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붉은악마의 모티브 된 용감무쌍 ‘치우’

    ‘산해경’에 대해서 너무 낯설다거나 그 책을 본 적도 없다고 말하지 말자. ‘산해경’의 세계에 우리는 이미 접근했다. 그게 뭐냐고? 바로 ‘붉은 악마’가 그것이다. 이미 2002 월드컵을 통해서 익숙해진 ‘붉은 악마’는 ‘산해경’ 속 치우(蚩尤)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황제가 중국에서 독보적인 권력으로 대두하기 전,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용감무쌍하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자, 치우. ‘산해경’에 수록된 치우 관련 부분은 간단하다. 치우는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공격했다. 그러자 황제는 응룡(應龍)을 시켜 기주(冀州)의 평원에서 공격하게 하였다. 응룡이 물을 저장하였는데 치우는 바람의 신과 비의 신에게 부탁하여 비바람이 몰아치게 했다. 그러자 황제는 가뭄의 신인 발(魃)을 불러 비를 그치게 했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싸움에서 고전한 황제는 치우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으로 죽은 치우의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다고 한다. 중국의 신화가 단편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전적들과 함께 묶어 치우 신화를 읽으면 치우의 모습과 의미는 더욱 풍부해진다. 치우는 무기를 잘 만들었다고 했으니 대장장이이자 호전적인 전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불로써 나라를 다스린 염제의 신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49) 中 인문지리서 ‘산해경’

    ‘산해경’은 전국시대 중기에서 한나라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중국의 오래된 지리·의학·역술·신화 등의 보고이다. ‘산경(山經)’ ‘해경(海經)’ ‘대황경(大荒經)’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의 성격도 다르다. ‘산경’은 대륙의 산맥과 수원 및 동물, 식물, 광물 등의 분포를 그리고 있어 지리지의 성격이 강하다. ‘해경’과 ‘대황경’은 고대 중국 ‘해내외’ 이웃 민족들의 모습과 삶의 양상을 그리고 있는 인문지리서이자, 고대 중국의 원시 부족들이 갖고 있는 천지창조와 일월성신의 운행 등에 대한 원시 사유를 담고 있는 신화서이다. 세상에 이런 지도가 있을까, 아니 이렇게 기괴한 동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렇게 이상한 세상이 있을까. 존재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그 신기한 세계상이 ‘그리고’와 ‘다시’로 무한하게 이어지면서 계속 생산되는 세계. ‘산해경’은 상상을 통해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신기하고 다양한 존재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남서북동 그리고 중앙 순으로 시작되는 ‘산경’의 기술(記述) 패턴은 아래와 동일하다. 남산경의 첫머리는 작산(鵲山)이다./…/이 산에는 계수나무가 많고 금과 옥이 많이 난다. 이 산에
  • 탈주하는 인문주의자 라블레 “천국 구원보다 ‘지금 여기’ 삶이 중요해”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요 의학 박사이기도 했던 라블레(그림)는 르네상스인답게 철학과 문학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형식적인 원리원칙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래서 (당시 교회가 교육을 맡았으므로) 어릴 적부터 교단을 이리저리 옮겨야 했고, 마침내는 종교보다 문학과 의학에서 마음의 평정을 발견한 듯싶다. 그렇다고 그가 신앙심을 부정하진 않았다. 단지 삶을 가치 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것은 제도로서의 종교 ‘바깥’에 있다고 믿었을 뿐이다. 즉, 이념을 좇아 현세를 소흘히 하지 말고 유심히 관찰하며 유익하게 조직하는 것, 그것이 삶의 진정한 목적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란 바로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천국에서의 구원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간주하던 그 시대에 라블레의 생각이 온전히 받아들여졌을 리 만무하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쓰면서 전 유럽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지만, 사제를 모욕하고 교회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지명수배되고 책이 금서로 지정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때마다 유럽 전역으로 피신하느라 떠돌이의 삶을 면할 수 없었으나, 끝내 자신의 주장들을 철회하진 않았다. 오히려 두 달간 팔린 자기 소설의
  • [고전 톡톡 다시 읽기](48)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1. 라블레와 반(反)영웅의 계보학 ‘오디세우스’나 ‘일리아드’는 고대의 영웅들이 독점 출연하던 모험담이었다. 그들은 원대한 소명을 안고 태어났고, 근엄한 표정으로 놀랄 만한 위업을 추구했다. 건국과 구국(救國), 최고의 목적을 위한 희생 등은 아무나 할 수 없기에 영웅의 삶도 평범할 수 없다. 아서왕 전설과 롤랑의 노래, 이고리 원정기 등 중세 기사 무훈담도 비범한 영웅들을 찬양했다. 어릴 적부터 주변을 놀라게하는 총명함과 신앙심, 용맹함이 그들의 자질이었다. 모험담이 화려하고 감동적일수록 민중의 일상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음은 당연하다. 중세의 끝무렵, 그토록 존귀하던 영웅의 족보에 난데없는 돌연변이들이 등장한다.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우며 엉뚱한 행동을 일삼는 광대와 난봉꾼들이 나타났다. 신화와 서사시를 패러디하며 튀어나온 그들은 단숨에 민중의 상상 세계를 사로잡는다. 위대한 업적과 아름다운 덕행 대신, 그들은 끝모를 난장(場)과 황당한 우스개를 벌였다. 평범하고 무지한 민중에게 다가와 때론 치고받기도 하고 때론 농담도 주고받는 친구가 된 것이다. 16세기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에 나오는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 그 최초의 주인공들이었다
  • [고전톡톡 다시읽기] 삼국유사 어떻게 완성했나

