굼뜨고. 아주머니가 “반찬 몇 개 들어갔어?”, “카레엔 국 들어가야지!” 하면서 손 따로 입 따로, 한 번 더 체크해야 옳게 나간다. 이날은 순두부찌개를 주문했다. 할머님 두 분은 청국장 두 개. 어차피 바쁜 사정 다 아니, 천천히 음식을 기다리면서 내 귀에 들어오는 두 분 수다가 알콩달콩 정겹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듯. 어느 사람들이나 둘이 모이기만 하면 여자는 남자 얘기, 남자는 여자 얘기다. “젊어서는 몰랐어. 그런데 늙어 나이 드니까 남편이 강압적으로 말하는 게 싫어.” 한 할머니의 통렬한 고백! 우리나라 연세 드신 남자분들 기본 말투가 특별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투박한 명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결혼을 해야 할 101가지 이유/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결혼을 해야 할 101가지 이유/작가

    백신 3차를 맞고 나서 딱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한 보름 정도는 체력이 떨어진 느낌이었던지라 핑계 김에 몸보신을 하러 나섰다. 동네 설렁탕집. 오전 11시, 아직 이른 시간인지라 손님은 나밖에 없다. 뒤를 이어 들어오는 손님들은 형광 연두색 옷을 입은 환경미화원 두 분. 연신 어이 추워! 하며 자리를 잡는다. 새벽 청소 일을 마치고 온 것 같다. “여기, 탕 둘이요!” 곧 맹렬하게 부글대는 설렁탕 두 개가 나왔고, 두 남자는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다. 나 또한 오랜만에 마주한 도가니가 젓가락에서 미끄러질세라 초집중하며 특유의 젤리 육질을 음미하고 있었다. “뭐? 네가 결혼을 해?” 내 시선에서 등 쪽이 보이게 앉은 아저씨의 놀란 듯한 소리부터 들렸다. “어. 이제 직장도 생겼고.” 환경미화원이 되신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아저씨의 목소리, 무척 희망차다. 사랑에 빠진 사람 특유의 들뜸도 느껴지는 듯하다. “뭐하러 결혼까지 해. 더 자리잡고 안정된 다음에 해도 안 늦은데….” “지금 하나, 나중에 하나….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I can do it. 이미 결혼할 것으로 굳히기를 마친 아저씨의 ‘할 수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미워도 다시 한번/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미워도 다시 한번/작가

    남편과 나는 번갈아 가면서 ‘애 보는 날’을 지정하고 순번이 아닌 날은 각자 밖에서 자유시간을 보내다 귀가한다. 남편이 아이를 담당하는 날, 동네 치킨집에 갔다. 먹다가 남으면 포장해 갈 요량이었다. 이렇게 치킨집에 홀로 섬처럼 앉아 있으면 주변 모든 테이블의 사연들이 신기하게도 내 레이더망에 쏙쏙 걸린다. 오늘은 특히 뒷자리에 있는 아저씨의 사연. 초등학교 6학년 딸 때문에 엄청 속상하신가 보다. 다행히도 앞에서 아저씨의 동네 형님이 맥주 한 잔을 하며 성실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 몇 년 전 아내랑 이혼했던지라 딸은 동네 가까이에 엄마랑 살고 있단다. 그런데 조금 전에 아이가 전화해서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무슨 말을 전한 것 같다. “통화할 때 가슴이 찢어지는 거 같더라니까요.” 나는 한 번도 아버지한테 그런 적이 없는데 요즘 애들은 그게 사람이냐고, 이건 모두 교육이 문제인 거라고 덧붙이면서 더욱 흥분한다. 앞에 앉은 아저씨는 계속 애가 무슨 잘못이냐고, 아이는 무조건 잘못이 없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들어 줘야 한다고 당부하신다. 한 번 화가 난 터라 그건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 맥주도 한 잔 들어갔겠다 감정에 브레이크도 잘 안 잡히니 다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자식보다 하루 더?/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자식보다 하루 더?/작가

