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개 루피의 속마음
아파트 단지에 나타난 믹스견
간식 얻어먹지만 사람 손길 거부
관리받은 게 확실한 단정한 발톱
코로나 이후 입양됐다 버려진 듯
삼겹살로 유인, 6시간 만에 포획
임시보호자 은비씨와 생활 시작
극한 스트레스에 입 닫고 무력감
닷새간 먹지도 않고 배변도 참아
해치지 않으리란 믿음에 배 채워
경계심 풀고 은비씨에게 애교도
딱 3주만 개로 살아 보고 싶었다.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들에게 버려진 그들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다. 보호자에게 버림받아 거리로 내몰린 반려동물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온몸으로 버텨야 한다. 생명의 기회를 얻거나 삶과 작별하거나. 서울신문 스콘랩은 지난 5월 23일부터 6월 14일까지 3마리의 유기견을 추적 관찰했다. 아이들의 마음 상태를 읽기 위해 반려견 행동 전문가들의 자문은 물론 짖는 소리로 감정을 분석하는 웨어러블 기기의 도움도 받았다. 도심을 떠돌던 ‘펜더믹 퍼피’ 루피의 이야기다.※키워드에 대한 설명을 보다 편히 보시려면 서울신문 홈페이지에 확인하세요.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615003003
루피의 눈빛
서울 용산구에 버려진 유기견 루피. 버려진 이 아이의 머릿속에는 온통 생존에 대한 본능 뿐이다. 박윤슬 기자
#상처 - 사람의 손길을 피하다
삐쩍 마른 몸피가 수북히 자란 털로 뒤덮인 아이. 주민들은 ‘루피’라고 불렀다. 호기심이 많은 만화 캐릭터와 성격이 닮아 붙여 준 이름이다. 루피는 출근이라도 하듯 매일 아파트 단지에 나타났다. 주민들이 주는 간식을 받아먹는 게 하루 일과였다.
큰 경계심은 없었지만 사람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는 건 거부했다. “반갑다고 불러도 팔 닿는 거리까지는 오지 않더라고요.” 지난겨울부터 루피를 지켜봐 온 주민 박현선(43)씨의 말이다.
이 때문에 주민 신고를 받은 구청 위탁업체 직원들②과 119대원이 와서 루피를 잡아 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워낙 눈치가 빠르고 잽쌌다. ‘잡히면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는 듯했다.
아이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버렸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날이 더워질수록 루피의 건강이 걱정됐다. 지저분한 유기견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은 주민들이 놓은 밥그릇에 소변을 봤다. “루피를 구조합시다.” 지난 4월 한 주민이 중고거래 사이트 ‘당근마켓’ 게시판을 통해 구조를 제안했다. 23명이 참여한 채팅방이 만들어졌고, 작전이 개시됐다.
한낮 최고기온이 30도 가까웠던 지난달 23일, 종일 굶은 루피는 본능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바싹 구운 삼겹살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개의 후각은 사람보다 1만배쯤 더 발달했다.
“굶주린 유기견을 유인할 때 냄새가 진한 삼겹살이나 닭가슴살만한 게 없어요.”
민간 동물구조단체 ‘리버스’ 대원인 구철민씨가 말했다. 그는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 이곳에 왔다. 가로 3m, 세로 5m 넓이의 철제 구조틀 안에 삼겹살 300g을 놓고 루피를 유인했다. 당장 먹고 싶었을 테다. 그러나 섣불리 집어 물었다간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음을, 개라도 직감할 수 있었다. 새 주인을 만나거나, 죽거나. 루피의 고민은 깊어졌다.
그때 이은비(29·여)씨가 나섰다. 평소 잘 챙겨 줘 루피가 따르던 사람이다. 그의 반려견 ‘리지’도 구조틀 근처에서 애타는 마음으로 루피를 불렀다. 6시간의 기약 없는 기다림. 결국 루피는 구조틀 안으로 들어와 구조됐다.
김용환 리버스 대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루피는 사회화(0~7개월) 시기 때 교감법을 배운 아이예요. 의도적으로 버린 건지, 잃어버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키우던 강아지가 100% 맞아요.”
