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길
  • 마을입구 600살 은행나무 최근 6년새 아들·손자목 얻어

    전주 한옥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만고풍상을 온몸으로 버텨온 거대한 은행나무(위)가 눈에 들어온다. 높이가 16m에 이르고 몸통은 어른 팔로 두 아름에 이른다. 이 나무가 ‘천년 고도’ 전주시를 상징하는 은행나무의 조상이다. 수령이 600년을 넘는 이 거목은 아직도 푸름을 잃지 않고 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몸통이 훼손돼 대수술을 받았지만 여름이면 커다란 그늘을 만들고 가을이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자손을 퍼뜨린다. 풍남동 은행나무는 고려 우왕 9년(1383년) 조선의 개국공신 월당 최담 선생이 귀향, 후진양성을 위해 학당을 세우면서 전주 최씨 종대 뜰안에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은행나무는 벌레가 슬지 않아 관직에 진출할 유생들이 부정에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 심었다. 은행나무 밑에서 심호흡을 다섯번 하면 정기를 받게 된다 하여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가 됐다. 이 은행나무와 관련된 또 다른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최담 선생의 넷째 아들 최덕지(崔德之)가 조선 태종 2년에 이 나무를 심었다는 설이다. 최덕지는 인품이 특출난 데다 오복을 다 갖춰 흠모하는 후학들이 많았다. 또 여인네들이 상사병을 앓을 만큼
  • 부동산 투기 분수령 말죽거리

    강남대로의 마지막 지점인 말죽거리. 현재 3호선 양재역 4번 출구 앞에 표지석만이 남아 오랜 역사를 말해준다. 말죽거리는 한양 도성에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로 가는 첫 번째 역이었다. 삼남지방으로 나가는 벼슬아치나 삼남지역에서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벼슬아치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최고의 교통 요충지였던 셈이다. 임금으로부터 벼슬을 제수받은 선비들은 동대문을 나와 한강을 배로 건너 양재역까지 말을 타거나 걸어갔다. 도성 이남으로는 말죽거리를 시발점으로 해서 30리마다 역이 있었고 역을 관장하는 역장인 찰방이 있었다. 벼슬아치나 암행어사는 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말을 징발할 수 있었고 역에서 말을 바꿔 탈 수 있었다. 벼슬아치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역이나 부근의 주막집에서 식사하고 잠을 잘 수 있다. 다른 어느 역보다도 말죽을 많이 먹여야 하는 거리였으므로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 1624년 이괄의 난 때 인조 임금 일행이 남도지방으로 피난하면서 허기와 갈증에 지쳐 이곳에서 급히 팥죽을 말 위에서 먹고 과천으로 떠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말죽거리는 도성에서 지방으로 내려가고 지방에서 도성으로
  • 강남대로 명물 뉴욕제과

    강남의 ‘뉴욕제과’를 모르는 30~40대 서울시민들은 없을 것이다. 뉴욕제과의 빵이 맛있어서일까. 아니다. 강남역 6번 출구 앞에 있는 뉴욕제과는 가장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만남의 장소였다. 무선호출기도 없던 1980~90년대 ‘강남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바로 뉴욕제과 앞에서 만나자는 이야기였다. 당시 하루에도 수백, 아니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친구, 연인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원래 뉴욕제과는 지금 강남역 자리가 아니라 명동에 있었다. 1966년 명동 한진빌딩 앞에 있다가 1973년쯤 지금 자리로 옮겼다. 당시는 지하철도 빌딩도 없었고 말죽거리(현재 양재역 부근)까지 허허벌판이었다. 뉴욕제과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전국에 지점이 80여 곳에 달하는 큰 체인으로 성장했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뉴욕제과 빵 아니면 안 먹는다는 소문이 나면서부터다. 뉴욕제과는 그러나 1998년 부도가 나면서 ABC상사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상호는 ‘ABC뉴욕제과’로 바뀌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도시와 길] <17> 서울 강남대로

