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위로다
  • 가장 오래된 백신

    가장 오래된 백신

    코로나19로 국가봉쇄령이 내려진 인도 수도 뉴델리 외곽 삼륜인력거꾼으로 일하던 아빠와 세 살던 열다섯 소녀 조티 쿠마리 정지된 세상을 따라 인력거도 멈추고 때마침 다리마저 다친 아빠 세를 내지 않으면 쫓아내겠다는 무서운 주인 수중에 남은 돈은 한화로 고작 3만 3천원 아빠, 고향으로 가자고 남은 돈 털어 분홍색 자전거 한 대 사고 나니 수중에 남은 건 물 한 병 그렇게 아빠를 태우고 1200㎞를 쉬지 않고 달린 소녀 어떤 재난과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끝내 살리는 건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 가르쳐 준 소녀 그 소녀와 사내에게 제 몫의 물 한 모금 밥 한 공기 덜어 준 이웃들이 함께 이룬 경이로운 삶의 내연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은 오직 사랑뿐 ■ 송경동 시인은 1967년 전남 보성 출생. 2001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등. 천상병시문학상, 신동엽문학상, 고산문학대상 등 수상.
  • 코로나19 바이러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랑하는 사람아 맨얼굴을 보고 싶다 마음대로 가고 싶다 마음대로 공부하고 싶다 마음대로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고 싶다 꽃피는 봄도 신선한 공기도 풀과 나무가 자라나는 여름 산을 보고 싶다 굽이쳐 흐르는 강을 보고 싶다 파도치는 바다를 보고 싶다 단풍 곱게 물드는 골짜기를 보고 싶다 눈 내리는 벌판을 바라보고 싶다 낙타를 사막으로 돌려보내라 원숭이를 숲으로 돌려보내라 박쥐를 동굴 속으로 돌려보내라 벌레와 식물과 동물이 같이 살려면 영역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 늘어나면 동물이 줄어든다 바이러스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생겼다 편리함 때문에 생겼다 우리 모두 조금씩 가난하게 살자 조금씩 내려놓자 조금씩 불편하게 살자 관을 많이 만들어야 이익이 남는가 무덤을 밤낮없이 파야 정신 차리려는가 결국 죽음 속으로 들어간 뒤에야 반성하려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오자 우리가 잊어버린 것을 다시 끄집어내자 사랑하는 사람아 맨얼굴을 보고 싶다 ■유용주 시인은 1959년 전북 장수 출생. 199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가장 가벼운 짐’, ‘크나큰 침묵’ 등. 신동엽문학상 수상.
  • 해변의 눈사람

    해변의 눈사람

    여기는 지도가 끝나는 곳 같다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습니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생각을 멈추어도 나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이 되려고 한다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되려고 한다 눈사람은 녹았다 얼어붙었다 하는 사람 더 이상 녹지 않을 때까지 타오르는 사람 더 이상 얼어붙지 않을 때까지 흐르는 사람 두 사람의 발자국이 모였다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을까 마음으로 와서 몸으로 나가는 것들 몸으로 와서 마음에 갇힌 것들 굳은 마음 손을 대면 손자국이 남을 것 같은 우리는 여권을 잃어버린 여행자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서로의 발끝만 내려다보면서 손바닥을 펴서 네 심장에 갖다 댈 때 눈 속의 지진 지진계처럼 떨리는 속눈썹 나는 그림자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몸을 웅크린다 눈사람의 혈관에는 얼어붙은 피가 고여 있다 모래알갱이가 덕지덕지 붙은 몸으로 거센 바람에 휘청거리고 있다 ■신철규 시인은 1980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신동엽문학상 수상.
  • 지구별은 치료 중

