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 [길섶에서] 쌈짓돈과 비자금

    [길섶에서] 쌈짓돈과 비자금

    얼마 전 만난 선배 한 분이 “아내 눈치를 보지 않고 ‘슬기로운 은퇴생활’을 하려면 ‘작은 주머니’ 하나는 따로 챙겨 놓는 게 좋다”고 했다. 부인 몰래 쌈짓돈을 모아 일종의 비자금을 만들어 놔야 운신이 편하다는 것. 또 다른 선배는 회사에서 간간이 받는 소액의 인센티브를 조용히 별도 계좌에 넣어 오다가 부인에게 들켜 가벼운 핀잔을 들었단다.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1심 때 665억원이었던 재산분할액이 항소심에서 1조 3808억원으로 커진 결정적 계기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이다. 300억원이 최 회장의 부친인 최종현 선대회장에게 흘러가 SK가 급성장할 수 있었다는 게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이다. 최 회장이 일부일처제를 존중하지 않았다고 꾸짖은 재판부에 대해 “속이 시원하다”는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노태우 비자금’의 SK 유입이 사실인지, 불법비자금을 종잣돈 삼아 맺어진 열매가 노 관장에게 귀속되는 게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박성원 논설위원
  • [길섶에서] 지방과 ‘뚜벅이’

    [길섶에서] 지방과 ‘뚜벅이’

    고향 친구들과 버스로 주왕산을 다녀왔다. 동서울터미널과 경북 주왕산터미널을 오가는 고속버스는 하루 세 편. 오전에 출발해 정오 지나 도착, 등산하고는 숙소로 가는 길에 소형 버스를 탔다. “교통카드 어디다 찍어요”라고 묻자 운전기사가 당황했다. 짧은 침묵 뒤에 나온 답은 “무료인데요.”(청송군 군내버스는 2023년 1월부터 무료였다.) 목적지 인근 정류장을 묻는 우리들 질문에 기사뿐만 아니라 승객들은 다양한 대안을 줬다. 그 덕에 주왕산터미널과 숙소 사잇길이 친숙해졌다. 자가용으로 여행 갔다면 주차장에 차 세우고, 등산하고, 밥 먹고 서울로 돌아왔을 거다. 숙박을 했더라도 주민들과의 대화는 식당에서 주문할 때뿐이었겠지. 편했겠지만 추억은 단순했을 거다. ‘뚜벅이 여행’이 자가용 여행보다 재미가 더 쏠쏠하다. 사람이 줄어들어 ‘생활인구’까지 거론되는 시대에 뚜벅이 여행이 지방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서울 촌놈 촌녀’들의 뚜벅이 여행이 많아지면 좋겠다. 전경하 논설위원
  • [길섶에서] 용미리석불을 지나며

    [길섶에서] 용미리석불을 지나며

    남한산성을 처음 찾았을 때다. 산성리에서 차를 내리면 인조가 병자호란 당시 송파로 항복하러 나섰다는 우익문을 따라 오르게 된다. 관측을 겸한 지휘소였다는 수어장대에 이르자 성남 일대가 환하게 펼쳐졌다. 하지만 청나라 군사가 몰려왔을 송파 방향은 키 큰 나무로 가로막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중요한 문화유산 현장의 역사성이 뭔가 흐려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주말 냉면집을 찾아가는 길에 파주 혜음로에서도 그랬다. 파주에 살고 있는 만큼 용미리석불입상이 있는 옛 의주대로의 일부를 종종 지나게 된다. 그런데 창밖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석불입상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몇 해 전만 해도 큰길에서 석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는데 그새 수풀이 더욱 우거졌나 보다. 이 길을 지나는 이들의 안전을 염원하는 아름다운 배려가 담겨 있는 문화유산이다.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나뭇가지를 조금만 정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자연유산에는 실례가 될까.
  • [길섶에서] H마트의 추억

