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미현 논설위원
정 회장이 지난 26일 서울 하얏트호텔 행사장에 섰다. 신형 제네시스의 출시를 알리는 행사였다. 정 회장은 가벼우면서도 충격에 강한 초고장력 강판을 절반 이상(51%) 썼다며 세계 최고 품질을 자신했다. 성공하면 현대차로서는 대중차 이미지를 벗고 고급차 시장에 본격 진출할 수 있게 된다. 예약 대수가 벌써 6000대를 넘었다고 하니 출발은 순조로운 듯싶다. 하지만 출시를 앞두고 벌인 4행시 짓기 이벤트에서 가장 많은 지지 댓글을 얻은 작품은 아래와 같다.
제 제네시스에서 또 물이 새네요 네 네, 현대차는 원래 그렇게 타는 겁니다 시 시속 80㎞로 박아도 에어백이 안 터지네요 스 스스로 호구 인정하셨네요, 호갱님.
물이 새는 싼타페의 결함을 쏘나타의 감성 광고에 절묘하게 빗댄 풍자였다. 올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신형 싼타페는 누수 결함 때문에 ‘수타페’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현대차는 발뺌과 무성의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공식 사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올 4월에는 현대·기아차 13개 차종에서 브레이크 스위치 결함이 무더기로 발견돼 미국에서만 187만대를 리콜했다. 소비자들이 더 분통을 터트리는 것은 현대·기아차의 대응 방식이다. 역시 큰 지지를 받은 ‘제동이 안 되는데요? 네가 알아서 하세요 시동이 안 걸리는 데요? 스스로 해결하세요’라는 사행시는 고객들의 이런 불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정 회장은 얼마 전 잇단 리콜 사태 등의 책임을 물어 연구개발(R&D) 담당 임원 세 명의 옷을 벗겼다. 아무리 봐도 현대·기아차는 중대 기로에 서 있는 느낌이다. 국산차를 타야 한다는 국민의 애국심과 인내심은 한계를 드러내며 품질 불만을 쏟아내고 있고, 수입차의 공세 속에 브랜드 충성심도 속절없이 꺾이고 있다. 거침없이 뻗어나가던 해외 시장은 제동이 걸렸다. 유럽 자동차시장이 살아나고 있는데도 지난달 현대차의 판매 대수는 1년 전에 비해 오히려 줄었다. 이번에도 정 회장은 뱀 같은 머리로 무서운 장사꾼의 면모를 보여줄 것인가. 다른 건 몰라도 사행시의 풍자에 담긴 소비자들의 정서를 고통스럽더라도 냉정하게 되돌아보는 것이 새로운 도약의 단초라는 생각을 해본다.
논설위원 hyun@seoul.co.kr
2013-11-29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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