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메달 실감 안 나요”… 첫 올림픽서 일낸 다크호스

“은메달 실감 안 나요”… 첫 올림픽서 일낸 다크호스

한재희 기자
입력 2018-02-19 23:26
수정 2018-02-20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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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민규 빙속 男500m ‘깜짝銀’

한체대 진학 후 쇼트트랙서 전향
소치 선발전서 발목 부상에 좌절
“뒷 선수 실수 기도했죠” 유머도

19일 평창동계올림픽 빙속 남자 500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차민규(25·동두천시청)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간간이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생애 첫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선수치고는 표정변화가 없었다. 불과 0.01초 차이로 금메달을 놓친 아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래 말수가 없고 표정 변화가 적다. 순탄치 않은 선수 생활을 견디고 평창에서 ‘차세대 빙속 스타’ 자리에 오른 덴 차분한 성격이 비결이었던 것이다.
차민규(왼쪽)가 19일 강원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확정한 뒤 금메달 주인공 호바르 로렌첸(가운데·노르웨이), 동메달을 딴 가오팅위(중국)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강릉 연합뉴스
차민규(왼쪽)가 19일 강원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에서 은메달을 확정한 뒤 금메달 주인공 호바르 로렌첸(가운데·노르웨이), 동메달을 딴 가오팅위(중국)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강릉 연합뉴스
차민규에게 선수 인생의 첫 굴곡은 대학교 때 생겼다. 쇼트트랙 선수였던 그는 2011년 한국체대에 진학하면서 담당 교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향했다. 순간 스피드가 빠른 장점을 극대화하려는 선택이었다. 몸싸움을 싫어하는 성향도 고려됐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스케이트화를 신기 시작해 쇼트트랙 유망주로 성장했지만 한순간 모두 내려놓은 것이다. 지금에서야 “(전향이) 신의 한 수였다”고 돌아보지만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4년 전에는 더 큰 어려움과 마주했다. 2014 소치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오른발목 인대를 크게 다쳤다. 올림픽 출전의 꿈이 날아간 것도 아쉬울 따름인데 완치되더라도 운동 능력을 회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청천벽력과 같은 상황에 선수생활 포기까지 고민했다. 그렇지만 인간 승리로 불릴 투혼으로 묵묵히 재활에 몰두해 다시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어두운 터널을 지난 차민규는 평창올림픽을 앞두고 기세를 올렸다. 2016~17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2차 대회와 지난해 2월 삿포로동계아시안게임에서 각각 동메달을 따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올림픽 전초전이었던 2017~18시즌 월드컵 3차 대회에서도 1위와 불과 0.001초 차이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빙상계에서는 홈 이점을 살린다면 메달권 진입도 가능하다는 분석을 내놓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허약한 몸으로 건강에 좋다며 스케이트화를 신은 차민규는 남다른 재능을 발견해 쇼트트랙 선수로 뛰다 2011년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후 눈부시게 성장했다. 사진은 차민규의 어린 시절 모습.  강릉 연합뉴스
초등학교 3학년 때 허약한 몸으로 건강에 좋다며 스케이트화를 신은 차민규는 남다른 재능을 발견해 쇼트트랙 선수로 뛰다 2011년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 후 눈부시게 성장했다. 사진은 차민규의 어린 시절 모습.
강릉 연합뉴스
이날 18개조 중 14번째로 출발선에 선 차민규는 시작부터 자신한다는 듯 두 팔을 휘휘 저었다. 출발 총성과 함께 레이스를 시작한 차민규는 첫 100m를 9초63이라는 준수한 기록으로 통과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장기를 발휘해 피치를 올렸다. 가속도가 붙은 3~4코너에서는 실수를 많이 하기 마련인데 옛 쇼트트랙 영광을 재현하듯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막판에 힘이 부친 듯했지만 끝까지 역주를 펼치며 34초42 만에 결승선을 통과해 박수 갈채를 받았다. 전광판엔 지금까지 레이스를 펼친 선수 중 가장 빨랐다는 걸 알리는 녹색 불이 들어왔다. 이어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캐지 피츠랜돌프(미국·34초42)의 기록과 16년 만에 타이를 이뤘다고 알렸다. 대회 전부터 ‘다크호스’로 주목받았지만 생애 첫 올림픽에 출전한 신출내기가 작성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었다.
“차마 못 보겠어요”
“차마 못 보겠어요” 차민규가 19일 강릉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서 펼쳐진 평창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를 34초42로 마친 뒤 나머지 조 경기를 간절한 눈빛으로 지켜보다(왼쪽)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다.
강릉 연합뉴스
4개 조를 남기고 차민규는 다른 선수들의 레이스를 초조하게 지켜봤다. 16조에서 레이스를 펼친 호바르 로렌첸(노르웨이)이 0.01초 차이로 자신의 기록을 바꿨을 땐 잠시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후 레이스에 나선 선수들이 자신을 넘어서지 못한 걸 확인하고서야 미소를 지었다. 2010 밴쿠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모태범(29·대한항공)에 이어 다시 펼쳐진 ‘깜짝쇼’에 관중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경기 후 차민규는 “(내 뒤에 탄) 상대방이 실수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고 우스갯소리도 했다. 그는 “(곡선주로 레이스를 가리켜) 쇼트트랙에서 전향한 게 도움됐다. 곡선에선 이전부터 좋은 느낌의 스케이팅을 했다”고 설명했다. 밴쿠버 금메달리스트 모태범 못잖게 스타가 됐다는 말엔 “태범이 형은 금메달인데 나는 아직 많이 미치지 못한다”며 웃었다. 또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엔 “짧은 다리 때문에 아쉽긴 하다”고 재치 만점의 멘트를 날렸다.

강릉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강릉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평창 임주형 기자 hermes@seoul.co.kr
2018-02-2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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