    [길섶에서] H마트의 추억

    영국 런던에서 해외 연수를 한 지도 어언 7년이 다 돼 간다. 당시 가장 고역이었던 건 역시 음식이었다. 런던 한복판에 있는 한식당은 무척 비싸 자주 갈 형편이 안 됐다. 미국에서 시작된 한국계 유통기업 H마트가 소규모로 몇 군데 있긴 했는데, 제대로 된 식재료를 사려면 런던 외곽의 뉴몰덴이라는 한인타운 근처의 대형 H마트까지 가야 했다. 기차를 타고 20여분, 걸어서 다시 15분을 가야 하는 장거리 코스였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대형 H마트엔 한국 마트처럼 없는 게 없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K팝을 넘어 K푸드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요즈음 오랜만에 H마트 소식이 들렸다. 지난해 미국에서 신라면이 5억개 넘게 팔렸다는데 미국 뉴욕타임스가 ‘K라면 신드롬’의 산실로 한국계 유통기업 ‘H마트’를 지목했단다. 해외 유학생들에게 한식의 그리움을 잊게 해주는 단비 같은 존재였던 H마트가 이젠 현지인들의 입맛까지 바꿨다는 소식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 [길섶에서] 내시경의 위약 효과

    [길섶에서] 내시경의 위약 효과

    90대 중반인 어머니가 얼마 전 복통이 심해 한밤중에 응급실에 가셨다. 낮에 노인보호센터에서 입맛에 맞는 음식이 나오자 과식한 게 탈이 났던 것. 주사약과 수액을 맞았음에도 통증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혈액검사와 CT 촬영까지 했다. 병원에선 염증 수치만 높게 나올 뿐 특별한 이상은 안 보인다면서도 복통이 가라앉지 않자 입원을 권했다. 어머니는 위장에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위내시경 검사를 받게 해 달라고 하셨다. 의사는 너무 고령이시라 위험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수면마취도 부담스럽고 위벽이 얇아 자칫 천공의 위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입원 중에도 어머니가 계속 내시경을 받겠다고 고집하시자 결국 수면내시경을 시행했다. 어머니는 다행히 무사히 깨어나셨다. 의사는 단순 위염 외엔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부터 어머니의 복통이 싹 가셨다. 뭔가 단단히 고장났을 것이란 생각이 강해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던 듯싶다. 내시경 검사가 ‘위약효과’라도 발휘한 모양이다. 임창용 논설위원
  • [길섶에서] 사라진 산부인과

    [길섶에서] 사라진 산부인과

    언니가 키우는 늙은 개가 백내장을 앓고 있다. 까맣던 눈동자에 뿌옇게 안개가 꼈다. 꼬리 치며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은 이제 볼 수 없다. 동물병원 가운데 백내장 수술을 할 수 있는 곳은 극소수다. 수술비는 300만원에서 500만원 정도. 14살이나 되는 노견에게 선뜻 쓰기에는 큰돈이다. 수의과로 유명한 대학동물병원을 찾아가려니 초진만 하는 데 40만원을 내란다. 병치레가 잦은 연로하신 엄마 눈치에 언니는 일단 개 유모차를 샀지만 여전히 고민 중이다. 내 아이를 낳았던 산부인과는 한참 전에 사라졌다. 두 명의 의사가 제법 규모 있게 운영하던 병원이었는데 자리를 옮겨 분만은 빼고 여성과 진료만 하면서 비만, 피부미용 관리를 병행한다. 저출산 여파로만 생각했는데 최근 기사에서 더 정확한 이유를 알았다. 분만 한 건당 병원이 받는 돈이 40만원 남짓. 새 생명 탄생에 들어가는 의료 인프라와 인력이 상당한데 분만 수가가 강아지 백내장 진료비 정도라니. 개와 사람, 누굴 치료할까. 답은 뻔하다.
  • [길섶에서] 저녁 그늘 아래