    ‘강남은 욕망의 용광로다. 구별짓기의 아성이다. 강남은 한국의 초고속 성장을 온몸으로 드라마틱하게 웅변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강남이 한국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서울의 강남을 이렇게 정의했다. 강남의 허리 역할을 하고 있는 강남대로는 서울은 물론 대한민국의 발전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527 한남대교 남단에서 서초구 양재동 352의 3 양재대로에 이르는 6.9㎞의 도로로, 너비는 50m(보도 포함, 차도만 약 40m)이고 왕복 10차선이다. 쭉 뻗은 도로는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며 강남역을 중심으로 한 상권은 1980~90년대 대한민국의 제일이었다. 2000년 들어서는 벤처붐이 불면서 곁가지 격인 ‘테헤란로’가 주목을 받으면서 화려한 부활을 했다. ●한국 현대화의 표상 서울 역사의 중심은 종로 일대와 남산 등 강북이었다. 하지만 그 무게 중심이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한강의 이남 즉 강남으로 옮겨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시민의 약 80%가 한강을 건너지 못해 공산 치하에서 혹독한 3개월을 보냈다. 전쟁이 끝났지만 서울시민의 가슴에는 ‘공포’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1966년 제3한강교, 현재 한남대교 건설
  • [도시와 길] “시범가로 반대상인 일일이 설득… 제2 전성기 곧 올겁니다”

    “광복로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광복로를 가꾸는 모임인 광복문화포럼 김익태(52·이재모 피자 대표)회장은 광복로를 탈바꿈시킨 주역 중 한 명이다. 그는 지난 2007년 광복로 시범 가로 조성 때 추진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광복 문화포럼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사업추진에 반대하는 상인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하고 관료들과 머리를 맞대며 밤새우기 일쑤였다. “당시 ‘광복로 붐붐붐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반대가 심한 일부 상인들을 설득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보람이 컸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광복로의 변화와 발전 주체를 이끄는 중심에 김 회장을 비롯한 광복문화 포럼 150여명 회원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름에서 묻어나듯 광복문화 포럼은 상인들의 친목도모뿐 아니라 생활의 터전인 광복로에다 문화와 예술을 함께 심어 시민들과 공유하는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2007년 만들어졌다. 당시 광복로 상가번영회와 시범 가로 조성사업에 참여한 주민과 상인들이 주축이 됐다. 광복로에 온종일 음악이 흐르고 매주 일요일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진 것도 모두 이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특히 작년에는 자신들의 주머니를 털어 예산을 마련
  • [도시와 길] (16) 부산 광복로

    서울에 종로가 있다면 부산엔 광복로가 있다. 부산 중구 광복로는 규모와 길이 등에선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원도심에 있고 역사성을 담고 있어 ‘부산의 종로’로 통한다. 부산 토박이인 윤재웅(54) 씨는 “광복로는 어릴 적 부모님 손잡고 옛 고려당에서 빵을 먹고 부산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미화당백화점에서 쇼핑하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라고 기억을 되살렸다. ●광복로는 역사의 거리 광복로는 옛 부산시청 쪽에서 국제시장 입구에 이르는 너비 15~16m, 길이 1㎞인 그리 길지 않은 도로다. 하지만 부산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 광복동 일대는 일본인의 주거지였고, 광복로는 일본인들의 상업 중심지였다. 도로 양쪽으로 요리집과 극장, 백화점, 서양식 건물 등이 들어서면서 번창했다. 당시 광복로는 벤텐조(辨天町) 거리라 불렸다. 벤텐조는 일인들의 수호신으로 용두산 신사에 모셔둔 변재천사(辯才天社)에서 따왔다. 1945년 이후 조국의 광복을 기리는 뜻에서 이름이 광복로로 바뀌었다. ‘광복(光復). 빛을 회복한다.’라는 은유적인 표현과 함께 독립이라는 뜻을 넘어 다시 주권을 회복하다라는 역사성을 담고 있다. 해방의 물결과 함께
  • [도시와 길] 새해 타종식·부산국제영화제 등 365일 북적

