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길] 양림동 10대째 토박이 차종순 호남신학대 총장

[도시와 길] 양림동 10대째 토박이 차종순 호남신학대 총장

입력 2010-05-10 00:00
수정 2010-05-10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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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초에 병원·학교 등 둥지” “현대적의미의 인권의식 싹 틔워”

“양림동은 광주 근대화의 탯자리나 다름없습니다.”

이곳에서 10대째 살고 있는 차종순(62) 호남신학대 총장은 “지역의 모든 ‘길’에는 근대 역사 문화의 숨결이 배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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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종순 호남신학대 총장
차종순 호남신학대 총장


그는 ‘향토사학자’나 다름없을 정도로 동네의 옛 이야기를 줄줄이 꿰고 있는 토박이다. 애착도 그만큼 강하다.

개화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1882년 한·미통상조약이 이뤄진다. 이듬해에 민영익·홍영식·유길준 등은 ‘견미사절단’으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다. 이어 20세기 초반까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몰려들어 온다. 이들이 처음 자리잡은 곳이 불모지나 다름없던 양림산 자락이다. 이들은 1905~1910년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과 수피아여고·숭일고·고아원 등을 짓고, 선진 농업기술 보급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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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산 정상에 자리한 선교사 묘지. 개화기 때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숨진 22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묻혀 있다.
양림산 정상에 자리한 선교사 묘지. 개화기 때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숨진 22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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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민속자료 제1호인 이장우 가옥. 1899년 건축됐으며,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으로 이뤄졌다.
광주시 민속자료 제1호인 이장우 가옥. 1899년 건축됐으며,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으로 이뤄졌다.
“이때부터 한센병·결핵 등의 환자가 몰려들고, 하층민 자녀들도 신식 학교에 입학했다.”는 차 총장은 “이는 단순한 빈민구제가 아니라 조선의 계급구조가 실질적으로 무너진 계기였다.”고 말했다. 현대적 의미의 인권의식이 싹튼 전환점이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1894년 갑오개혁이 신분제도를 철폐한 선언적 사건이라면 교육을 통한 평등의식 확산은 신식 학교의 몫이었다고 평가한다.

1920년대 초 이곳에서는 미곡 증산과 과수재배, 가축사육 기술이 집중 보급됐다. YMCA·YWCA 등도 설립됐다. 이를 중심으로 소작과 노동자 임금 투쟁, 공창제 반대, 금주운동 등을 주도한 사회단체가 탄생한다.

차 총장은 “1945~1948년 미군정기에는 수피아여고의 일부 시설물이 사병들의 숙소로 사용됐고, 6·25전쟁 때는 미국인 거주지라서 폭격을 피할 수 있다고 판단한 북한군이 같은 시설에 주둔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 일대는 근대화로 가는 모든 길의 시작점이나 다름없다.”며 “지금은 이런 자산을 활용할 때가 왔다.”고 역설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2010-05-1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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