    [길섶에서] 저녁 그늘 아래

    깊어지는 유월을 잔양으로 알아챈다. 해 질 무렵의 볕이 날마다 더 길게 꼬리를 문다. 그늘 아래 앉아 나 혼자 아는 방식으로 해가 넘어가는 속도를 잰다. 어느 가을인가 수수밭 너머로 해가 지는 속도를 어림한 적 있지. 분속 수숫대 한 마디쯤이었나. 손바닥을 멀리 펴서 태양의 이력을 재 본다. 오늘은 분속 손가락 두 마디쯤. 이렇게 마음대로. 덜 자란 느티나무가 종일 꼭 움켜쥐었던 그늘을 조용히 풀어놓는 시간. 성글게 그늘을 흔드는 나무 아래서 눈금도 없이 줄자도 없이 저울도 없이 주먹구구로 흘러가는 저녁 한때를 좋아한다. 이태백이었던가 소동파였던가. 일 없이 고요히 앉았으면 하루가 그대로 이틀이 된다고 했던 옛 시인의 말이 그늘 아래 구른다. 천년 전의 그 농담을 전부 믿어 버릴 것만 같다. 이런 저녁 나무 아래에서는. 헐렁한 옷을 입고 헐렁한 신발을 신고 헐렁하게 춤을 추는 나무 그늘 아래. 헐렁해지는 말들을 중얼거린다. 뜻대로, 멋대로, 되는 대로. 조금 아무렇게나.
  • [길섶에서] 최고의 선물

    [길섶에서] 최고의 선물

    주말 지인들과 저녁 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갔다. 조그만 선물 보따리를 들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플랫폼 의자에서 5분여 기다리며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지하철이 들어와 후다닥 올라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야 보따리를 두고 온 사실을 깨달았다. 지하철 유실물 센터에 전화를 했지만 평일만 운용하는 전화다. 고객 센터로 연결됐으나 전화가 폭주하는지 상담원과 좀처럼 통화가 되질 않았다. 누가 들고 갔으면 잃어버린 거고, 유실물 센터에 접수가 됐으면 나중에 찾으면 되겠지 하고 편하게 식사를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보따리를 두고 온 역에 들렀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3시간쯤 지났는데도 보따리가 그대로 있다. 젊은이들이 유독 많은 지하철역이다. 주말이니 오죽했으랴. 마침 역 구내에 있던 환경미화원에게 말을 붙였더니 “요샌 유실물을 잘 안 가져간다”고 한다. 소중한 선물 꾸러미와 다시 만난 감격은 그날 최고의 선물이었다.
  • [길섶에서] ‘삑~ 삑~ 삑’

    [길섶에서] ‘삑~ 삑~ 삑’

    ‘삑~ 삑~ 삑.’ 사람이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할 때 나오는 기계음이다. 활기찬 하루를 시작할 때는 힘찬 행진곡으로, 고단한 몸으로 퇴근할 때는 듣기 싫은 잡음으로 다가온다. ‘지공거사(地空居士).’ 만 65세가 넘어 전국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도 직장인처럼 이런 소리를 만든다. 서울교통공사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노인이 경로우대 카드를 태그하면 “행복하세요”라는 안내음으로 맞았다. 어르신을 공경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무료 승객티를 낸다는 노인들의 불만 제기에 지난 8일부터 ‘삑~삑~삑’ 소리 안내로 바꿨다. ‘삑’ 소리를 한 번 내는 유료 승객과 달리 이 소리를 세 번 나오도록 한 건 부정사용 방지 차원이란다. 서울과 달리 부산 지하철에서는 “감사합니다”로 어르신을 모신다. 노인의 자존감과 자긍심도 챙기고 무임승차로 인한 교통공사 적자도 해소할 지하철 이용정책을 고민해 본다. 그 첫걸음으로 ‘삑~ 삑~ 삑’ 소리가 들리면 가볍게 인사부터 해 보련다. 박현갑 논설위원
  • [길섶에서] 저음(低音) 안개

    [길섶에서] 저음(低音) 안개

    새벽 올림픽대로에 안개가 끼었다. 라디오에선 ‘안개’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원곡은 1967년 가수 정훈희의 데뷔곡이다. 요즘 방송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안개’는 영화 ‘헤어질 결심’(2022년)에 OST로 삽입된 곡이다. 박해일과 탕웨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영화의 엔딩크레디트에 깔렸는데 정훈희와 송창식이 듀엣으로 불렀다. 유튜브로 듣다 보면 은근 중독성이 느껴진다. 약간 저음에다 살짝 어긋나는 듯한 두 가수의 음성이 영화 속 남녀의 엇나간 사랑을 말해 주는 듯하다. 안개는 저음이다. 불안정해서 가슴 시리다, 이런 상념을 하다 보니 차창 밖으로 안개에 싸인 국회가 지나간다. 22대 국회가 개원(開院)을 했지만 원구성을 둘러싼 여야 힘겨루기에 듣도 보도 못한 입법 논란으로 쇳소리만 요란한 그곳.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안개’의 마지막 소절이다. 길에 깔린 안개는 햇볕이 나면 사라진다. 국회를 둘러싼 ‘안개정국’은 언제 걷히고 국민의 눈물은 언제 닦아줄 수 있으려나.
  • [길섶에서] 할인 행사의 그늘