    광복로에선 1년 내내 축제와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새해를 알리는 시민의 종 타종식이 용두산공원 종각에서 울리는 것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다양한 축제와 행사가 열려 시민과 관광객을 즐겁게 한다. 타종식은 1972년부터 매년 1월1일 열리는데 묵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려고 나온 인파로 광복로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린다. 부산의 한 해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3월에는 건전한 놀이문화 조성을 위한 중구청장 배 ‘힙합 페스티벌’이 용두산공원에서 열린다. 조선통신사 한·일문화 교류축제 중 조선통신사 접영식과 행렬재현행사도 광복로 일대에서 열린다. 이 축제는 2002년 처음 시작됐으며 매년 5월 개최된다. 한·일 두 나라에서 민속 예술단 등이 참가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올해는 천안함 사태로 취소돼 아쉬움을 안겨주고 있다. 5월 중순에 열리는 ´부산연등축제´는 광복로의 밤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부처의 자비를 되새기게 한다. 부산의 패션 1번지답게 매년 10월 ‘광복로 패션 페스티벌’이 열린다. 댄스공연, 메이크업 퍼포먼스, 거리이벤트 등 다채로운 행사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로 자리매김한 부산 국제영화제도 빼놓을 수
  • [도시와 길] 청결·친절의 중앙상가 ‘문화 거리’ 지정으로 옛 명성 되찾아야

    “우선 중앙상가만이라도 ‘문화의 거리’로 지정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화점 진출 등으로 침체됐던 중앙상가는 시와 상인들의 합심 노력으로 경기가 점차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다. 각종 문화 인프라 등이 구축되면서 상가를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매출 또한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상가 상인회 손형석(56) 회장은 “아직 상인들의 어려움이 여전하다.”면서 “중앙상가가 하루 빨리 문화의 거리로 지정돼야 ‘포항의 명동’이라는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상인회는 돌출 간판 정비와 쓰레기 수거 등 청결 운동에 앞장서고 상인대학도 개설해 상인들의 친절 및 서비스 마인드 향상을 도모할 계획이다. 또 상가 곳곳에 쉼터를 조성하고 아케이드와 공영주차장, 시가지 안내도 등 이용객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도 설치키로 했다. 아울러 각급 학교 및 동아리, 문화·예술 단체 등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유치해 문화·예술행사가 연중 펼쳐질 수 있도록 한다는 복안이다. 이와 함께 상가 점포 쇼윈도를 갤러리로 개방해 회화, 민화, 서예, 사진, 도예, 조각 등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을 선보인다는 것. 그는 시에 중앙상가가 문화의 거리로
  • [도시와 길] (15) 경북 포항시 중앙로

    경북 포항시 중앙로에는 도시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도시의 탄생에서 성장, 침체까지의 영욕을 그대로 보여 준다. 신도시 개발 등으로 도시의 덩치가 커지면서 중앙로는 상대적으로 왜소해졌지만 여전히 포항의 중심 도로이다. 화려한 명성도 간직하고 있다. 중앙로는 포항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주도하고 경북 제1의 도시로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어린 시절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중앙로에서 풀빵장사를 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 후 금의환향한 곳이다. 중앙로는 오거리에서 육거리 포은도서관(옛 포항시청)까지 1.2㎞에 걸쳐 뻗어 있다. ●오거리~육거리 포은도서관 1.2㎞ 이 길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생성됐다. 배용일 포항대학 교양학부 초빙교수는 “1914년 일본이 자국민이 많이 거주하는 흥해군 및 영일현 일부 지역을 일본식 지명인 ‘중정’(仲町·중심지)으로 개발하면서 지금의 중앙로를 뚫기 시작했다.”면서 “조선 말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 수 없었던 불모지였던 중앙로가 포항 도시 형성의 시발점이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후 중앙로는 빠른 속도로 확장됐다. 일본이 1916년 중앙로 인근의 형산강 제방 축조공사를 한 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덩달아 포항의 고
  • [도시와 길] 철강도시 포항, 문화도시로 변신중

