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김정환 새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 ‘내 몸에 내려앉은 지명’ 나란히 출간
1980년대 ‘시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시인들이 나란히 새 시집을 냈다. 1979년 등단해 1980년대 스타 시인으로 군림한 최승자(64), 1980년에 데뷔해 단단한 서사를 품은 장시를 장기로 부려온 김정환(62) 시인이다. 이들은 문학으로 곁을 함께하면서 1980년대 출판사 홍성사에서도 같이 일한 오랜 지기다. 두 시인은 죽음의 이미지, 세계·문명에 대한 비애가 두드러지는 새 시집으로 ‘병든 시대에 대한 울화’를 드러냈다.최승자 시인
‘살았능가 살았능가/벽을 두드리는 소리/대답하라는 소리/살았능가 죽었능가/죽지도 않고 살아 있지도 않고/벽을 두드리는 소리만/대답하라는 소리만/살았능가 살았능가//삶은 무지근한 잠/오늘도 하늘의 시계는/흘러가지 않고 있네’(살았능가 살았능가)
‘내 존재의 빈 감방/푸른 하늘이 떠 있지 않나요/갇혀진 감방이 아니에요/바람으로 구름으로 통하는 감방이에요/그런데도 감방은 감방이로군요’(내 존재의 빈 감방)
‘세계 전체가 한 병동’(나의 생존 증명서는)이라는 최승자의 인식은 ‘세계가 늙고 세계의 언어가 늙는다’(보유(補遺): 발굴 바벨탑 토대)는 김정환의 비관과 맥이 닿아 있다.
김정환 시인
시집에는 ‘한 권의 시집이 한 편의 시로 여겨질’(김민정 시인) 만큼 한 호흡으로 써내려간 장시들이 묵직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시인은 세월호 참사를 압축한 장시 ‘물 지옥 무지개’의 참혹한 서사와 ‘우리가 당분간 유지할 것은 연민의 각도’(각도)라는 일갈은 ‘타인에 대한 감각’을 강조한다.
‘무지개 뜨지 않았다. 비가 내렸고 평소가 돌아왔다. 그래야겠지… 그런데 평소가 가장 음란한 포르노 같고, 가장 냄새나는 추문 같다.(중략) 무지개 떴다. 무지개 떴다. 여기가 물 지옥. 퉁퉁 불은 무지개 떴다.’(물 지옥 무지개)
‘우리가 사라지는 것도 모르고 사라질 수 있다./우리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사라질 수 있다./그건 차라리 낫겠지. 그때 사라지지도 못한/사람들 생각하면 생이, 잔존하는 생명이/끔찍 그 자체일 수 있다. 원전 노후,/그것은 괴물이 스스로 그러기 전에 자신을 폐해달라는 말.’(원전 노후)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6-06-27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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