    [길섶에서] 할인 행사의 그늘

    고물가로 어려움을 겪는 소비자들을 돕는다며 ‘1+1’, ‘창고 대방출’ 등 할인 행사가 잦아졌다. 온라인으로 필요한 물건을 한꺼번에 사 두는 편이라 생활필수품이나 오래 보관이 가능한 음식물은 행사가 있을 때만 사서 쟁여 둔다. 쟁여 둘 공간이 있어서 다행이다. 행여 급하게 필요하면 딱 하나만 오프라인으로 산다. 이런 경험이 쌓여 물건을 여러 개 사야 할 때 ‘정상가’를 보면 망설여진다. 며칠 기다리면 행사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 한켠에서는 ‘할인가가 제대로 된 가격’이라는 묘한 반감도 생긴다. 미끼 상품이라도 유통업체가 가격을 그렇게 정한 데는 까닭이 있을 테니. 농민단체들이 지난달 정부의 농수산물 유통구조 개선 방안에 유통 비용의 절반인 소매 비용에 대한 개선책도, 산지 여건에 대한 고민도 없다는 단체 성명을 냈다. 이 주장이 농수산물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비축물량 방출, 할당관세 적용 등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체감이 낮은 이유일 게다.
  • [길섶에서] 소설을 읽으며

    [길섶에서] 소설을 읽으며

    오래 전 제법 유명세를 떨치는 작가가 일종의 판타지 소설을 펴냈는데 읽다 보니 필자를 연상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작가와 러시아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작품을 쓰며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작중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키로프발레단 여성 무용수를 친구로 둔 능력 있는 인물로 격상시켰으니 고맙다”는 농반진반 인사를 건넸던 기억이 난다. 학교를 같이 다녔지만 나이는 많아 형님으로 모시는 소설가도 있다. 대학교수를 하다 은퇴한 이후 창작에 몰두한다더니 며칠 전 가야 역사를 다룬 연작소설집을 보내왔다.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던 주인공은 광고회사를 거쳐 역사 관련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직장생활을 광고회사에서 시작해 역사·문화유산 담당 기자로 오래 일한 내 개인적 감회가 더해져 재미나게 읽었다. 갈수록 여기저기서 닮은꼴이 늘어난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그만큼 이런저런 경험도 많아졌기 때문일까.
  • [길섶에서] 출생의 순간

    [길섶에서] 출생의 순간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휴대전화에 올라온 기분 좋은 추억 사진에 남몰래 웃음 짓는 순간 말이다. 며칠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큰딸의 출생 장면을 찍어 놓은 비디오 영상을 우연히 발견하면서다. 당시 병원에서 딸애가 태어나자마자 ‘캥거루 케어’를 하는 약 20분간의 장면을 찍어 놓은 영상이었다. 캥거루 케어는 부모가 맨가슴으로 아기의 살을 맞대고 안는 돌봄 방식이다. 아기가 엄마의 체온을 느끼고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세상을 맞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영상 속의 나는 아기를 보면서도 그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얼떨떨한 표정이긴 했지만, 살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부모가 함께 아기를 낳고 돌보는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다. 백약이 무효인 저출산과 비혼풍조, 딩크족(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의 유행 등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무엇보다 이런 값진 경험을 하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세태가 안타깝다. 황비웅 논설위원
  • [길섶에서] 아파트 급식

