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혜의 책 사이로 달리다] 책들의 대화를 허하라

[이은혜의 책 사이로 달리다] 책들의 대화를 허하라

입력 2020-01-20 23:14
수정 2020-01-21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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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모든 글은 다른 글에서 양분을 얻는다. 작가는 다른 말로 하면 가장 좋은 독자다. 베냐민은 브레히트의 가장 좋은 독자였고, 브레히트는 셰익스피어의 가장 좋은 독자였으며, 우구를리앙은 지라르의 가장 좋은 독자였다. 이들이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하는 것은 글쓰기의 중요한 수단이지 표절이 아니었다. 앞선 자의 정신을 딛고 선 자들은 우뚝한 산맥 하나씩을 만들어냈다.

순수한 내 생각만으로 된 글과 책은 없다. 반짝반짝 신간이 어느덧 뒤에 오는 책들의 재료로 그 쓰임새가 바뀐다. 많은 책이 운명처럼 ‘절판’되지만, 다행히 그 안의 어떤 문장과 단락은 다른 책에 인용됨으로써 목숨을 연장한다. 이것이 책과 책의 대화이자 책들의 연대기일 것이다.

하지만 표절이 악마처럼 등장하자 이를 막으려는 장치들이 촘촘히 생겨났다. (이전 세대의 어떤 이들은 지식재산권을 마치 들판에 난 꽃을 꺾듯이 제 글 속에 욱여넣었는데, 오늘날 작은 비극의 실마리가 여기서 생겨났다.) 이에 따라 편집자들은 모든 문장에 대해 법적 허가를 구하기 시작했고 작가들은 행여 있을지 모를 시비를 피하고자 몸을 사려 인용을 꺼리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한 문장, 한 단락을 인용할 때조차 게재 허가를 얻고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것이 일상다반사가 돼 버렸다. 언뜻 저작권 개념이 튼튼히 뿌리 내리는 것 같지만, 글과 문장이 빈틈없이 ‘권리’와 ‘돈’으로 환산되는 것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

편집자는 게재 요청을 하루에도 여러 건 받는다. 무료로 허가하거나 계산기를 두드려 비용을 받기도 하는데, 서로의 책을 참조하고 인용하는 것이 상식이었던 시절을 건너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 모든 일은 권리와 창작의 개념을 다시 곱씹게 만든다.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유리같이 투명한 절차이지만, 이것이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지나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자잘한 지식재산권을 모두 허가받는 일의 엄청난 소모에 대해 법학자 마이클 헬러는 심각한 현상으로 지적한 바 있으며, 쪼개진 권리들의 저작권을 해결하다가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려는 의욕들이 꺾여 공동체 전체가 손해 보게 될 것을 우려했다. “점점 더 많은 가시철조망이 문화계의 오픈 필드를 에워싸고 있다.”

책에 남의 글을 인용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타자의 환대’다. 타자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자아를 넓힐 수 있다. 그렇기에 책이라면 예외 없이 이전 책과 대화를 하는데, 그게 가장 형식화된 게 박사 논문이다. 기존 연구를 검토하며 그 두터운 업적을 등에 업은 순간 새 논문은 역사성을 띠게 되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사유는 고유한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선배 작가를 딛고 서려면 대화해야 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조목조목 인용하며 비판해야 한다. 작가들이 타인의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자기 화두를 여는 것은 현대적 글쓰기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앞서 저작권이 하나의 굴레로 작용하고 있는 게 요즘 풍토다. 그러자 어떤 작가와 편집자들은 기이한 묘안을 내기 시작했다. 직접 인용을 줄이고, 리라이팅해서 출처를 숨긴 채 자기 글 속에 녹이는 것이다. 타인의 생각을 내 문장에 욱여넣어 그 타자성이 드러나지 않게 감추는 이런 일은 촘촘한 법을 피하려다 보니 생기는 윤리적 후퇴들이다. 원래부터 조심스러워했던 이들은 더 소심해지고, 도덕과 법망을 잘 빠져나갔던 이들은 더 과감하게 거의 표절처럼 자기 텍스트를 만들어 나간다.

우리가 뼛속까지 들여다보고, 점검하고, 방어하기 위해 하는 행동들은 때로는 약이 되지만,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아니, 문장이 돈과 권리로 환산되는 시대는 삭막하다. 시인이 시 해설서를 내면서 시를 하나도 인용하지 않는 일은 얼마나 가난한 풍경인가. 법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것도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어느덧 방파제를 높이 쌓아 책과 책의 대화를 막는 불통의 문화가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2020-01-2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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