    고기를 좋아하는 딸과 함께 오랜만에 고깃집에 왔다. 요즘 위드 코로나 시대로 슬슬 옮겨가는 것인지 주말에 가족 단위로 나들이할 수 있는 음식점은 그래도 예전의 한산한 모습에서 조금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자리 옆에 다섯 식구가 자리를 잡았다. 부모님과 이미 장성한 자녀들 삼 남매. 큰아들, 둘째 딸, 그리고 막내. 오늘은 이 막내 아드님의 서른 번째 생일이란다. 고기를 굽기 전 이미 가족들이 케이크를 꺼내 잽싸게 촛불에 불을 붙여 해피버스 데이~ 노래를 부른 터. 얼마 안 있어, 어머님이 고기에 곁들여 술을 과속으로 드셨는지 목소리가 조금 흐릿해졌다. “우리 ○○이가 벌써 서른 살이네.” 자랑스러운 듯 계속 이 말을 반복한다. 오늘의 주인공 ○○씨는 발달장애인이다. 계속 다리를 떨기도 하고, 이 가족 모임과는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이야기들을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있다. 형과 누나는 다른 사람들 눈에 조금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을 하는 동생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노릇노릇 구워지는 고기에만 집중하는 듯 보였다. “이렇게 다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다. ○○이가 점잖게 이리 앉아 있어 주는 게 어디야.” 이 한마디에 생일잔치에 담긴 다섯 식구의 역사가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엄마가 귀신이어야!/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엄마가 귀신이어야!/작가

    서울 익선동 한옥마을에 갈 기회가 생겼다. 예쁘고 트렌디한 식당보다 조금은 허름한 곳이 편한지라 마을에 있는 조금 오래된 전라도 식당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은 바로 앞자리에 주인아주머니께서 따님처럼 보이는 젊은 여자분과 함께 앉아 계셨다. 따님은 내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계셨는데, 뒷모습만으로도 분위기가 사뭇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님 목청이 워낙 크신지라 들리는 사연은 큰 빚을 졌거나, 사기에 휘말렸거나, 이혼이다. 여장부 같은 어머님은 딸의 속사정을 이미 한발 앞서 짚고 계신 듯했다. 어쩌면 이 자리도 엄마가 딸을 불러내어 마련한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귀신이어야!” 역시, 엄마는 귀신이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이렇게 귀신같이 자식의 사정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엄마가 귀신’ 이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빼곡히 담겨 있는지. 엄마 속상할까 봐 괜찮은 척하지 마라. 네 마음 다 안다. 이미 해결책이 있을지도 모르고, 엄마가 그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 이야기해 봐라. 이렇게 가슴앓이하면서 어떻게 엄마한테 얘기할 생각을 안 했냐. 나는, 네 엄마다. 특히 이것은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에 나오는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쿨한 신구의 조화/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쿨한 신구의 조화/작가

    요즘 코로나19로 거리두기 4단계가 팍팍하게 시행 중이다 보니 옆자리 두런거리는 소리를 들을 기회가 확 줄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연어회를 좋아하는 딸내미를 위해 동네 음식점에 들러서 콧바람을 쐬어 주기로 했다. 들어가 보니 역시 가게에서 먹는 사람은 우리를 포함해 단 두 테이블뿐이다. 멀찌감치 떨어진 저 옆에는 조그마한 할머니와 이십 대로 보이는 긴 머리의 웃음이 많은 손녀가 앉아 있다. 할머니를 모시고 음식점에 온 것이니, 당연히 손녀가 월급을 탔던지 무슨 좋은 일이 생겨 대접하러 왔으려니 싶었다. “할머니, 나 새우튀김 먹고 싶어.” 이런 멋있는 광경 같으니라고. 나의 고루한 예상을 깨고 손녀는 할머니가 한턱 내시는 이벤트를 한껏 즐기고 있었다. 모둠회를 한 접시 다 먹고, 새우튀김을 사이좋게 나누어 먹고 나서도 먹성 좋은 손녀님은 또 “메뉴판 좀 주세요!”를 외친다. 할머니도 그게 그리도 기분 좋으신지 소주잔을 들고 홀짝이면서 계속 먹고 싶은 것 더 시키라 하신다. 윗대는 모셔야 하고, 아랫대에서는 모심을 못 받는, 소위 ‘샌드위치 세대’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우리 아버지에게서도 듣고, 나의 선배들에게서도 들었다. 물론 약간의 한탄과 자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도마 위 물고기의 변/작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도마 위 물고기의 변/작가