    [길섶에서] 아파트 급식

    친척 한 분이 뜬금없이 밥 주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겠다고 한다. 60대 중반의 독신인 그는 “끼니 차려 먹는 게 부담스럽다”며 “차려 주는 밥이 먹고 싶다”고 했다. 처음 들어 보는 소리에 그런 아파트가 어딨냐고 물으니 요즘 많이 생기고 있단다. 옆에 있던 아내가 자신도 며칠 전 친구 아파트에 놀러 가서 급식을 먹은 적이 있다며 장단을 맞춘다. 새로 들어서는 고가의 대단지 아파트들을 중심으로 공동급식 시스템을 갖춘 단지들이 제법 있는 모양이다. 이미 서울 강남·서초구 등의 10여개 단지에선 유명 케이터링 업체들이 입점해 급식을 하는데 만족도가 높다고 한다. 단지마다 차이가 있지만 7000원 안팎의 다양한 메뉴를 선택할 수 있다. 친척분에게 “실버타운에 가면 더 양질의 서비스를 받지 않느냐”고 하자 가격도 비싸고 노인들만 모여 있어 분위기가 처져서 싫다고 했다. 맞벌이 부부나 고령자들에게 매력적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파트 인근 식당들은 더 어려워지겠다는 오지랖이 발동하는 건 어쩔 수 없다.
  • [길섶에서] 폐지 줍는 노인

    [길섶에서] 폐지 줍는 노인

    골목길에서 폐지 줍는 노인들을 종종 본다. 힘겹게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은 짠한 마음을 일으킨다. 형편이 어려운 자식들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한 푼이라도 내 손으로 벌자 하고 밖으로 나온 어르신이 대부분일 것이다. 노년 돈벌이가 폐지 줍기 외에 딱히 없다. 지난해 서울 폐지 수집 노인 실태조사를 보면 2400여명 정도가 월평균 15만원 정도를 번다고 한다. 폐지 줍는 노인은 ‘노인 빈곤’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은퇴한 친구 아버지가 폐지 수집을 시작했다. 용돈을 드리는데 연로한 아버지가 폐지를 모은다고 해 펄쩍 뛰었는데 종일 빈둥거리기보다 ‘목표 있는 동네산책’이라도 하겠다니 막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는 폐지 줍는 노인에 대한 편견을 덜어 낸다. 꾸준히 움직여 근력을 유지하기 때문에 건강한 노년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에 따르면 집에만 머물며 가족의 떠받듦을 받는 노인일수록 치매에 걸리기 쉽다.
  • [길섶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이

    [길섶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이

    아파트 뒤편 누군가의 작은 텃밭에는 없는 게 없다. 고추 모종이 깃대처럼 꽂히더니 들깨, 그 사이로 상추, 그 사이로 부추. 에라 모르겠다, 방울토마토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어지는 사오월 내내 웃음이 났다. 오늘은 걸음을 멈췄다. 텅 비었던 이랑에서 토란 잎싹들이 목을 쑥 빼올렸다. 몇 뼘씩 떨어져 다문다문. 텃밭 주인은 다 자란 토란잎들이 장우산만 하게 펼쳐질 때를 미리 계산해 심었다. 여름 비바람에 모로 누울 때는 서로 기댈 수 있게, 저녁 바람에는 솥뚜껑만 한 잎이 크게 원을 그리며 혼자 춤출 수 있게.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이는 토란과 토란 사이라고 나는 말할 뻔했다. 바깥의 소란에 마음이 자꾸 헐벗겨질 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알맞은 거리가 몇 미터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토란대 사이로 바람이 나들고 햇볕이 나드는 길을 오래 보고 앉아 있어야지. 아, 토란잎들이 춤을 추는 칠팔월을 기다려야지. 황수정 수석논설위원
  • [길섶에서] 민원

    [길섶에서] 민원

    이전에 없던 알림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다. 주민들의 생활민원을 받아 입주자대표회의를 거치고 처리 방향을 정한 뒤 결과를 알리는 공지문이다. 천장에서 물이 새니 윗집에 조치를 해 달라, 목줄을 하지 않은 개가 있다는 민원부터 나뭇가지가 집 앞을 가리니 쳐 달라는 요구까지 다양하다. 상당수 있을 법한 민원이고 당연히 해결돼야 마땅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더러 있어 보인다. ‘주차장에 세차를 하지 않은 차가 있어서 불쾌하다’라든가, ‘음식물 쓰레기가 비치는 투명 비밀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민원들이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지저분한 차량의 소유주에게 주민들의 불쾌감을 알렸다든가, 안 비치는 비닐 사용을 권고했다고 친절히 조치 결과를 알린다. 수백 가구면 1000명 이상은 거주하는 게 아파트 단지인지라 각종 민원이 있겠다 싶다.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불쾌감을 공공의 영역으로 끄집어내서 해결해 달라는 것은 지나친 게 아닌가 싶다. 황성기 논설위원
  • [길섶에서] 신선대에서

