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삼장법사 모델 된 현장법사

    ‘서유기’ 삼장 법사의 모델이 된 현장(玄奘·602~664) 법사는 실존했던 당나라의 고승이다. 어려서 출가하고 남달리 총명했던 그는 천자의 허락을 받지도 않은 채 중국의 국경을 몰래 나가 인도의 날란다에서 17년간 유학했다. 불경을 짊어지고 장안으로 돌아온 현장 법사는 자신의 구법 여행과 관련해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남겼다. 당 태종의 명령으로 저술된 이 책에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실크로드 주변 작은 왕국들의 기후, 산물, 풍속, 역사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했다. 현장 법사의 구법 족적과 신기한 기행은 민간에 전승되었고, 그것이 ‘서유기’의 원형을 이뤘다. 현장 법사의 행적과 관련해서는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제자 혜립이 썼다고 한다-이 전해지는데, 구법과 이후의 번역 사업 등에 관한 현장의 개인적인 체험이 전면 부각되어 있다.  위진 시기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소승 불교로, 개인의 수행을 통한 해탈을 그 목적으로 했다. 현장 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은 중생을 제도해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은 대승불교 경전이었다. 귀국한 현장 법사는 불경 번역에 힘썼다. 그것은 흡사 또 다른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34) 서유기

    ‘서유기’는 삼장법사와 그의 세 제자인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서역으로 불경을 얻으러 가는 모험담이자 깨달음의 지난한 과정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구법기(求法記)이다.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원숭이, 돼지 형상의 저팔계 및 험상궂은 무기와 다양한 모습의 요괴들. 그런데 어디론가 길을 떠나고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환상의 여행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자기 극복과 구도의 과정으로 이야기를 읽어보자. 가령 새해가 되어 뭔가 계획을 세웠다 치자. 작게는 금연이나 금주를, 아니면 운동과 다이어트를. 혹은 평생의 소원을 세웠다. 앞으로 세상을 위해서 살겠다, 이렇게 살겠다 저렇게 살겠다는 등등. 그런 다음에 나의 결심과 목적에 맞는 다양한 방법들을 고안할 것이고 그것을 향해 매진할 것이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뭘까. 역시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 나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일 테다. 삼장법사는 자기 일생을 걸고 서역으로 가서 불경을 중국에 갖고 오겠다고 결심을 했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안고 길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삼장법사는 승려로서의 계율을 중시하면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갔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요괴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33) 홉스 ‘리바이어던’

    때는 1588년 영국의 어느 시골 마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으로 침입해 들어온다는 소문에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런던 교외에 위치한 맘즈베리에 살던 한 목사의 아내는 그 말에 얼마나 놀랐던지, 아직 출산일이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아기를 낳아버렸다. 그가 바로 ‘새로운 철학의 빛나는 땅을 개척한 위대한 콜럼버스’라는 찬사와 ‘최고의 무신론자이며 맘즈베리의 악마’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토머스 홉스(1588~1679)였다. 홉스가 자신은 공포와 쌍둥이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했던 것도 우스갯소리만은 아니었다. 그가 살던 당시 유럽은 종교전쟁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내전이 치열하던 때였다. 그는 실제로 평생을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살았다. 홉스가 보기에 사람들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 면에서는 평등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는 누구나 살해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대표작 ‘리바이어던’은 이렇게 공포라는 정념에서 탄생한다. ●홉스 “나는 공포와 쌍둥이” 그렇기에 이런 혼란에서 해방시켜줄 단 하나의 절대적 존재인 리바이어던이 요청된다. 원래 성경 욥기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인 리바이어던이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공포와 안도의 백성들 거인을 직시하다

    여기 한 권의 책 표지가 있다. 그렇다. 홉스가 도안했다고 알려진 리바이어던 책 표지이다. 모든 책들이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책의 표지는 단순히 예쁜 그림으로 장식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특히나 그가 살던 시대에 시각적 이미지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훌륭한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표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책의 내용을,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단 한 명의 거인이 도시 위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누굴까? 책 제목이 리바이어던인 만큼 리바이어던을 그린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가 양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주교가 종교 행사 때 드는 지팡이, 목장(牧杖)이다. 그리고 칼과 목장 양 끝 위로 문장 하나가 보인다. “지상에 더 힘센 사람이 없으니 누가 그와 겨루랴.(욥기 41장 24절)” 즉, 리바이어던이 세속적인 권력과 교회 권력을 양손에 쥔 무소불위의 주권자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다섯 개의 그림들이 쌍을 지어 나란히 있다. 위에서부터 보자면 성과 교회, 왕관과 교황모자, 왕권을 의미하는 대포와 교황권을 의미하는 파면권이다. 그 아래에는 전쟁터에 쓰이는 총칼과 종교재판에서 쓰이는 논리라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32) 中 명대의 장편소설 ‘수호전’

