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
정시 퇴근을 하면 가족과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최근 여성가족부가 초등학생 이하 자녀를 둔 직장인 엄마·아빠들과 자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가족사랑 위시 리스트’다. 부모들이 자녀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뽀뽀, 안아주기’ 등 애정표현(14.5%)이었다. 자녀들은 ‘블록·퍼즐·보드게임’ 등 평소에 즐기는 놀이(19.8%)를 그저 엄마·아빠와 함께 하는 게 좋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위시 리스트’가 말 그대로 ‘희망사항’으로 그치는 날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소박한 가족의 행복을 가로막는 걸림돌은 일상화된 야근이다. 일하는 엄마·아빠 3명 가운데 2명은 정시 퇴근을 못 한다. ‘밤 9시 이후 퇴근’도 5명 가운데 1명이나 됐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내용을 접한 많은 분들이 ‘실상은 이보다 더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한국 직장인들의 월평균 근로시간은 지난해 기준 165.5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으로 길다. 우리 경제가 이만큼 올라선 배경에는 산업화 시기 장시간 근무 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2012년 기준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34개국 중 28위에 그친다.
일하는 시간과 업무효율성은 비례하지 않았다. 일과 가정의 균형 잡힌 삶에서 나온 새로운 활력과 창의성이 절실한 시대다.
기업이 달라지는 게 급선무다. 네덜란드의 디자인 회사인 헬데르그로엔에서는 오후 6시면 사무실에서 책상이 아예 사라진다. 책상에 연결된 리프트가 천장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일·가정 양립이 잘된다는 유럽에서도 이런 방법을 쓸 정도로 직장 문화 개선은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정부는 가족친화인증제 등을 통해 기업의 자발적인 참여와 모범 사례 확산을 유도하고 있다. 우선 ‘매주 수요일 정시 퇴근 가족 사랑의 날’을 실천하는 기업부터 늘었으면 한다. 육아기 단축근무제, 시차출퇴근제 등 유연근무제와 남성 육아휴직도 더 활성화돼야 한다. 근로시간을 줄이고 일을 나누는 잡셰어링은 일자리 확대에도 기여할 수 있다.
‘가족 사랑 위시 리스트’에 대한 언론과 국민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정시에 퇴근한 뒤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바람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어릴 적 아빠가 휴일 근무나 야근 뒤에도 꼭 공원이나 계곡에 데리고 놀러 가주셨는데, 지금도 좋은 추억이 된다”는 어느 댓글을 전하고 싶다.
‘기업이 변해야 김대리가 산다’는 서울신문 기획 제목처럼 기업은 ‘김대리’가 한 가정의 엄마·아빠임을 잊지 말자. 직장인 엄마·아빠와 아이들 모두에게 ‘위시 리스트’가 희망사항이 아닌 평범한 일상이 될 날을 소망한다.
2015-07-2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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