    일연은 우리 나이로 14살에 설악산 진전사로 출가하여 84살 경북 군위의 인각사에서 입적했다. 충렬왕의 총애를 받으며 국존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최상층 승려 일연. 그는 출가해서 입적하기까지의 60년 동안 설악산의 진전사, 광주의 무량사, 남해의 정림사, 개경의 선월사와 불일사, 현풍의 보당암, 문경의 무주암과 묘문암, 달성의 인홍사, 포항의 오어사, 청도의 운문사, 군위의 인각사 등 전국 각처를 떠돌았다. 일연은 경북 군위의 인각사에 머물던, 생애 마지막 5년(79~84세) 동안 ‘삼국유사’를 집필 했고 제자 무극이 편찬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발간이 단지 몇 년 동안에 이루어진 작업의 결과는 결코 아니었다. 일연이 승려 생활 60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읽고 듣고 수집한 그 방대한 ‘자료’들이 없었다면 ‘삼국유사’의 편찬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수많은 자료가 인용되어 있는데, 국내의 역사서와 중국의 역사서만이 아니라 방대한 분량의 금석문, 고문서, 사적지, 설화 등 해당 지방에 머물거나 가보지 않고는 구할 수 없는 사료가 대부분이다. 일연은 현지를 방문하여 각종 문서, 유물과 유적, 설화 등을 조사·판독·채록하며 필
  • [고전톡톡 다시읽기] (47) 일연의 ‘삼국유사’

    ‘괴·력·난·신(怪力神)’의 사건을 담아낸 역사책 ‘삼국유사’. 승려 일연(1206~1289)은 기이하고 허탄하다는 이유 때문에 버려진 이야기들을 수습하여 ‘삼국사기’와는 다른 ‘또 하나의 삼국 역사’를 구성한다. 증명하기 어렵고 경험의 세계로는 설명이 안 되는, 기껏 설화로나 취급될 법한 이야기들에서 역사의 진실을 보았던 일연. 일연이 아니었다면 ‘괴력난신’의 이야기들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마치 가공한 듯한 신이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들을 통해 일연이 전하고 싶었던 바, 역사적 진실과 삶의 역동성을 우리의 현실로 만드는 것. 이것이 ‘삼국유사’와 만나는 방법이 아닐까. ●민족, 여러 인연들의 환상적인 조합 삼국이 고구려, 백제, 신라임엔 틀림없지만 일연은 삼국 이전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역사까지 모두 삼국의 역사 안에 포함시킨다. ‘삼국유사’ 기이편의 이야기들은 그 나라가 크든 작든 그 역사가 길든 짧든, 적어도 하나의 국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이적이 일어나며,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들이 한반도의 역사를 구성했음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일연은 자료가 전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46)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0. 니체, 차라투스트라를 만나다 1881년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가 질스마리아의 실바플라니 호숫가의 숲속을 거닐고 있을 때 하나의 사유가 ‘비둘기처럼 조용하게’ 찾아왔다. 니체는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로서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였던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유를 펼쳐낸다. 사실 예언자 차라투스트라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대조적이다. 전자가 선악을 엄격하게 구분한 가운데 도덕을 창시했다면, 후자는 도덕의 몰락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말한다. 말하자면 니체는 페르시아의 차라투스트라를 몰락시키고 그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1883년 2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쓰기 시작한다. 1부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열흘. 2부와 3부 역시 그해 여름과 겨울에 각각 열흘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리고 1884년 반년간의 작업을 거친 뒤, 1885년에 제4부가 나왔다. 조용히 다가온 사유와 폭풍과 같은 글쓰기. 그렇게 니체는 영감을 인류에게 보낸 최고의 선물로 만들어냈다. 1. 차라투스트라, 허무주의와 맞서 싸우다 ‘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의 변신 이야기다. 그는 동굴에서의 수련과 인간의 심연에 대한 탐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니체의 독서관 살펴보니