    ‘포항=철강=산업화=공해=문화의 불모지’ 1969년 ‘포스코 신화’가 시작된 이후 40년간 포항 발전의 역사에 드리워진 그늘이다. 그런 포항이 이제 화려한 문화 도시로의 대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시가 중앙로를 중심으로 야심찬 문화 클러스터 구축에 나섰다. 시민들이 갈망하는 문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동시에 침체된 중앙로 상권과 문화를 접목시켜 상권 활성화를 유도해 보자는 의도에서다. 시는 우선 오는 7월 말 문화시설이 절대 부족한 중앙로(육거리)에 관람석 266석 규모의 시립 중앙 아트홀(지상 4층, 지하 1층)을 개관한다. 아트홀이 개관되면 365일 다양한 공연 및 전시 행사를 마련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한편 문화·예술 단체에도 개방하는 등 포항지역의 핵심 문화공간으로 육성할 방침이다. 시는 또 2012년까지 중앙로 인근 동빈내항을 복원해 대규모 문화공간 등을 마련한다. 이 사업은 송도~해도동의 매립지를 걷어 내고 송도∼형산강 1.3㎞ 구간에 폭 18~30m, 깊이 2m의 미니 운하와 수상공원, 호텔, 상가, 선착장, 문화체험공간, 각종 레포츠 시설 등을 건립할 계획이다. 특히 해도·송도·죽도동 일대 9만 6000여㎡에 문화체험 테마 및 워
  • [도시와 길] 개화기 유적 20곳 단장… 역사문화마을로 재탄생

    1900년대 초 벽안의 선교사들이 오갔던 ‘외국인 촌’. 광주 남구 양림산 자락 일대가 부활의 나래를 폈다. 조만간 국제 교류의 새로운 무대로 거듭난다. 제중로·서양길·양천길 등 주변이 모두 포함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07~2023년 모두 5조 3000억원을 들여 광주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조성한다. 시내를 7개 권역별로 나눈 도심 리모델링도 추진된다. 7개 권역 중 양림동 일대는 ‘아시아문화 교류권’으로 지정됐다. 정부는 310억원을 들여 양림동과 맞닿은 사직공원에 창작·기획인, 인권운동가 체류활동지원센터를 짓는다. 또 아시아 예술촌과 공방거리, 아시아 음악타운 등을 조성한다. 이와는 별도로 서양길·제중로·양천길 주변 등이 역사문화마을로 재탄생된다. 광주시는 최근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문화마을 착공식을 가졌다. 2013년까지 모두 307억원을 들여 이 일대에 산재한 개화기 선교 유적 등 근대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새롭게 단장한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 보육 장소였던 ‘우일선 선교사 사택’(1910년대 건립)과 1909년 숨진 오웬 기념관, 네덜란드 건축양식의 수피아여고홀(1911년 건립), 선교사 묘
  • [도시와 길] 양림동 10대째 토박이 차종순 호남신학대 총장

    “양림동은 광주 근대화의 탯자리나 다름없습니다.” 이곳에서 10대째 살고 있는 차종순(62) 호남신학대 총장은 “지역의 모든 ‘길’에는 근대 역사 문화의 숨결이 배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향토사학자’나 다름없을 정도로 동네의 옛 이야기를 줄줄이 꿰고 있는 토박이다. 애착도 그만큼 강하다. 개화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1882년 한·미통상조약이 이뤄진다. 이듬해에 민영익·홍영식·유길준 등은 ‘견미사절단’으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다. 이어 20세기 초반까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몰려들어 온다. 이들이 처음 자리잡은 곳이 불모지나 다름없던 양림산 자락이다. 이들은 1905~1910년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과 수피아여고·숭일고·고아원 등을 짓고, 선진 농업기술 보급에 나선다. “이때부터 한센병·결핵 등의 환자가 몰려들고, 하층민 자녀들도 신식 학교에 입학했다.”는 차 총장은 “이는 단순한 빈민구제가 아니라 조선의 계급구조가 실질적으로 무너진 계기였다.”고 말했다. 현대적 의미의 인권의식이 싹튼 전환점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1894년 갑오개혁이 신분제도를 철폐한 선언적 사건이라면 교육을 통한 평등의식 확산은 신식 학교의 몫이었다고 평가한다
  • [도시와 길]<14> 광주 양림산 자락 서양길

