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침묵/해도연 지음/그래티비북스/298쪽/1만 3000원
목성의 달 유로파의 풍경을 상상해 보자. 표면은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고 얼음층 아래에는 까마득히 깊은 바다가 있다. 심해에서는 열수분출공들이 끊임없이 뜨거운 물을 뿜어낸다. 그런데 만약 이 유로파의 열수분출공 주위에 달팽이를 닮은 외계 생물들이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다면 어떨까. 과학소설이 그려 내는 풍경은 때로 너무 이질적이어서, 마치 엘프나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 속의 아득히 먼 세계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하드 SF’라고 불리는 글을 쓰는 어떤 작가들은 현실의 과학 지식과 합리적 추론에 근거해 끈질기게 그 새로운 세계를 탐구한 다음, 능청스럽게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이 세계는 정말로 존재할 수도 있답니다. 아닐 수도 있지만.’‘위그드라실의 여신들’은 3명의 여성 과학자들이 목성의 위성 유로파에서 외계 문명을 발견하고 그 연구 결과를 통해 인류를 위기에서 구해 내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류를 구한다는 거창한 목적과 달리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시종 학술적이고 탐구적이다. 끊임없이 사건이 벌어지지만 유로파의 생태계를 관찰하고 분석하며 추론을 이어 가는 것 외의 일들은 그들에게 다소 부수적인 일로 여겨지는 듯하다.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인류를 구할 단서를 찾아내는 순간이 아닌, 유로파의 생태계를 만들어 낸 놀라운 현상을 발견하는 순간에 있다.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인류 지식의 최전선에 서 있는 과학자들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중편에서 과학적 정교함은 지식의 묘사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서술되는 ‘과정으로서의 과학’에도 잘 녹아 있다.
중력파 통신과 페르미 역설을 다룬 표제작 ‘위대한 침묵’, 의식과 자아 연속성에 대한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는 ‘따뜻한 세상을 위해’와 ‘마리 멜리에스’ 역시 현실에 반쯤 맞닿아 있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 낸다. 네 편의 작품 속에 녹아 있는 현실의 디테일을 짐작케 하는 풍부한 참고 문헌과 각주들도 흥미롭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그리고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 짓는 작가의 맺음말은 오히려 이 세계에 현실성을 더한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 세계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깜빡 속아 주는 순간, 당신도 유로파의 가장 멋진 ‘위그드라실’을 보게 될지 모른다.
2018-08-17 3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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