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 피해자 16명 생애 구술 방식으로 서술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1·2/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집필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 기획/푸른역사/314~320쪽/각권 1만 5000원정진성 연구팀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발견한 중국 윈난성 위안부 영상. 이는 조선인 위안부가 피사체로 잡힌 최초의 영상으로, 중국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는 조선 여성 7명의 모습이 담겨 있다.
푸른역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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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봄 대구에서 태어나 위안부로 끌려갔던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이다. ‘아버지가 길에 떨어진 보석을 줍는 꿈’을 꿔 이름이 ‘옥주’였던 귀한 딸은 영문도 모른 채 지옥을 경험해야만 했다. 문 할머니는 그렇게 북만주에서 1년을 지내고 외출 허가를 받아 가까스로 한국으로 도망쳤다. 1년 뒤 “일본군 식당에 일하러 가자”는 친구들을 따라 1942년 7월 마쓰모토라는 조선인 남자의 인솔을 받아 미얀마 랑군 만달레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군인은 그와 친구들을 보고 불쌍하다는 듯 말했다. “너희들 속아서 왔구나. 불쌍하게도. 너희는 잘못 안 거야. 여기는 ‘삐야’(위안소)야.” 울다 지쳐 잠든 밤이 밝자 군인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다테(‘방패’의 일본어) 8400부대’에 소속된 그녀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또다시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체험기가 포함된 전쟁 회상록 ‘끝나지 않은 해군’(1978). 2차 세계대전 때 해군 중위로 복무했던 나카소네 전 총리는 “3000명 이상의 대부대였다. 원주민 여자를 습격하거나 도박에 빠지는 사람도 나와 고심 끝에 위안소를 만들어 줬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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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위안부 할머니를 ‘나’로 내세워 생생한 경험을 여과 없이 전하는 구술 생애 방식으로 서술했다. 피해자의 증언에 사진과 관련 자료를 덧붙여 고통스러운 경험을 구체화했다.
연합군이 입수한 일본군의 암호문서. ‘최고기밀’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이 문서에는 위안소 운영을 위한 자금을 조선총독부 재무국에 요청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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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증언집이 피해 상황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뒀다면, 이번 기록은 피해자들이 끌려가고 귀환하는 과정, 귀환 이후의 삶까지 담았다.
각 위안부 피해자들의 이동·귀환 경로를 지도로 확정하면서 일본군이 운영한 위안소가 중국, 일본, 싱가포르, 미얀마 등 아시아·태평양 전 지역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걸 확증했다.
위안부 피해자 보상을 위한 일본 항의 방문에서 문옥주 할머니가 꽹과리를 치며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도보 행진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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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할머니는 “위안부 일을 알면서도 친구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친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최초로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후 공식적으로 등록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는 239명이다. 30일 안점순 할머니가 별세했다. 생존자는 29명이다. 지금이 바로 우리 앞에 서 있는 그들을 돌아볼 마지막 때임은 분명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2018-03-3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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