    니체는 글 가운데 ‘피로 쓴 것만’을 사랑했다. “다른 이의 피(넋)를 이해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게으름을 피워가며 책을 뒤적거리는 자들”을 미워했다. 저자의 넋을 이해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일 귀와 눈을 가진 독자를 니체는 갈망했다. 그래서일까? 니체의 언어는 우리에게 매우 낯설다. ‘차라투스트라’만 해도 초판은 단지 40부만 판매되었을 뿐이다. 사실 니체는 아무나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누구라도 읽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니체의 책들은 오직 높은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만을 위한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니체는 자신의 책과 공명할 독자 또한 창조하고자 했다. 니체는 독자들에게 묵독이 아니라 암송을 권장한다. 묵독이 의식의 영역에 관계된 것이라면, 암송은 신체의 영역에 관련된다. “이 한가지 일을 위해서 사람들은 거의 소가 되다시피 해야 하며 어느 경우에도 ‘현대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되새김질하는 것을 말한다.”(‘도덕의 계보’) 소의 되새김질을 떠올려 보라. 하나의 사유를 잘근잘근 씹고 또 씹어 맛의 무수한 변화를 체험하는 동시에 영양분을 하나하나 온몸에 퍼뜨리는 독자를. 니체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이탁오에게 글쓰기란

    이탁오의 제자 왕본아에 따르면, “선생(이탁오)은 한평생 읽지 않은 책이 없고 가슴 속에 품었다가 토해내지 않은 말이 없었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함은 마치 먹고 마시는 일에 기갈난 사람처럼 굴어 충분히 배부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은 것을 말한다.” 책을 이처럼 절실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글 또한 그렇게 쓸 것이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분은 토해내지 않은 말이 없었는데, 흡사 음식물을 먹다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듯 죄다 구토로 토해내지 않으면 또한 멈추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탁오에게 글쓰기란 일종의 ‘토하기’였다. 토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신체의 반응인 것처럼, 글쓰기는 생각과 감정이 저절로 분출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글만이 누군가를 울릴 수도 웃길 수도, 화나게 할 수도 위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글쓰기를 이탁오는 ‘동심’에 빗대어 말한다.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앎에 구속되지 않은 아이만이 세계를 진심으로 보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언어로 말할 수 있다. 성인(聖人)은 그런 점에서 ‘동심’을 간직한 자들이었다. 세상의 글 잘하는 사람은 모두가 처음부터 글 짓는 데 뜻을 둔 것은 아니었다. 그 가슴 속에 차마 말로 형용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45) 이탁오의 ‘분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책이 있다. 위험한 책과 위험하지 않은 책. ‘분서’는 전자에 속하는 책이다. 태워버려야 할 정도로 위험한 책, 분서(焚書)! “읽는 사람에 따라 질책과 원한이 생길 수도 있겠기에, 이 책이 응당 불살라지고 내버려질 운명”임을 예감한 이지(李贄·1527~1602)는 자신의 문집에 ‘분서’라는 쇼킹한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분서’는 불태워지는 대신 불처럼 번져나갔고, 불타오르듯이 읽혔다. ●위험하지만 절박한… 낯선 배움의 여정 이지. 중국 명나라 말기의 사상가로, 호는 ‘탁오’(卓吾)다. 대체로 이탁오 앞에는 ‘중국 사상계의 이단아’, ‘명대 최고의 사상범’ 같은 극단적인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이탁오는 당대(當代) 지식인들의 도그마가 되어버린 주자학적 질서에서 발생한 하나의 균열이었다. “내가 지금 음식을 갈망하는 것처럼 도(道)를 추구한다면 공자와 노자를 가릴 여유가 있겠느냐.”던 이탁오는, 굶주린 자가 밥을 구하는 절박함으로 기존의 영토를 떠나 낯선 배움의 여정을 시작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공자를 존경했지만 공자에게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알
  • ‘더 멋진 신세계’를 맞는 우리의 자세