    [길섶에서] 신선대에서

    도봉산을 올랐다.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분소에서 출발해 마당바위를 거쳐 신선대 정상을 밟았다. 중간중간 휴식하며 체력을 비축했건만 정상에 다가갈수록 거친 돌밭을 걷고 가파른 암벽을 쇠줄을 끌어당기며 오르는 여정이어서 땀방울이 절로 맺혔다. 하산하던 한 등산객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정상에 휴대전화를 놓고 왔더라도 찾으러 가지 않겠노라는 우스갯소리를 한다. 신선대에서 바라본 풍경은 말 그대로 신선이 즐길 만큼 절경이다. 특히 자운봉이 경이롭다. 아래에서 볼 때는 그냥 바윗덩어리였는데 가까이서 보니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이 테트리스 블록처럼 차곡차곡 쌓인 게 감탄을 자아낸다. 기대한 자줏빛은 보이지 않지만, 등산객 마음은 보라색으로 물든다. 만장봉의 가파른 암벽을 오르는 등산객의 모습에는 절로 침을 삼키게 된다. 요즘 자연과 연애하는 기분이다. 자연에서 겸손을 배우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담소도 나누니 산행만큼 좋은 게 없다. 다음 데이트 코스는 어디로 할까.
  • [길섶에서] 직구한 붓

    [길섶에서] 직구한 붓

    며칠 전 중국 유통 플랫폼으로 직구한 가족의 붓이 도착했다. 가격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싸서 놀랐다. 인체와 건강에는 문제가 없을지 불안한 생각도 들었다. 최근 국가통합인증마크(KC) 없는 80개 품목의 해외직구 금지 조치가 소비자 반발로 사흘 만에 백지화된 것을 보면서 든 생각이기도 하다. 유통 국경이 없어진 판에 무슨 흥선대원군식 쇄국정책이냐는 소비자들 불만에 놀란 정부가 단박에 물러섰다. 인증마크 의무화 조치는 아이들 장난감 등 해외직구 제품에서 발암물질 등 유해성분이 검출된 데 따른 국민 건강권 보호라는 명분이 없지 않았다. 저가 직구품에 국내 유통·중소기업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책이 너무 거칠고 졸속이라는 게 문제였다.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제품의 안전성 검증 강화 등 보다 섬세한 소비자 보호 정책을 내놓으면 좋겠다. 국내 제조·유통업의 경쟁력이 강화된다면 직구 열풍도 좀 잦아들지 않을까.
  • [길섶에서] 실종 문자

    [길섶에서] 실종 문자

    얼마 전 치매를 앓는 부친을 모시는 지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고충이 크겠다고 하니 아버지의 어진 성품이 달라지지 않아 큰 어려움은 없다고 한다. 그래도 한 가지 고충이 있는데 간혹 말씀 없이 집 밖에 나가셨을 때란다. 대체로 집을 잘 찾아오시긴 하는데 최근 들어 두어 번 길을 잃으신 적이 있어서다. 한번은 나가신 지 두 시간이 지나도록 들어오시질 않아 온 식구가 나가 동네를 샅샅이 뒤져 한 나절 만에 찾은 적도 있다고 했다. 지난달에도 비슷한 사태가 발생해 119에 실종신고를 해 신고 1시간 만에 찾았다고 한다. 관할 지방자치단체가 띄운 실종 문자를 본 주민이 바로 부친을 알아보고 연락해 왔다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뜨는 실종 문자를 귀찮아한 나로선 뜨끔할밖에. 알고 보니 2021년 실종 문자 도입 이후 실종 아동 발견 시간이 10분의1로 단축됐다고 한다. 지인의 얘기를 듣고부터는 실종 문자를 볼 때마다 치매 부모나 아이를 찾는 가족의 애타는 마음이 진하게 느껴진다. 임창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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