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구 칼럼] 멍석은 잘 깔려 있다

[이동구 칼럼] 멍석은 잘 깔려 있다

이동구 기자
입력 2019-08-21 23:04
수정 2019-08-22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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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구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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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창시자 칼 볼프강 도이치는 “국가들 사이의 통신과 접촉이 빈번해질수록 통합의 지수가 높아진다”는 가설로 유명하다. 하지만 일본을 둘러싼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에서는 그의 가설이 성립되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의 웬만한 나라들은 서로 활발한 무역과 인적, 경제적 교류에도 불구하고 정치, 역사 문제 등에서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한국, 중국 등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기 때문이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2005년 8월 11일자)에서 과거사를 통한 정치적 화해 없는 아시아 공동체 논의의 허구성을 지적했다. “유럽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통합을 이뤘지만, 아시아는 50~100년 안에 겨우 경제공동체 정도만 가능할 것이다. 독일처럼 일본도 전쟁 행위의 모든 것을 인정, 사죄하고 개인이 입은 피해를 보상해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의례적으로 ‘사죄합니다’ 하고는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행위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올해도 일본의 나루히토 천왕은 “깊은 반성”의 뜻을 밝혔지만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에 공물을 보냈고, 의원들은 집단 참배했다.

최근 미국의 역사학자도 유사한 분석을 내놓아 관심을 끌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브래진스키 교수는 지난 11일 워싱턴포스트의 기고 칼럼 ‘일본이 과거의 죄를 속죄하지 않은 것이 어떻게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가’라는 글에서 “일본이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반성하고 이웃 국가들과 화해하지 않은 것이 세계경제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고 있으며, 이는 한일 갈등과도 연관된다”고 주장했다. 또 “1990년대 이래 일본 지도자들은 잘못을 사과하고 반성하는 성명을 수십 차례 발표했지만 그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같은 행동으로 이런 성명들을 훼손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기회주의적인 한국의 지도자들은 인기에 어려움을 겪을 때 일본을 공격하기에 편리한 목표라는 것을 발견했다. 역사적 분노를 살리고 유지하는 것은 유용한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다”고 꼬집기도 했다.

일본은 내년 7월 도쿄올림픽을 정권 홍보의 기회로 삼을 계획이다. 특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피해가 성공적으로 복구됐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려고 방사능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곳에서도 올림픽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 등의 세계 언론들은 우려의 시선을 보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우리 국민 중에는 올림픽 불참까지 주장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수사에 그친다. 오히려 일본 정부가 올림픽을 기회로 아시아와 세계인들에게 과거사를 반성하고 화해의 메시지를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8·15 경축사에서 “일본이 과거사를 사죄하고 새 시대로,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나서길 바란다”고 했다. “세계인들이 평창에서 ‘평화의 한반도’를 보았듯 도쿄올림픽에서 우호·협력의 희망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이 도쿄올림픽에서 과거사에 대해 사과의 몸짓을 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 준 셈이다. 히틀러처럼 올림픽을 정권 홍보에 활용치 말고, 아시아인을 향한 ‘과거사 사죄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 한국과 중국 등지의 피해자들은 수십년째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27년 동안 소녀상 앞에서 집회하는 고령의 피해자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만약 아베 총리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면 아시아인의 오랜 갈등이 화해의 역사로 바뀔 수 있는 성공적인 도쿄올림픽을 열게 될 것이다.

독일은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 이후 기회 될 때마다 과거사를 반성해 왔고, 나치 전범에게는 끝까지 죄를 물었다. 이달 초 ‘바르샤바 봉기’ 75주년을 맞아 독일은 또다시 과거를 반성했다. “일본이 아시아 두뇌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나 그것은 독일과 같이 과거와 결별했을 때 가능하다. 현재로서는 아시아의 지적 리더로 잘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라고 한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의 고견(니혼게이자이신문 2011년 1월 9일자)을 다시 새겼으면 한다.

아베 총리의 진심 어린 사죄는 한국과 아시안인, 세계인을 감동시킬 수 있다. 사과에 필요한 멍석은 충분히 깔려 있다.

yidonggu@seoul.co.kr
2019-08-2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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