    2차 세계 대전 후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 새로운 서문을 추가 한다. 이 서문은 이전의 ‘멋진 신세계’에서 자신이 놓쳤던 결점을 집어내는 형태로 쓰여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만족스럽지 않았던지, 그는 1958년 ‘다시 찾은 멋진 신세계’라는 비평집까지 발간한다. 어찌 보면 이는 작가로서 꽤 위험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작가가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들은 작가에 대한 독자들의 신뢰를 여지없이 무너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멋진 신세계’가 SF형식으로 쓰여져 있다는 점, 더 정확히 말해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의 행동은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놓고는, 그 이야기 안에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편으로 작가의 오만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생각은 SF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불러오던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는 어떤 작품도 절대 ‘공상’에 기대 있지 않다. 다른 문학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는 SF 또한 결국은 ‘지금-여기’라는 현실에 기초해 쓰여 졌기 때문이다. 다만 미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44)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누구나가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 행복을 위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며, 그 계획에 맞춰 자신을 갈고 닦는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꿈도 그 꿈을 보아줄 누군가가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은 독자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고, 영화를 찍는 사람은 관객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혼자 떠나는 여행조차 새로운 공간에서의 새로운 만남을 꿈꾸며, 설령 새로운 만남을 바라진 않더라도 결국은 그 여행담을 들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혼자 떠나는 여행의 소중함을 어떻게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여행자의 역설. 그것은 바로 인간이란 존재가 갖고 있는 인간적 한계의 증거다. ●행복의 조건 하지만 안타깝게도 누군가와의 만남이 행복한 삶을 보장해주진 못한다. 나와 너의 만남이 ‘우리’라는 이름을 갖게 될 때 우리 사이에는 치열하다 못해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다. 나의 행복을 위해선 반드시 너라는 존재가 필요하지만 ‘우리’를 유지하기 위해선 나의 행복만을 고집할 수가 없다. 난감한 일이다. 너를 떠나보내자니 홀로 되어 버린 내가 행복해질리 만무하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너와 함께 있자니 나의 존재가 점점 사
  • 논어에 나타난 공자가 사랑한 제자들

    얼마 전 종영한 한 드라마에서 성균관 박사 정약용은 ‘논어’를 이렇게 설명했다. “논어는 공구(공자)라는 고지식한 늙은이와 똘똘한 제자들이 모여서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박 터지게 싸운 기록들이다. 불만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 와라. 한 학기동안 우리도 박 터지게 싸워 보자.” 이 대목에서 핵심은 공자는 고지식했고 제자들은 똘똘했다는 사실 여부가 아니다. 기원전 5세기에 공자는 자신의 학문적 비전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자에게는 3000명이 넘는 제자들이 있었다. 이 중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등 육예(六藝)에 통달한 인물만도 77명! 공자와 그 제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활발한 학단(學團)이었다. 인류 최초의 기숙식 아카데미아였던 것이다. 이 때문이었을까.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저술하면서 공자(孔子)의 일생을 제후(諸侯)들의 기록인 ‘세가’(世家) 편에 넣었다. 그뿐 아니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을 ‘사과십철’(四科十哲)로 분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이라 하여 ‘열전(列傳)’편에 배치하였다. 한마디로 공자를 왕(王)으로 대접했던 것! 공자와
  • [고전톡톡 다시읽기] (43) 공자 ‘논어’

    ‘논어’는 동아시아 최고의 고전이다.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뀔 때마다 ‘논어’는 끊임없이 읽혀 왔고 또 새롭게 출간되어왔다. 아무리 유학(儒學)이나 공자(孔子)와 무관한 사람도 ‘배우고 때에 따라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하는 ‘논어’의 몇 구절쯤은 익숙하다. 어떤 의미에서 ‘논어’는 그냥 아는 책, 읽은 것 같은 고전이다. ●‘누구나’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말씀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나눈 담화(discourse), 즉 ‘말씀들’이다. 그런데 총 20편, 500여 문장으로 이루어진 ‘논어’ 어디에도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로운 말 같은 건 없다. 이곳에서 공자와 제자들은 웃고 싸우고 토론한다. 스승과 제자는 사소한 일상으로부터 나라를 경영하는 방책까지 자유롭게 주제를 넘나든다. 요컨대 ‘논어’의 말들은 모든 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위에 있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논어’ 읽기는 그 말의 현장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논어’를 아름다운 덕담(아포리즘)이 아닌 실제적인 삶의 지혜로 만드는 건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學으로 시작해 知人으로 끝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그는 왜 사르트르에 반기를 들었나

    인류학의 거장이자 구조주의의 선구자인 레비스트로스(1908~2009)는 자서전을 쓰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억력이 나빠서란다. 하지만 그의 나이 80세에 이루어진 대담을 보면 그가 정말로 기억력이 나쁜지 의심스럽다. 유년 시절의 에피소드에서부터 시대적 사건들까지 술술 풀어내는 레비스트로스. 그는 형편없는 기억을 가졌다기보다는 기억을 형편없는 것으로 여긴다. 레비스트로스에게 기억은 경험을 왜곡하고, 진정한 현실을 가리는 장막이었다. 그에게 서구의 기억으로서 ‘역사’도 이와 다를 바 없었다. 유럽의 역사 속에서 원주민들이 수천년을 살아온 땅은 ‘신대륙’이 되었고, 원주민들은 미개인이 되어 계몽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에게 역사의 시공간은 ‘지적 식인 행위’로 물들어 있었다. 1960년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이런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1962)는 사르트르를 위시한 모든 역사주의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그는 책 곳곳에서 사르트르의 개념들을 비틀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레비스트로스의 ‘브리콜뢰르’란 말도 사르트르가 원주민의 사유를 ‘손재주’로 폄하해 부른 것을 뒤집어 새로운 개념을 부여한 것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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