    지구별은 치료 중

    나는 이상한 1학년이에요 담임 선생님께 인사도 못 드렸고 반 친구들도 아직 만나보지 못했어요 어젯밤도 형아랑 같이 학교 가는 꿈을 꿨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내 멋진 교복은 여전히 옷걸이에 걸려있어요 엄마는 요즘 집에서 젤 무서운 사람이에요 하루 종일 우리 뒤치다꺼리 하느라 숨 막혀 죽을 것 같다는데 엄마가 죽을까봐 걱정이 돼서 그런지 형아도 아빠도 엄마 눈치 살살 보며 말을 잘 듣는 거 같아요 나를 작은 강아지라 부르는 할아버지께 언제면 학교에 갈 수 있을지 여쭸더니 지구별이 조금 고장나서 지금 어른들이 열심히 고치고 있는 중이래요 나도 같이 고치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 말씀 잘 듣는 게 아픈 지구별을 빨리 낫게 해주는 거래요 그렇게 몇 밤만 더 자면 드디어 학교에도 갈 수 있고 이상한 1학년이 아니라 진짜 1학년이 되는 거래요 고장난 지구별 빨리빨리 고쳐주세요 더 이상 아프지 말게 해주세요 꼭 좀 부탁드려요 ■ 이종형 시인은 1956년 제주 출생. 2004년 ‘제주작가’로 등단.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출간. 5·18문학상 수상.
  • 자전하는 방

    자전하는 방

    아이들은 킥보드를 타며 공원을 빙빙 돌고 달고나 커피를 만들며 지구가 도는 것을 느껴본다 패션 프루트 같은 바이러스 자신의 사라진 얼굴을 찾는데 이름 없는 생물과 호흡이 섞여 기침이 나오는데 나는 방금 당신을 지나친 것일까 찻잔이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다 챌린지라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 있는 중력 청을 담그고 치즈 케이크를 만들고 어느 날 나는 당신이 좋아지고 사랑에 갇힌 내가 괴롭고 낮달처럼 빈 눈동자만 남은 우리 아이는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 길고양이에게 내민다 고양이는 동네 골목을 돌고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웃어본다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전집』, 민음사, 2018. ■정우신 시인은 1984년 인천 출생. 2016 ‘현대문학’으로 등단. 2018년 시집 ‘비금속 소년’ 출간.
  • 초록을 흠향하고

    초록을 흠향하고

       다들 집 밖으로 나가지 말자고 하였으나  문 없는 집은 없어서  나의 집이 먼저 나를 이끌고 외출하였다    집은 송장나무*를 찾아가 송장같이 지내는 법을 묻는다  꽃잎은 왜 아래만 바라보는 걸까?  개미는 왜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되돌아갈까?    나만 이러는 게 아니라서  비오는 날 우산을 챙긴 사람처럼 좋았다  굽 높은 신에도 바짓단이 젖고    얼굴을 들면 세상이 물에 잠겼다    약(藥)이 된다는 말을 좋아했다  서로의 반대쪽 손등을 부딪히며 걷는 일은  나도 아는 걸 너도 안다는 뜻이어서  말하지 않아도 숨이 차올랐다 우리는  기차에서 내려 죽은 노루를 본 우리는  “치워주고 갈까?”  아직 남아있는 온기를 치우며 슬퍼하고 있다고 믿는 우리는  나에게서 너를 구하려고 멀어질 때가 있었다    멀리서 사랑하는 일은  비처럼 그친다지  “빗소리 들려?”    멈추지 못하는 호흡들, 헉, 헉, 발밑의 집들이 보인다  지붕, 지붕, 지붕, 없는 것들이 꿈틀거렸다  우리는 초록을 흠향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상산나무 ■ 이소연 시인은 1983년 경북 포항 출생.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
  • 손과 입술

