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생포의 어제·오늘] 80년대 공해쇼크… 인구 10분의 1로
고래잡이로 한창 전성기를 누렸던 1970년대 장생포. 아이들에게 ‘경찰서장 할래, 고래잡이배 탈래?’라고 물으면 누구나 “포경선 탈랍니더.”라고 답했다고 한다. 장생포는 세월만큼이나 적잖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장생포 고래길은 ‘포경 전성기’, ‘환경오염 이주’, ‘고래생태 관광’으로 이어진 질곡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포경으로 풍요를 누렸던 장생포는 1985년부터 위기를 맞았다. 장생포만 일대에 속속 들어선 공장들은 매연과 폐수를 매일 뿜어냈다. 공해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85년 석유화학공단 주변 장생포, 매암, 여천 등을 ‘환경오염 이주지역’으로 지정하고, 이주 보상작업을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상업 포경까지 금지되면서 주민들의 생활 터전과 생계수단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주민들은 동요했고, 하나둘 마을을 떠났다. 전성기 때 1만 5000명에 이르던 인구는 90년대 들어서면서 1500명으로 줄었다. 10분의1로 급감한 것이다. 학생들은 공해병으로 검진을 받아야 했고, 이를 보다 못한 학부모들은 이주를 선택했다.
마을을 살리는 것은 고스란히 남은 주민들의 몫이었다. 주민들은 조를 짜 공단을 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