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 나타난 공자가 사랑한 제자들

논어에 나타난 공자가 사랑한 제자들

입력 2010-11-22 00:00
수정 2010-1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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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한 드라마에서 성균관 박사 정약용은 ‘논어’를 이렇게 설명했다. “논어는 공구(공자)라는 고지식한 늙은이와 똘똘한 제자들이 모여서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박 터지게 싸운 기록들이다. 불만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 와라. 한 학기동안 우리도 박 터지게 싸워 보자.”

이 대목에서 핵심은 공자는 고지식했고 제자들은 똘똘했다는 사실 여부가 아니다. 기원전 5세기에 공자는 자신의 학문적 비전을 제자들과 함께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자에게는 3000명이 넘는 제자들이 있었다. 이 중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등 육예(六藝)에 통달한 인물만도 77명! 공자와 그 제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활발한 학단(學團)이었다. 인류 최초의 기숙식 아카데미아였던 것이다.

이 때문이었을까.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저술하면서 공자(孔子)의 일생을 제후(諸侯)들의 기록인 ‘세가’(世家) 편에 넣었다. 그뿐 아니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을 ‘사과십철’(四科十哲)로 분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이라 하여 ‘열전(列傳)’편에 배치하였다. 한마디로 공자를 왕(王)으로 대접했던 것!

공자와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논어’ 곳곳에 다양한 모습으로 편재되어 있다. 공자의 수제자는 안회(顔回)였다. 안회에 대한 공자의 애정은 편애에 가깝다. 가난한 삶 속에서도 청빈함과 인(仁)을 지키는 제자였으니 그럴 수밖에! 하지만 불행히도 안회는 공자보다 앞서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자공은 공문(孔門)의 실질적인 살림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제자였다. 자공은 말솜씨가 뛰어나 특히 외교가로 큰 두각을 나타냈는데, 재리(財理)에도 밝아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다. 자공의 존재는 14년에 걸친 공자의 천하 주유는 물론 공자의 최후 말년을 지킨 큰 버팀목이었다.

공자 학단의 특별한 또 하나의 제자로는 자로(子路)를 빼놓을 수 없다. 자로는 공자와 불과 9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자로는 세상 모든 사람이 공자를 버려도 끝까지 공자를 좇아갈 유일한 인물로 묘사될 정도로 공자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다.

당연히 자로에 대한 공자의 신뢰 또한 매우 두터웠는데, 공자는 자로의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이 화를 불러일으킬 것을 염려하곤 했다. 자로는 끝내 당시 정쟁의 화를 피하지 못하고 죽는다. 그리고 자로의 시체가 소금에 절여져 되돌아온 이후, 공자는 두 번 다시 소금에 절인 음식에 입을 대지 않았다.
2010-11-22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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