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철 논설위원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부여는 538년 성왕이 공주에서 도읍을 옮긴 이후 660년 왕조가 막을 내릴 때까지 백제의 수도였다. 부여는 오래전부터 중고생들의 중요한 수학여행지였고, 지금도 갈수록 중요한 역사탐방지로 떠오르고 있다. 그럼에도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을 돌아보고, 궁남지에도 가보지만 전설만 남았을 뿐 눈에 보이는 백제의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그 면모를 눈으로 확인하려면 20세기 건물인 국립부여박물관으로 가는 것이 오히려 빠르다. 이런 상황에서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부여시내에 남은 사실상 유일한 백제 유적이다.
정림사를 복원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주민들은 신라는 물론 고구려도 생각하지 못했던 석탑의 존재가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런데도 오층석탑은 부여시내 한복판이라고는 해도,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정림사터에 쓸쓸한 모습으로 외롭게 서 있다. 절의 모습을 백제 당시로 되돌리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내외 답사객을 더 많이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관광산업적 기대도 높다. 불교계 역시 삼국시대 대표적 사찰이 복원된다면 단순한 순례지가 아니라 예불과 수도 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반기고 있다.
하지만 나당연합군이 부여를 잿더미로 만든 상황에서 어떻게 정림사탑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잘 알려진 대로 정림사탑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낙서가 새겨졌다. “백제가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라”는 내용이다. 주민들을 협박하는 정치적 선전판으로 쓰이지 않았다면 정림사탑도 파괴됐을 것이다. 정림사가 화려하고 웅장하기만 한 절집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백제 멸망 과정에서 정림사탑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퇴색하고 만다.
발굴조사로 백제 당시 절의 구조는 확인됐다고 한다. 하지만 백제 건축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오리무중이다. 복원한다고 해도 백제 사찰이 아니라 조선 후기 건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복원을 추진하는 분들에게 당부한다. 정림사는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3-08-09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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