하지만, 대부분의 유기견이 그렇듯 루피는 동물등록④이 돼 있지 않았다. 원보호자를 쉽게 찾을 수 없다는 얘기다. 주민들은 절차에 따라 루피를 구청 위탁보호소인 인근 동물병원으로 데려가 동물보호관리시스템(APMS)에 등록해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제발 쳐다보지 마세요”
사람을 피하는 루피. 루피는 임시보호자 집에 온 첫 날, 집 안의 모든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낮췄다.“어떻게든 보이지 않아야 살 수 있어”. 루피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박윤슬 기자
루피는 임시보호자를 자처한 은비씨의 집으로 향했다. 첫날부터 루피는 행동으로 속마음을 털어놨다. 머릿속에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만 가득했다. 온종일 눈을 감고, 입을 벌려 숨을 헐떡였다. 그러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겁에 질린 듯 입을 꼭 다물었다. 넘어가는 숨도 참을 만큼 루피는 두려웠다. 그러다 고개를 바닥에 축 늘어뜨리며 눈을 감았다. 신원규 독클래스 훈련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입을 다무는 행동은 강아지가 스트레스를 표현하는 방법 중 가장 위험한 신호예요. 루피 입장에서는 둘러싼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 두렵고, 부담스러운 거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앞에 풀이 죽어 회피하고 싶은 상태로 보시면 돼요.”
먹지도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모든 욕구를 잠재웠다. 그저 구석을 찾아 잔뜩 웅크리고 고개를 낮춰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구조 이후 나흘간 루피의 음성으로 마음 상태를 파악한 관찰용 기기에는 ‘불안’과 ‘슬픔’만 떴다.
#믿음 - 사료 다 먹고 배 드러내
“루피가 들어갈 집 안 공간은 모두 막아 보세요. 숨지 않고 같이 적응하는 법을 알려 줘야 합니다.” 신 훈련사가 은비씨에게 조언했다. 구석으로 숨으면 마음을 열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아무도 너를 해치지 않아.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이 진심만 루피에게 닿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루피를 위한 노력
루피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 신원규 독클래스 훈련사(오른쪽)가 지난 24일 임시보호자 이은비씨의 집에서 루피의 행동을 살피고 있다. 구석에서 나와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루피는 코를 혀로 핥으며 스트레스를 표현했다. 당장 스트레스를 받지만, 이래야 사람과 지낼 수 있다.
박윤슬 기자
박윤슬 기자
한번 마음의 빗장이 풀리자 아이는 온 마음을 내줬다. 더이상 구석을 찾지도 않았고, 눈을 감고 숨을 헐떡이지도 않았다. 루피는 은비씨의 관심을 쫓아 집 안 곳곳을 따라다녔다. 은비씨와 떨어지면 끙끙 앓았다. 웨어러블 기기는 루피를 이렇게 분석했다. ‘놀아 주세요’. 더이상 버려지지 않겠다는 생존 본능이 분리불안과 애교로 표현됐다.
사람의 손길이 좋은 루피
루피는 구조된 지 닷새 째부터 큰 변화를 보였다. 보호자에게 애교도 부리고 밥도 잘 먹었다. 루피는 만져주고, 관심을 가져주길 원했다.
임시보호자 이은비씨 제공
임시보호자 이은비씨 제공
#기다림 - 루피의 여생은
주민들은 루피가 좋은 입양자를 만날 수 있길 바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만들어 루피를 소개하며 새 보호자를 찾아나섰다. 루피의 입양자가 갖춰야 할 조건은 간단하지만 단호했다. ‘사교성 만렙(최고 레벨)인 루피의 우정을 지켜 주고 산책을 자주 해 줄 활기찬 다인 가정’, ‘다시는 유기되지 않도록 노력하실 분’.
산책이 즐거운 루피
사람의 사랑 속에 루피는 변했다. 금새 마음의 빗장을 열었다. 사람을 피하던 루피는 이제는 사람과 발걸음을 맞춘다. 구조된 지 21일이 된 지난 13일, 루피는 밖에 나가 마음껏 냄새를 맡고, 영역표시를 했다.
임시보호자 이은비씨 제공
임시보호자 이은비씨 제공
루피의 인스타그램 입양홍보 계정 : @puffy_luffy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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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5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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