    “이 책은 가슴 속의 분노를 터트리기 위해 지어진 책이다.”(‘분서’) 명말 사상가 이지는 ‘수호지(水滸誌)’를 ‘동심(童心)에서 우러나온 명문’이라고 격찬한다. 작자들이 가슴 속에 쌓아 왔던 울분을 분식(粉飾)하지 않고서 ‘문자’로 새겨 넣었고 이것이 시공간을 넘어 사람들을 감응시킨다는 것이다. ‘수호지’-혹은 ‘수호전(水滸傳)’-의 작자는 원대의 시내암 또는 명대 나관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둘 다 생애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기에 저자로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저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야기꾼의 재담과 광대들의 잡극 속에서 ‘수호지’는 계속 변주되고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꾼을 둘러싼 사람들은 이들과 함께 탐관오리를 비웃으며 영웅들의 삶의 행적과 호쾌한 무용담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런 면에서 수호지의 작자는 소설에 감응했던 모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저자들은 자신들의 울분을 형상화한 다양한 인물들을 소설 속에서 풀어놓았다. 양산박에 모여든 108명의 호한(好漢)들은 부랑 농민, 어부, 밀수업자, 하급관료, 하급 군인이 주를 이뤘다. 이런 인물군은 이 잡극판의 단골 손님이었다. 이들이 자신
  • 108호걸의 忠이란… 마음의 중심(中+心)

    ‘수호지’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화부터 70화까지와, 71화부터 120화까지. 전반부가 하늘의 별을 타고난 108명의 강골들이 양산박에 모이는 것을 그렸다면, 후반부는 이들의 나라를 위한 싸움을 그린다! 전자가 의(義)에 초점을 맞춘다면, 후자는 충(忠)을 강조한다. 국가의 외부에서 활기차게 살아가던 인물들이 갑자기 국가에 충성이라니! 그러나 충을 마음(心)의 중심을 잡는 것(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강골들의 행동이 꽤 흥미롭다. 한 부류는 전사로서의 삶에 마음의 중심을 잡았다. 이들은 국가와의 만남을 하나의 기회로 활용한다. 이들은 가만히 있기보다는 전장에서의 싸움을 갈망한다. 요나라나 방랍과의 전투, 혹은 길 위의 삶을 지루한 양민으로서의 삶보다 더 즐긴다. 전쟁이 끝나고 조직이 해체된 다음에도 국가로 편입되지는 않는다. 가령 연청이나 이준, 공손승과 같은 이들은 전장에서 공훈을 세우고 난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이들은 알고 있다. 자신들이 토사구팽당할 것임을.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기다리는 건 ‘진부한 일상’뿐임을. 다른 부류는 자신이 선택했던 마(魔)의 세계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가령 송강이 그렇다. 송강은
  • [고전톡톡 다시읽기] (31)셰익스피어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작은 1564~1616) 비극의 주인공 햄릿의 괴로운 한 마디,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숙부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후 왕위에 올랐으니 햄릿은 괴롭다. 복수를 해야 한다. 그런데 고민스럽다. 우선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범죄를 어떻게 확인할지가 고민이고, 간통과 별다를 바 없는 결혼을 한 어머니를 어떻게 해야 할지가 고민이고, 나아가 어떻게 복수할지가 고민이다. 상대는 막강한 힘을 가진 왕이 되었는데, 자신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치 않은, 선왕의 왕자일 뿐이다. 그러니 끙끙 앓다시피 괴로운 것은 당연지사. 이 괴로운 햄릿의 모습으로부터 19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인들은 창백한 지식인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독일의 괴테는 고귀하고 연약한 귀공자를, 러시아의 투르게네프는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이라는 인간 유형을 만들었다. 행동은 하지 않은 채 고민만 주구장창 하는 사람의 유형은 햄릿형, 아무 생각없이 무조건 행동으로 돌진하는 사람은 돈키호테형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햄릿형 인
  • [고전톡톡 다시읽기] 대중지성의 산물 햄릿

