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서미 작가
이렇게 치킨집에 홀로 섬처럼 앉아 있으면 주변 모든 테이블의 사연들이 신기하게도 내 레이더망에 쏙쏙 걸린다.
오늘은 특히 뒷자리에 있는 아저씨의 사연. 초등학교 6학년 딸 때문에 엄청 속상하신가 보다. 다행히도 앞에서 아저씨의 동네 형님이 맥주 한 잔을 하며 성실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다. 몇 년 전 아내랑 이혼했던지라 딸은 동네 가까이에 엄마랑 살고 있단다. 그런데 조금 전에 아이가 전화해서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무슨 말을 전한 것 같다.
“통화할 때 가슴이 찢어지는 거 같더라니까요.”
나는 한 번도 아버지한테 그런 적이 없는데 요즘 애들은 그게 사람이냐고, 이건 모두 교육이 문제인 거라고 덧붙이면서 더욱 흥분한다.
앞에 앉은 아저씨는 계속 애가 무슨 잘못이냐고, 아이는 무조건 잘못이 없다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를 들어 줘야 한다고 당부하신다. 한 번 화가 난 터라 그건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 맥주도 한 잔 들어갔겠다 감정에 브레이크도 잘 안 잡히니 다른 사람 말이 들릴 턱이 없다. 주인아저씨도 지나가면서 한마디. “우리 ○○가 열 많이 받았구나.”
인상적인 것은 “아이는 잘못이 없다”라는 ‘형님’의 말씀이었다. 태어날 때, 못된 아이로 세상에 나가라는 딱지를 받고 나오는 아이는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엄마, 아빠 중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짜증 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경우는 딱 한 번 봤다. 그리고 아이가 조금 큰 뒤 아이와 싸운 적이 없는 부모는 아직 보지 못했다. 나도 내 부모님 특히 어머니와 너무나 치열하게 싸우며 큰지라 내 책 뒤편, ‘고마운 분들’께 인사할 때 어머니에 대해 ‘인생이 전투라는 것을 처음 알려 주신 분’이라고 쓰기까지 했다.
아이들은 열어 보고 또 열어 봐도 크기만 다른 똑같은 인형, 내 안의 러시안 인형이 아니다. 만약 앞에 있는 아이, 내 유전자의 반을 물려받은 이 아이가 ‘가슴을 찢어지게’ 하고 있다고 해서 나한테 잘못하고 있는 것일까. 내 속을 헤집어 놓는 요인 그리고 그 사건이 벌어진 환경과 상황은 부모인 나와 함께 오랜 시간 만들어 온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의 세계 안에 나도 모르게 다져 놓은 내 의지일 수도 있다. 심지어 성격의 일부마저도 물려주지 않았나.
“국물도 없어요. 이젠 내가 사고 싶은 것 사고, 하고 싶은 거나 하고 살 거예요.”
아저씨, 큰 결심을 하신다. 그러더니 잠시 후, 치킨 한 마리 포장해 달라고 외친다.
슬며시 웃음이 났다. 그 치킨이 어디로 갈지 알 것 같아서 말이다. 그날 밤, 6학년인 따님은 아빠가 슬쩍 배달해 놓은 치킨을 배불리 먹었을 것이다. 엄마랑 나누어 먹었는지는… 거기까지는 상상이 잘 안 된다.
2021-12-01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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