    약속이 있어 한 음식점에 갔다. 아직 날이 훤한데도 테이블이 꽉 차고, 사람들 얼굴에는 이미 달들이 떴다. 그중 한 청년이 아버지 같지는 않은 중년의 남성과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다소 긴장된 분위기, 그리고 필요 이상의 공손함. 궁금증을 자아낸다. 오랜만에 발동되는 나의 식스 센스, 오만 가지 시청각 융복합 감각! “그럼, 복학은 내년 3월에 할 건가?” 아하! 저 남성분은 이 가게의 주인장이고, 저 젊은 친구는 지금 면접을 보는 중이다. “한 번 오늘 보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월요일 출근하라고 연락할게.” 그러자, 청년의 뒷모습이 움찔한다. 아무래도 여기서 바로 일하는 줄 알고 왔는데, 한 번 두고 보겠다고 하니까 놀란 모양이다. “그래 봤자 이틀이여. 그거 못 기다려? 오늘 지켜볼 테니까 잘해 봐.” 나는 ‘단 한 번의 기회’로 당락이 결정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지’가 없는, 벼랑 끝에 걸린 사안들이 내게 떨어지면 평소만큼 실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았다. 점수로 당락이 결정되는 입학시험 같은 것들 말이다. 얼마 전에는 평소 꼭 하고 싶었던 일에 이런 비슷한 기회가 왔다. 프로젝트에 정식으로 투입되기 전에 내가 합당한 실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미라클 모닝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미라클 모닝

    동네 미용실은 그야말로 현대판 마을 사랑방이다. 남녀노소 불문, 일단 미용실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주인에게 맡기고 온몸을 가만히 있어야 하는지라, 입술이 여간 움직움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떤 이야기라도 나오기 마련이다. 염색하러 가던 날이었다. 옆자리에 한 청년이 머리를 자르고 있다. “혹시 원형 탈모 있는 것 알았어요?” 미용사 선생님이 물어보신다. 가끔 내게도 원형 탈모가 오면 어떡하나 몇 번 상상해 본 적이 있기에 흘끔 청각이 발동한다. 눈은 책을 보고 있되, 귀는 청년의 원형 탈모로 쫑긋!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러더니 묻는다. 혹시 원형 탈모가 피곤하면 생기는 것이냐고. “피곤하고 스트레스 받으면 오는 거겠죠?” 선생님은 김이 샐 정도로 아주 원론적인 대답을 해주셨지만, 청년은 그 대답을 그냥 흘리지 않는 눈치다. “아아~ 제가요, 요즘 ‘미라클 모닝’이라는 것을 해요.” ‘미라클 모닝’. 방법인즉슨, 이른 아침이나 아예 깜깜한 새벽으로 시간을 정한 후 멤버 모두 그 시간에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하루를 여는 미션을 수행한다. 이와 관련한 습관들이기 서적은 물론 애플리케이션도 다양하게 나와 있다. 알람은 기본, 아침 명상에 요가까지…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우리, 시간 여행자들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우리, 시간 여행자들

    자칭 국가대표급 만두 마니아인 내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동네의 숨은 만두집을 몰라봤다. 그 집을 알게 된 뒤, 계속 하루 이틀 삼삼히 생각나기에 다시 그 만두집에 찾아갔다. 만둣국을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할아버지 세 분이 우르르 문을 열고 들어오신다. 그리고 뒷자리에 자리를 잡으시고…, 그 순간 오랜만에 가동되는 나의 시청각! “저 누구야, 이상훈이 있잖아.” “어. 왜, 뭔 일 있어? 풍 한 번 맞고 힘들었잖어.” “아니, 아니, 뭔 일은 아니고. 이상훈이는 말야, 이렇게 속에다가 극약을 가지고 다녀요. 명대로 끝까지 사는 것도 못 볼 꼴인 거라.” “죽는 것도 힘들어. 맘대로 못 죽어. 그랬다면 난 버얼써~ 뒤졌지.” “사람이 건강해야 살맛 나지, 나처럼 다쳐서 장애인이 되면 그게 또 죽을 맛이요.” 병원의 처방전 없으면 수면제 한 알도 못 구하는 약제 관리 철저한 이 시대에, 식당에 앉자마자 극약이라니 이 무슨 이야기인가. 아마도 진짜 약을 구했다는 것이 아니라, 극약을 가슴에 품고 다닐 만큼 살기 힘든 것을 비유한 말씀이리라. 할아버지들의 이 짧은 대화 속에 등장한 분 중 한 분은 풍을 맞으셨고, 다른 한 분은 무슨 까닭인지 장애인이 되셨다.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대출, 한도 나왔습니다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대출, 한도 나왔습니다