    산줄기에 올라 보면 언제나 꽃처럼 피어 있던 광주는 나의 도시... 아아 시름에 잠길땐 지금도, 내마음속 무등의 산줄기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 늙으면 돌아가 추억의 안경으로 멀리 바라다 볼 사랑하는 나의 도시.(김현승) 시인 김현승(1913~1975)이 어린 시절을 보낸 광주 남구 양림산 꼭대기에서 무등산을 바라본 이미지가 그대로 묻어난다. 정상에 올라 보니 아름드리 참나무 숲 사이 사이로 무등산이 지척이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일부 시야를 가리지만 도심을 껴안은 모습이 든든하다. 사직공원과 호남신학대학을 가르는 신작로가 ’서양길’이다. 고개 너머로는 제중로와 이어지고 반대편 언덕을 따라 내려가면 양천길·양림길과 만난다. 이 동네는 ‘서양촌’으로도 불린다. 20세기 초 서양 사람들이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했기 때문이다. 선교사 사택과 옛 한옥 등 고색 창연한 근대 개화기 건물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양림산 중턱에 위치한 호남신학대 교정에 들어서면 김현승 시비가 방문객을 맞는다. ‘T 브라운 카페’를 지나 10m쯤 가면 우일선(Wilson) 선교사 사택이 나온다. 1910년대에 세워진 이 건물은 광주시기
  • [도시와 길] 비즈니스·명품쇼핑·문화시설 한자리에…대전역은 변신중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열차’ 1959년 대전역 앞에서 목포행 0시50분 열차를 기다리던 연인이 두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글썽이며 헤어지는 모습을 본 신세기레코드사 직원 최치수가 쓴 시를 노래로 옮겨 대중가요의 고전이 된 ‘대전블루스’. 이 노래를 탄생하게 했고, 중앙로가 시작되는 대전역이 새로운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재정비촉진지구 88만 7000㎡ 뉴타운식 개발 대전시는 2020년까지 대전역세권 개발사업을 벌인다. 대전역 주변인 동구 삼성·소제·신안·정동 일대 88만 7000㎡를 뉴타운식으로 재개발하는 것이다. 지난해 5월 이 일대는 ‘재정비 촉진지구’로 지정됐다. 이곳에는 비즈니스와 명품쇼핑, 문화시설이 집중된다. 수변공간, 명품거리, 컨벤션센터, 호텔, KTX·지하철·고속 및 시외버스 광역교통망 환승센터, 철도 전문교육시설, 문화관람시설 등이 들어선다. 지난해 9월 대전역 뒤 트윈타워 빌딩에는 코레일(한국철도공사)과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입주했다. 시에서 이곳을 재개발할 때 건축물 최고 높이를 300m까지 허용하기로 해 대전의 랜드마크로 떠오를 참이다. ●목척교 36년 만에 시민 품으로…
  • [도시와 길] <13> 대전 중앙로

    대전 중앙로엔 도시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 도시의 탄생에서 침체기까지 그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각종 신도시 개발로 명성이 다소 떨어져 있지만 중앙로는 여전히 대전의 중심 도로이다. 중앙로는 대전역에서 충남도청까지 뻗어 있다. 1.2㎞ 길이다. ●대전역과 더불어 대전 도시형성의 시발점 이 길은 1932년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오면서 완전히 뚫렸다. 충남도청 이전으로 대전역에서 도청까지 ‘한 일(一)자’로 훤하게 닦였다. 이전에는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대전역이 생기고 7년 후 300여m 앞에 목척교가 건설되면서 중앙로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역전에서 남북으로만 뻗던 도로가 비로소 동서로 뚫린 것이다. 오래 전 대전역 주변에 거대한 밭이 있었다. 주민들은 이곳을 ‘한밭’이라고 불렀다. 대전(大田)이란 지명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송백헌 충남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옛날에는 ‘회덕’이란 지명을 많이 썼는데 경부선이 뚫린 뒤 대전을 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경부선이 대전지역을 동서로 갈라놓으면서 역전 중앙로 주변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역 뒤쪽은 낙후돼 갔다. 송 교수는 “전(田)자가 주둥이가 4개이기 때문에 말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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