    손과 입술

    아플지도 모르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거리에서 마스크 끼고 입을 맞추는 어른들을 봤다. 생일파티에 가고 싶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균들을 피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정말 재미있을 텐데. 생일파티가 아니라 위로파티여도 좋겠다. 마스크를 쓰고 너는 창 안에서, 나는 창 밖에서 박수를 쳐줘도 좋겠다. 케이크를 자르고 장갑을 낀 채 접시에 옮겨 담아도 좋겠다. 아기의 몸 속에도 들어갈 만큼의 작은 병균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아주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필요하겠다. 주사를 맞고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서는 사탕이 필요하겠다. 아기가 운다. 엄마는 아기를 아기라고 부르는 나를 보며 웃었다. 의사 선생님은 마스크와 장갑을 끼고 아기 손에 사탕을 쥐어줬다. 마스크를 끼지 않고도 사탕을 주는 날이 올까요? 사탕을 직접 입에 넣어주는 날도 올까요? 밖에 다녀온 어른들이 꼬박꼬박 손을 씻는 날도 오겠죠? 언제쯤 아기에게 뽀뽀해도 괜찮을까요? 궁금한 게 많아서 머리가 이렇게 무겁냐고 무릎베개를 해주며 엄마가 물었을 때가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병균은 없어. 대답했을 때 엄마는 병균이 있어도 나를 사랑할 거라고 했다. 아기는 누군가 사랑하면 생긴다던데, 그렇다면 바이러스도 누가
  • 위로는 위로가 안 돼

    위로는 위로가 안 돼

    암이 전이되었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가만히 눈을 감고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다 위로할 방법이 없어 입을 닫고 있다가 미스터 트롯을 틀어 드렸다 아버지께서 웃으셨다 위로는 윗사람에게 어떻게 하는 거지 받는 사람은 받기만 해서 모른다 실연당한 친구는 자꾸 울기만 했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아서 소고기를 사주었다 먹다가 다시 울먹이며 친구가 말했다 이렇게 슬픈데 고기는 왜 맛있냐 마음을 다해도 위로가 안 돼 어떤 충고는 고충이 된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거든 말없이 소고기를 사거나 세상을 위한 밧줄이나 될 것 정말 말로는 안 되는 게 있다 어떤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무얼 하지 사실 무얼 해도 안 돼 하지 마 행복 추구권 말고 항복 추구권 이것은 파이트가 아니다 일방적 구타지 희망 고문이지 게임이 안 돼 게임이 현실에서 안 되니 게임이라도 하지 게임하는 애들 괴롭히지 마라 나비처럼 벌어서 벌처럼 쓴다 그래도 집은 못 사 그래서 아이를 못 낳아 네 아이의 친구를 앗아갈 거야 위로가 안 되니 위로 한마디 하는 거지 뭐 위로는 아래로 해야지 세계를 미워할 거면 날카롭게 미워하자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 선에서 우리 국민 하고 싶은 거 다 해 뿌리 깊은 나무는 바
  • 기다리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 그럴 때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먹고살 궁리 같은 건 흘려보냈다 어떤 사랑은 마른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내는 늦은 밤이고 아픈 등을 주무르면 거기 말고 하며 뒤척이는 늦은 밤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것은 고작 설거지 따위였다 그사이 곰팡이가 슬었고 주말 동안 개수대에 쌓인 컵과 그릇 등을 씻어 정리했다 멀쩡해 보여도 이 집에는 곰팡이가 떠다녔다 넓은 집에 살면 베란다에 화분도 여러 개 놓고 고양이도 강아지도 키우고 싶다고 그러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하고 몇 년은 성실히 일해야 하는데 씀씀이를 줄이고 저축도 해야 하는데 우리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키스를 하다가도 우리는 이런 생각에 빠졌다 그만할까 새벽이면 윗집에서 세탁기 소리가 났다 온종일 일하니까 빨래할 시간도 없었을 거야 출근할 때 양말이 없으면 곤란하잖아 원통이 빠르게 회전하고 물 흐르고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암벽을 오르던 사람도 중간에 맥이 풀어지면
  • 달콤한 우리