    은행에 볼일이 있어서 2층 대출창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일반 창구보다 대출 쪽은 아무래도 공기가 더 무겁다. 이곳에는 필요한 돈이 부족해서 오는 이들이 대부분인 데다가 돈을 내어 줄지 말지의 칼자루를 은행이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레이더는 멈추지 않는다. 그 와중에 세차게 돌아가는 시각과 청각, 공감각! 어떤 아주머니께서 주부 대출을 알아보고 계신다. 뚜렷한 직업은 없지만, 간간이 식당 같은 데에 알바(아르바이트)를 나가신다고 한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그마저도 일감이 끊겨 어려웠다고, 그래서 대출을 좀 받고 싶다고 직원에게 힘없이, 그러나 소상히 이야기하신다. 은행 직원이야 그저 기계처럼 이 아주머니 신용이 대출이 가능한 정도인지 알아보고, 한도가 나오면 절차를 밟고, 아니면 돌려보내는 것이 일일 것이다. 그런데도 아주머니 상황을 끝까지 다 들어주는 데 내가 다 고마워졌다. “그럼 핸드폰에 저의 은행 앱 깔려 있으세요?” “제가 콤퓨타를 잘 몰라서요.” 뒷모습만 봐도 바싹 얼어 있다는 것을 알겠다. 한숨도 제대로 못 쉰다. 저분께 대출이 조금이라도 나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코가 석 자인데도 아주머니를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잠시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한두 치수 큰 옷들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한두 치수 큰 옷들

    다른 지역으로 짧게 여행을 하는 날이면 뭐가 그리 빌 것이 많은지, 늘 근방의 절에 들른다. 지난달 말 공주에 간 김에 마곡사에 들렀다. 절에는 자그마한 카페가 하나 있다. 평소라면 블랙커피에 샷까지 추가해서 마셨겠지만, 이날은 왠지 건강하고 착해지고 싶은 마음에 쌍화차를 한 잔 시키고 창밖으로 하얀 풍경을 바라보는데, 아! 또 나의 ‘시청각’이 발동한다. 옆 테이블에 다른 지역에서 사는 세 친구가 의기투합해 공주로 놀러 오신 듯. “내가 딸 셋 중에 막내딸이었잖아. 그런데 우리 엄마가 나를 진짜 아들같이 키웠어.” 옛날 어르신들 공주만 줄줄이 태어나는 바람에 아들 소망을 막내 따님께 투사했나 하는 상상력이 뭉게뭉게. “머리도 예쁘게 기르고 싶은데 늘 바가지 머리로 자르고, 세상에 가방도 그레이트 마징가 가방….” 아니, 한창 예쁘고 싶을 여자아이에게 ‘캔디 캔디’여도 모자랄 판국에 ‘그레이트 마징가’ 가방이라니? 딸이 원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이라이자 머리도 하고 싶고, 레이스 양말도 신고 싶은데 엄마는 절대 안 해 주네.” “이라이자 머리, 레이스 양말, 누가 못 해 본 것을 나는 다 해 봤네. 우리 집에 나 막내딸 하나여서 머리 묶는 방울도 보석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가족이란 무엇인가

