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국의 상층
한국에 상층이 있는가. 이렇게 물으면 모두들 의아해할 것이다. 상층이 없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에 ‘구조화된 상층’이 있는가 물으면, 그건 또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것이다. ‘구조화’(構造化)는 그 얼개가 잘 짜여져서 오래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10년, 20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수십 년 혹은 수수 세대를 가는 것을 이른다.대한민국의 부와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계층은 그들이 받는 혜택에 비해 베푸는 것이 적기 때문에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우리나라에 책임 있는 상층을 구조화하려면 특혜를 받는 계층이 공익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사진은 우리나라 상층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서울 강남의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단지.
서울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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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 없이 상층은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희소가치를 점유한 사람들이다. 그 희소가치는 재산(property)과 권력(power)과 위신(prestige)이다. 영어로 모두 앞에 ‘p’ 자가 들어 있어 ‘3개의 p가 사람들의 역사’라고 이르기도 한다. 여기서 재산은 소득을 낼 수 있는 자원이고, 권력은 주요 제도의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 곧 정치권력이다. 위신은 명예와 신망과 존경, 남으로부터의 선망 등 한 개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의 총합이다.
사회에 따라 이 세 가지를 모두 함께 차지하고 있는 상층도 있고 이 세 가지 중 2개만 가진 상층도 있다. 그러나 어느 사회든 이 세 가지 중 오직 한 가지만 점유하고 있는 상층은 없다. 교육적 성과를 중요시하는 유교사회도 교육적 성과라는 위신을 통해 고위직에 오름으로써 자동적으로 권력도 함께 차지했다. 이 중첩적 소유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이 재산을 수단으로 권력도 함께 갖는 것이고, 그다음이 권력을 가짐으로써 부(富)도 함께 갖는 것이다. 앞의 대표적인 예가 영국, 미국 등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고, 뒤의 대표적인 예가 오늘날 중국, 옛 소련, 동구 등 공산주의 국가들이다.
문제는 남의 나라 아닌 우리나라, 바로 한국 사회의 상층은 이들 나라와 어떤 다른 특징이 있는가이다. 첫째로 구성상에서 우리 상층은 부를 가진 기업가층과 권력을 가진 고위직층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미국, 영국 등 서구 상층의 경우 고위직층은 대체로 상층에서 제외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대통령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면 최상층(top most class)이 아닌 중상층(upper middle class)이 된다. 물론 케네디나 부시 대통령은 원래 상층 가문이었다는 점에서 예외다. 우리의 경우 고위직층이 부를 가진 층보다 훨씬 더 위세 등등한 상층 행세를 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의 우리 상층 수명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둘째로 시간상에서 우리 상층은 세대간(世代間) 상층이 아니라 세대내(世代內) 상층이다. 다른 말로 누세대(世代) 상층이 아니라 당대(當代) 상층이다. 아버지 대 아니면 바로 내 대(代)에 만들어진 상층이다. 상층에 이른 역사가 지극히 짧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 회의 ‘뉴리치·뉴하이’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당대 상층의 특징을 ‘고잉 콘선’(going concern)에 비유해 보기로 한다. ‘고잉 콘선’은 지금 성업 중인 현행기업(現行企業)을 이른다. 모든 현행기업은 ‘살아남는 것’이 목표이고, ‘진행체’(進行體)로 계속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고, 그리고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획득하는 것이 소망이다.
대기업가층이나 고위직층이나 다 같이 시장으로부터 그리고 현직으로부터 오로지 쫓겨나지 않기만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러기 위해 아래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하라면 해’ 하는 횡포며 오만(傲慢) 갑질이 일상화된다. 지금은 인권이며 사회적 지탄, 그리고 아랫사람들의 높은 학력과 자격 능력 등으로 옛날과는 같을 수 없다 해도 당대 상층이 하루아침에 누대 상층이 될 수 없는 한 우리 상층의 타자 인식은 서구나 미국, 일본처럼 그렇게 긍정적이 되기는 여전히 힘들다.
셋째로 사회 관계상에서 우리 상층은 아직도 그들만의 혹은 그들 특유의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공동체는 그들 내부에 그들끼리의 긴밀한 사회관계망을 가질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 세습이 안 되는 고위직층은 말할 것도 없고 세습적인 기업가층도 거의 대부분 ‘그들끼리’가 아니고, 그들 ‘각자 뿔뿔이’가 돼 있다, 이는 일본 기업들 단체인 ‘게이단렌’(經團連)과 한국 기업들 단체인 ‘전경련’(全經聯)의 차이와 같다. 일본의 게이단렌은 우리 전경련과는 전혀 달리 단순 협업이나 거래를 넘어 그들끼리만 갖는 공동의 사회적·유기적 연결망과 관계망을 갖고 있다.
상층이 그들끼리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다른 층의 잘난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포섭하고(coopt) 흡수(absorption)해서 그들 상층의 양과 질 그리고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 다른 층과 구별하고 차등지우는 그들 자녀들만 다니는 학교를 세우고, 그들 자녀들끼리만 결혼하는 통혼권(通婚圈)을 구축하고, 그리고 그들끼리만 참가하는 클럽(clup)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람직하냐 아니냐는 별개의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상층의 그런 공동체 형성이 그들 자신의 그릇된 사고와 의식 그리고 그들 사회 행동에서 나타나는 비리를 감시하고 제재하는 엄격한 감시 기구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그들의 명예와 존경, 지지를 유지하는 주요 기제가 된다.
넷째로 기능상에서 우리 상층은 그들 지위에 상응하는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 없이 상층은 체제 유지의 중추 기능을 한다. 마찬가지로 그 사회질서 안정의 근간이 되는 것도 상층이다. 그 사회 체제가 무너졌다는 것은 상층이 무너졌다, 혹은 상층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사회질서가 안정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졌다는 것도 상층이 바로 무규범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과 같은 소리다. ‘두터운 중산층이 사회 유지의 버팀목’이라고 말하지만, 이 중산층을 두텁고 안정되게 만드는 것도 상층 기능 중 하나다.
그런데 우리 상층은 어떤가. 우리 사회 통합이 잘 안 되는 것도 실은 상층의 책임이다. 상층 스스로 내부적으로 통합이 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갈등이 만연해 있는 것도 원천적으로는 상층이 분열해 내부 갈등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 불만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가장 높은 것도, 계층 간 상대적 박탈감이 날로 증대하는 것도 모두 상층 책임이다. 상층이 지금 그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만큼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 적기 때문이다. 갈등이며 불만, 박탈감은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이며 심리적인 것이 훨씬 더 강하다. 상층이 제 기능을 하면 이 모두 줄어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위신상에서 우리 상층은 모두 추락해 있다. 그들은 신뢰받지도 존경받지도 못한다. 그들의 지위만큼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만큼 명예롭지도 않다. 그들은 서구의 상층처럼 일반 국민의 모범생도 아니고 지표(指標)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그들은 일반 국민보다 더 높고 더 많은 애국심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갖는 애국심은 그들 지위에서, 그들이 지금 수행하고 있는 그 직무에서 내 본분을 다한다는 그 정도일 뿐이다. 그것은 일반 국민들도 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절대로’ 그 이상이어야 한다. 이유는 일반 국민들이 받지 못하는 특혜를 그들은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혜받는 것만큼 애국해야 한다. 특혜받은 것만큼 확고한 국가관, 높은 소명 의식과 공익 그리고 국가 이익을 위해 ‘내 한 몸’ 바친다는 충정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상층이 된다.
연세대 명예교수
2016-11-17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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