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전세사기에 뺏긴 미래
보육원 떠나 10년 고시원 살이주말도 없이 일하며 1억원 모아
그렇게 얻은, 꿈만 같은 전셋집
전세사기 악몽으로 결혼도 포기
“죽을 용기가 없어서 그냥 살아”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한 세대)는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다.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저성장 시대가 시작되면서 ‘열심히 일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다’는 기성세대의 성공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경제 계층 하위군에 속한 청년층은 전세 사기꾼들의 먹잇감이 됐다. ‘계층 이동 사다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주식시장과 코인판마저 돈과 정보력을 가진 기득권의 놀이터였음을 증명하는 사건들도 잇따랐다. 서울신문은 상,하에 걸쳐 각종 통계 수치에 가려진 청년들의 목소리를 듣고 문제점과 대책을 짚어 본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인천 미추홀구의 빌라 모습. 일명 ‘건축왕’ 남모(61)씨의 외조카로 알려진 A씨가 소유한 건물로 22일 현재 4층 건물 8가구 모두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세입자 대다수가 신혼부부나 사회초년생들이다.
안주영 전문기자
안주영 전문기자
“지금부터 다시 그 돈을 모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내 집 마련은 날아간 꿈이고, 결혼이나 연애도 당연히 포기했죠. 저는 그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이에요.”
지난달 11일 저녁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씨의 첫인상은 또래 성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나이를 묻자 박씨는 “제가 고아라서, 86년생 정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지난달 18일 인천 미추홀구의 전세사기피해 주택에 거주 중인 이미연(37·가명)씨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이씨는 전세사기 피해 사실을 알고 난 후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다. 안주영 전문기자
박씨가 10년 동안 살았던 신림동 고시원은 창문이 없었다. 월세가 35만원이었다. “창문이 있는 방은 5만원이나 더 비쌌거든요.” 박씨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고시원은 2~3평 정도로 침대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찼다. 그래도 ‘샤워실 겸 개인 화장실이 있어 환경이 좋다’고 생각했다. 밥값을 아끼려고 공용 주방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밥과 김치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월세와 생활비로 100만원을 쓰고 남은 100만원을 꼬박꼬박 10년간 저금했다. 박씨에게 전세금 1억원은 그런 돈이었다.
2019년 고시원 인근 부동산을 돌며 전셋집을 구했다. 부동산 세 군데를 갔었는데 이상하게 모두 난곡동에 있는 같은 빌라를 추천했다. 9평 남짓한 1.5룸 신축 빌라였다. 무엇보다 커다란 창문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부동산에서는 집주인이 신탁회사에서 돈을 빌려 건물을 지었다며 “건물이 이것 말고도 여러 개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안심시켰다.
전세사기 피해자 박민우(가명)씨가 지난 2019년 서울 관악구에 있는 전셋집을 계약할 때 법무법인을 통해 받은 약속어음. 전세금 1억원을 2021년 1월 30일까지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전세사기로 드러나면서 휴지조각이 됐다.
박민우씨 제공
박민우씨 제공
전세사기 피해자 박민우(가명)씨가 지난 2019년 서울 관악구에 있는 전셋집을 계약할 때 법무법인을 통해 받은 어음공정증서. 전세금 1억원을 2021년 1월 30일까지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전세사기로 드러나면서 휴지조각이 됐다.
박민우씨 제공
박민우씨 제공
3년 뒤 ‘신탁 사기’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공증은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았다. 부동산에서 보여 줬던 등기부등본도 조작된 서류였다. 명의상 주인인 신씨가 부동산 신탁회사에서 집 담보대출을 받고 소유권을 넘긴 터였다. 신탁회사가 동의하지 않은 임대차 계약은 원천 무효였다. 이런 점을 모르고 전세를 계약한 박씨 같은 사람이 50여명에 달했다. 지난해 11월 박씨는 집을 비워 달라는 소장을 받았다. 전세사기 피해 규모가 커지자 지난 6월 1일부터 전세사기특별법이 시행됐지만 박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이 전세금을 일부라도 돌려받을 길은 없다. 박씨는 인터뷰 말미에 사실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고 고백했다. “그 돈을 돌려받지 않는 한 길이 보이지 않아요. 전세사기를 당하면 미래가 없습니다. 그냥 죽을 용기가 없어서 사는 것일 뿐이에요.”
2023-08-23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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