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오강호’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의 작가, 아니 1980년대 중반 중·고등학교를 다닌 세대에게는 ‘영웅문’으로 더 잘 알려진 작가 진융(金庸)이 지난달 30일 세상을 떠났다. ‘영웅문’으로 칭했으니 작가 이름도 진융이 아니라 김용으로 하는 게 좋겠다. 김용은 앞서 열거한 시리즈 외에도 ‘천룡팔부’, ‘소오강호’, ‘녹정기’ 등으로 전 세계 독자를 사로잡았다. 공식 집계된 것만 1억 부가 넘게 팔렸는데, 한국어는 물론 영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태국어·일본어·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로 그의 작품들이 번역되었다. 영화로 그의 작품을 본 이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이쯤 되면 영향력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하다.김용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소오강호’(笑傲江湖)이다. 제목은 ‘강호를 비웃다’, 더 적극적으로는 ‘강호의 패권 싸움을 손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비록 작품을 읽지 않았다 해도 이제 중년을 향해 달려가는 세대에게 익숙한 이름(혹은 영화 제목)이 등장한다. 한때 한국에서도 꽤 인기가 있었던 홍콩 배우 임청하가 연기한 ‘동방불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임청하의 매력에 풍덩 빠졌던 세대에게 ‘동방불패’는 잊지 못할 추억의 영화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 ‘소오강호’의 주인공은 동방불패가 아니라 영호충이다. 동방불패는 이름도 찬란한 일월신교(日月神敎)의 교주로 ‘규화보전’이라는 비서(秘書)에 담긴 최강의 무공을 익힌, 가히 무림의 1인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소설에서는 나이 지긋한 여장 노인으로 등장하며 전 교주의 딸 임영영을 보살피는 인물인데, 비중은 미미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연걸과 임청하가 등장한 동명의 영화는 극적 재미를 위해 동방불패가 젊은 여성으로, 그것도 임영영의 정인인 영호충과 사랑에 빠지는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사실 ‘소오강호’는 하늘을 나는 등 세상에는 없을 것 같은 강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지만, 오늘 우리의 모습과도 진배없다.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도 추악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힘의 맛을 본 우리 시대의 권력자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신의를 생명과 같이 여긴다고 말하지만, 뒤에서는 칼을 가는 모습은 오늘 우리, 아니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김용의 ‘소오강호’를 비롯한 대개의 소설들은 무협지의 최고봉이면서, 현실을 성찰케 하는 가르침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2018-11-02 37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