    ‘햄릿’의 저자 셰익스피어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가이다. 당대의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와 인도(당시 영국 식민지)를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야기 또한 유명하다. 그 말을 두고 영국인들의 오만함이나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400년 동안 셰익스피어가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끼친 거대한 영향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원래 셰익스피어는 배우로 출발해서 나중에는 자신이 소속된 극단의 주주이자 전속작가 노릇을 했다고 한다. 극단은 셰익스피어가 쓴 희곡을 연극 흥행을 이유로 출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햄릿’ 공연을 했던 배우, 주로 조연급 배우들이 극단 밖에서 대사를 외워내고, 그것을 재구성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연극 대본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햄릿’은 1603년쯤 처음으로 전체적인 작품 꼴을 갖추었고, 이후 계속 수정 증보 과정을 거친다. 1623년 셰익스피어의 동료배우들이 극단에 보존된 자료들을 토대로 다시 작품을 완성해낸다. 결국 ‘햄릿’은 애초부터 판본이 정해져 있지 않았을뿐더러 여기에 번역본이라는 한국적 차이까지 감안하면, 그 어디에도 셰익스피어가 쓴 그대로의 것은 없는 셈이다. 또 셰익
  • 그는 민족의 상처인가? 한국 지성의 바로미터!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광수는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민족의 상처’라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이광수는 도쿄에서 2·8 독립선언문을 썼고, 상하이와 만주를 떠돌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나, 일제 말기에는 일본어로 작품을 쓰며 천황 폐하 만세를 외쳤기 때문이다. 물론 이광수는 자신의 안위를 계산하지 않았다. 일본과 조선이 대등해지고, 마침내 조선인이 세계 역사에 떳떳해지기 위해서 그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을 했을 뿐이다. 그로서는 ‘무정’의 주인공들처럼 ‘민족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다 바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치러야 할 대가는 가혹했다. 지사에서 변절자로 바뀐 그를 조선의 청년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는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기도 했고, 가세는 날로 기울었다. 하지만 이광수를 ‘변절자’, ‘친일파’로 단순하게 매도해 버리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그는 식민지 조선이 맞닥뜨린 역사적 국면마다 자신의 글을 썼다. 자신이 생각하는 민족의 임무와 한계를 거침없이 토해내면서, 최소한 그는 에둘러 가거나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식민지 조선을 살았던 파워엘리트의 세계관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심도 있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고,
  • [고전톡톡 다시읽기]<30> 이광수 ‘무정’

    ●1917년 최초의 신문 1면 소설 한국에서 근대 백년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무정’이다. 26살의 청년 이광수는 생애 두 번째 일본 유학을 하던 1917년, 조국의 ‘매일신보’에 자신의 원고를 보냈다. 바야흐로 을사조약 후 12년이 지났고, 삼일운동을 2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새해 벽두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이 작품은 당대 독서대중을 쥐락펴락하며 그해 6월14일까지 총 126회에 걸쳐 연재된다. 최초의 신문 1면 소설이었던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일일연속극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배신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이 작품으로 이광수는 일약 조선의 문사이자 조선의 스승으로 등극하게 된다. ‘무정’은 해방 이후에도 줄기차게 간행되어 그 판본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2005년에는 일어로, 2006년에는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과연 이 작품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작품의 주인공인 일본 유학생 출신 이형식의 속물근성, 그를 중심으로 기생 박영채와 여학생 김선형이 만드는 애정의 삼각관계, 폐쇄적 공간 안에서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동성애 코드, 공원 데이트와 고백에 이르는 신식 자유연애의 문법, 청나라를 신봉하던 박진사와 그 딸의 퇴행적 삶, 오로지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29)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어느 날 한 무리의 아이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그들이 타고 온 비행기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아이들을 지켜 줄 어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제 구조를 받을 때까지 제 힘으로 버텨야만 한다. 끔찍한 일이다. 더 끔찍한 사실은, 아이들이 아직 자신들의 처지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능력은 누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터득하기 마련인가보다. 어른이 없다는 사실에 은근히 기뻐하며 자유를 만끽하던 아이도, 불시착과 무인도, 구조라는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수영과 나무열매 따먹기를 즐기던 아이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뭔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마침내는 살아남기 위해 해야할 일들을 아이들 스스로 해내기 시작한다. 구조를 위한 봉화를 올리고, 사냥을 위해 사냥부대를 꾸린다. 이런 일들을 도모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어설프긴 해도 기특하기 이를 데 없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적 절차로 대표를 선출하고, 친구의 안경을 돋보기로 삼아 봉화의 불을 붙이는 과학적 재기를 발휘하기도 한다. 처음엔 실패를 거듭했던 사냥도 경험을 통해 점점 익숙해진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이들이 할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등장인물들의 ‘상징성’ 뜯어보니

    많은 평론가들이 ‘파리대왕’을 수많은 상징적 요소들로 겹겹이 쌓여있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대장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 격인 랠프는 상식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성을 상징하고, 랠프에 반기를 들고 사냥부대를 이끄는 잭은 권력 지향적이고 야만적인 인간을, 그리고 랠프의 충실한 친구이자 심복 노릇을 하는 새끼돼지는 무능력한 문명을, 잭의 행동참모 격인 로저는 금기에서 해방된 파괴주의자를, 어딘가 모르게 심약해보이나 아이들의 불안을 대표적으로 잘 표현해 주고 있는 사이먼은 순교자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작품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아무리 어렵다고 소문난 작품을 읽더라도 기죽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리하는 일과 해결하는 일은 다르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가서 하나의 의미로 정리하는 일은 한 사건의 종결로서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순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절대 그 사건이 해결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익히 알고 있는 지식들로만 하나의 사건을, 인물을, 사물을 파악하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고개를 끄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사건은 ‘나의 이해’ 밖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조주선사의 화두 ‘끽다거(喫茶去)’