    2019년 여름, 예기치 않게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될 일이 생겼다. 입원하는 날 남편이 슬쩍 “혼자 가도 되겠어?” 하고 묻기는 했으나, 이미 그는 답을 알고 물은 것임을 나야 잘 알고 있다. “당연하지!” 씩씩한 이 대답 한마디에 남편은 바로 출근했다. 굿바이. 병실은 2인실로 당첨됐다. 옆 침대 여자분은 나보다 조금 더 일찍 와서 짐을 다 풀어놓은 모양이었다. 변성기에 갓 접어든 아들과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돼 보이는 딸이 함께 왔다. 물론, 아빠도 함께. 커튼을 쳐 놓았지만 두런두런 다정한 말소리가 더 들어 보지 않아도 분명히 행복한 네 식구였다. 역시 귀 밝고, 눈치 빠른 나의 ‘시청각’이 발동되는 순간이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저녁밥 카트가 한 바퀴 돌았다. 맛있는 밥 냄새가 병원 복도에 퍼지고, 옆 식구들은 다시 두런두런…. 얼른 나가서 밥들 먹고 들어오라는 따뜻한 엄마의 배려였다. 이에 아빠는 물론 아이들까지 엄마 자는 것 보고 나갈 거라고 하는데 이제 슬슬 와, 이 가족 결속력이 장난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순간 의연했던 엄마가 울음을 터뜨린다. 같은 암이라 할지라도 나는 0기, 간단히 제거만 하면 된다지만, 병세가 더 깊거나 혹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마이너스 손의 사정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마이너스 손의 사정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자리 털고 일어나 노트북을 들고 양평 쪽으로 향했다. 강이 보이기에 차를 세우고 들어온 카페. 묵직한 라떼 한 잔 시켜서 원고 마무리 짓는데, 아, 산만하고 귀 밝은 나! 또 옆자리 이야기 다 들린다. 60대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분이 오랜만에 만나신 것 같다. “나 언니 말 듣고, 여기 공기 좋은 데로 온 거잖아. 난 그게 너무 행복해. 우리 아저씨도 그러잖어. 너무 넓으면 적적하다고. 그냥 53평 정도나 56평 정도 되는 데 고른 게 딱 좋았어. 아, 그럼, 그럼. 여기(팔을 휘휘 저으며) 강 껴야지. 아침에 일어나서 물안개 타악~ 낀 거 보는 게 얼마나 행복한데, 언니.” “왜 없는 할머니들 술 먹고 웨애애애~ 하고 노는 것 있잖아, 나는 그게 좋아. 그냥 자식들 잘돼서 용돈 받으면서 말이야, 손주들 오면 그 돈 모아서 용돈 주고. 학교라도 입학하면 좀 보태서 입학금이나 좀 주고…… 이러고 사는 게 좋아. 있는 사람들 보니까 별로 안 행복하더라고. 어. 돈 쥐고 있으면 안 행복해. 그냥 소소하게 사는 게 좋아.” 그 짧은 시간 들리는 말소리로 이 멋쟁이 할머님 신상 파악 완료! ‘김치공장을 오래 운영하심. 지금은 처
  •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출근의  위대함

    [황서미의 시청각 교실] 출근의 위대함

    남다르게 산만하고, 아직 귀까지 밝은 나는 어디 가서 혼술이라도 하고 있으면 옆자리 사람들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자꾸 듣게 된다.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적 포텐이 터지는 순간이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일요일 밤, ‘언니네 삼치집’에서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일요일, 일요일 밤이 가지는 의미를 이 땅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수많은 이들은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삼치집에서 앉은자리 대각선에 내 나이 또래 남자 네 명이 막걸리를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었다. 나도 한 사발, 두 사발 꼴깍꼴깍 마시다 보니 이미 가게가 문 닫을 때가 다 된 모양이다. 손님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딱 두 테이블만 남았다. 그때 저쪽에서 들리는, 피곤에 폭삭 절은 목소리! “아아~ 내일 출근 모더겄다(못하겠다)~.” 십오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궁금하다. 과연 저들은 내일 아침 월요일 출근에 성공했을까? 나 또한 1999년부터 2013년도까지 아침 9시까지 꼬박꼬박 회사에 나가는 직장인이었다. 아침 일찍 내 몸을 일으켜 세워 정확한 시간까지 나가야 하는 칼출근 생활은 아무리 십년이 넘어가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회사 생활에 엄청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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