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중국식 룰렛’ 출간
도회적이고 세련된 감각으로 삶의 불온한 기미를 묘파해 온 은희경(57)만큼 등단 20년을 짜임새 있게 엮어온 작가도 드물다. 그런 그도 책상에 앉을 때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싸운다. “책상에 앉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재주 없고 심약한 나를 설득하는 일”이라면서.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그 ‘불확신’이 은희경 소설의 ‘원천’이다.은희경 작가.
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
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
그의 새 소설집 ‘중국식 룰렛’(창비)도 생동하는 호기심의 산물이다. 공들여 세공한 특유의 문장으로 그는 술, 옷, 수첩, 신발, 가방, 사진, 책, 음악 등 사물을 내세운 여섯 편의 이야기를 묶었다. 일상에서 숱하게 접하는 이 사물들은 결국 인간을 담아내고 인생을 반추해 주는 기제들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빈틈없는 비관주의자’라 정의했지만 이번 소설집에서는 ‘환한 자리’를 그림자처럼 남겨뒀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을 감싸 안는 부력’, ‘작고 하얀 빛의 웅덩이’다.
싱글몰트 위스키의 향이 코끝에 감도는 단편 ‘중국식 룰렛’에서는 ‘우리의 불운은 실은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고 넌지시 일러준다. 우리 인생에서 휘발한 운은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동안 증발한 2%의 양, 일명 ‘천사의 몫’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천사들은 술을 가리지 않아요. 모든 술에서 공평하게 2퍼센트를 마시죠. 사람의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게 있다면, 천사가 가져가는 2퍼센트 정도의 행운 아닐까요. 그 2퍼센트의 증발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군요.’(44쪽)
‘대용품’, ‘불연속선’ 등 이번 소설집에는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여기까지가 우리 자리’, ‘나는 누군가의 대용품’이라고 스스로의 운명에 한계를 긋는다. 이는 비겁한 안온함 대신 정면돌파가 낫다는 작가 내면의 변화에서 작동한 것이기도 하다.
“욕망해 봤자 어차피 패배할 테니 내 한계 안에서 내 규칙대로 살겠다는 이 인물들은 ‘이런 태도가 결국 뭘 줬느냐, 어중간한 고독밖에 주지 않았느냐’는 제 각성을 보여주는 인물들이에요. 세월호 참사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사회적으로도 내 목소리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 과거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너무 ‘자기 방어’ 속에서 살았다는 반성도 들었구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이야기에 희망을 남겨뒀구나 싶네요(웃음).”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사진 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
2016-07-0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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