    ‘벽암록’의 근간이 되는 텍스트는 설두중현(雪竇重顯·980~1052) 스님이 설두산의 자성사에 머물면서 옛 조사들의 고칙(古則) 100개를 정리하고 여기에 송을 붙여 만든 ‘설두송고’다. ‘벽암록’은 송대에 원오극근(1063~1135) 스님이 ‘설두송고’를 바탕으로 수행자에게 제창하기 위해 만든 어록으로, 설두 스님의 본칙과 송에 원오 스님의 수시, 평창, 착어가 더해져 1125년에 완성되었다. 원오 스님은 중국 후난성 창더에 있는 협산사에서 ‘벽암록’을 집필했다고 하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쏟아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벽암천의 온천수를 길어와 그 위에 찻잎을 띄워 마셨다고 한다. 스님이 일본인 제자에게 남겨주었다는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도 있지만, 차와 관련된 유명한 화두는 뭐니뭐니해도 조주선사의 ‘끽다거(喫茶去)’ 화두다. 절에 와본 적이 있다는 학인에게도, 와본 적이 없다는 학인에게도, 조주가 한 말은 “차 마시게.”였다. 학인들이 돌아간 후 “어째서 와보았다 해도 차나 마시라 하고, 와본 적이 없다 해도 차나 마시라고 하십니까?”라고 묻는 원주(院主)에게도 조주 스님은 말한다. “자네도 차나 마시게!” 조주 스님은 시종일
  • [고전 톡톡 다시 읽기] (28) 원오 스님의 ‘벽암록’

    벽암록을 읽으면 모든 알음알이가 딱 끊어진다.” 성철 스님의 말씀이다. 세상에 우리를 좌절시키는 책들은 많다. 그중에서도 ‘벽암록’은 아주 낯선 방식으로 우리를 좌절시킨다. 난해하거나 심오하거나 전문적이어서 어려운 거라면 이런저런 지식을 총동원해서라도 어떻게 해보련만, ‘벽암록’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것저것 끌어다가 이해 비슷한 거라도 좀 해보려 해도, 이해는 고사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고 만다. 모래사막 한복판에서 아무런 무기도 갖지 못한 채 검을 든 적과 마주친 느낌이랄까. 지략이고 기술이고 통할 리가 없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방법은 하나. 정신 똑바로 차리고 맨몸뚱이로 맞서는 수밖에! ‘벽암록’을 읽기 위해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찢기고 넘어지고 흠씬 두들겨 맞을 각오를, 아니 기꺼이 죽을 각오까지도 해야 한다. ●조사들이 툭 던지는 언행 화두 삼다 ‘벽암록’은 화두를 통한 수행을 강조하는, 이른바 ‘간화선(看話禪)’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공안집(公安集)이다. 부처님의 교설에 근거한 실천을 추구하는 여래선(如來禪)이나 좌선과 명상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묵조선(黙照禪)과 달리, 간
  • [고전톡톡 다시읽기] <27> 마르크스 ‘자본’

    시간의 이빨로도 씹을 수 없고 역사의 위장으로도 소화시킬 수 없는 책들이 있다. 출간된 지 150년이 되어가는 칼 마르크스(1818~1883)의 위대한 책 ‘자본’(1867)이 그 중 하나다. 역사학자 홉스봄은 ‘자본의 시대’에서 ‘자본주의’라는 말은 1860년대 등장했으며 무엇보다 ‘자본’의 출간이 중요했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서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홉스봄의 언급을 참고할 때, ‘자본’은 자신이 논박할 적으로서의 우리 시대, 즉 자본주의를 개념적으로 먼저 정초한 셈이다. 다시 말해 ‘자본’의 비판 덕에 우리는 ‘자본’을 명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추리소설 같은 전개방식 ‘자본’의 전개방식을 보면 흡사 추리소설의 느낌을 준다. 실제로 ‘자본’을 소설처럼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첫 장면은 상품이 가득 쌓여 있는 시장이다. 상품들은 이마에 제 가치를 붙이고 있다. 저 가치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부(富)는 도대체 어떻게 증식되는 것일까. 마르크스가 자본의 비밀을 파헤치는 장면은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밀실 살인과도 같다. 자본은 “유통 안에서 생겨날 수 없지만 유통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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