    달콤한 우리

    달콤한 우리 내 이름으로 부르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 당신의 이름으로 부르면 당신만 오는 것 같다 우리라고 부르면 나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어서 어리둥절하지만 눈물이 조금 맺혀 있을 것 같아서 슬프지만 외롭지 않은 먼 길 혼자 자신을 껴안으며 걸어가는 길 혼자 걸어가면서 모두와 함께 걷는 길 조금 멀리가 더 가까운으로 변하는 시간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계절을 기다리며 나 당신 우리 서로 새로워져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서로 너무 가까워져 눈을 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꽃이 피고 꽃이 질 때 봄입니다 꽃이 피고 꽃이 질 때 눈이 날립니다 멀리에서 서로를 바라본 적 없는 나 당신 그리고 우리 우리는 달콤해지고 있습니다 뚜렷하게 달콤해지고 있습니다 ■안주철 시인은 1975년 강원 원주 출생. 2002년 ‘창작과 비평’으로 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 시집 ‘다음 생에 할 일들’ 출간.
  • 중매

    중매

    집에서 꼼짝 말라는 기저 질환자가 된 내게 여수에서도 배 타고 두어 시간 가야 당도하는 머나먼 섬, 거문도 수협 중매인 35호 수산 최형란이 생선을 좀 보낸대서 대구 사는 후배들 주소 몇 찍어주었는디 고향 바다 건너 뭍으로 간 간고등어 토막고등어들이 우짜면 이리 푸짐하고 정갈하노, 억세게 칭찬받아가며 노모께 몇 손 가고 친구들에게도 두세 마리씩 이사 갔다고 백신 한 보따리 받았으니 잘 묵고 더 힘내겠다고 김밥 싸고 배달하는 김병호가 우리 동네 이웃들 나무들과 고라니와 별들에게까지 안부를 전해왔는디 사흘 후 최형란이 부녀회에서 생선 좀 보태기로 했다고 십시일반 모은다는 게 큰 박스 8개가 만들어졌다는디 나흘 후 배 가른 갈치 통갈치 키 크고 덩치 좋고 인물 훤한 삼치들이 꼼짝없이 갇힌 쪽방 사는 어른들과 의료진들 먹일 김밥 싸고 있는 대구 바보주막에 당도했다는디 엄청시리 왔어요… 이 은혜를 우짠다요… 농갈라묵고 또 농갈라묵었다고 농갈라묵은 김채원이도 중매인 최형란이도 울컥했다고 얼떨결에 중매쟁이 된 내도 덩달아 울컥하는디 오병이어가 별 긴가, 갈라묵고 살믄 살아지는기라, ■김해자 시인은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 마스크와 보낸 한철 -코로나19를 견뎌내며

    마스크와 보낸 한철 -코로나19를 견뎌내며

    현실 문제 앞에서 시는 공허한 울림일까요. 힘들고 외로울 때 시집을 열어 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위로가 되는 시의 본령을 알고 있는 겁니다. 오늘부터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시는 위로다’에서 그 본질을 전합니다. 코로나19로 지치고 힘든 독자 여러분께 이 시대의 시인들이 재능 기부로 위로를 건넵니다. 살다 살다 그깟 마스크를 사려고 약국 앞에 줄을 설 줄이야 그래도 고맙다 신통한 부적처럼 우환을 막아 줘서 고맙고 속이 다 내비치는 안면을 가려 줘서 고맙고 세수를 안 해도 사람들이 모르니까 더 고맙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육이오 동란까지 겪고 또 겪고 살다 살다 마스크 대란이 올 줄이야 저들은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없는 벌레군단 국경도 인종도 가리지 않는 인류 침공에 어벤저스 슈퍼 히어로들도 속수무책인데 귓바퀴가 없으면 걸 데도 없는 저 손바닥만 한 천 조각들이 지구를 구할 줄이야 모든 화는 입으로 들어온다기에 쓸데없는 말 안 하고 나를 아끼고 남을 존중하며 마스크와 한철 보내고 나니까 아무래도 내가 좀 커진 것 같다 나라도 이전의 나라는 아닌 것 같다 ■이상국 시인은 1946년 강원 양양. 1976년 ‘겨울추상화’로 등단. 시집 ‘달은 아직 그 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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