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전 아픔 품은 몽고정… 적막한 가구거리 ‘쇠잔한 도시’ 마산 대변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일제강점기인 1932년 시인 이은상(1903~1982)의 시에 작곡가 김동진(1913~2009)이 이듬해 곡을 붙인 국민 가곡 ‘가고파’의 앞소절이다. 마산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떠나온 고향을 못내 잊을 수 없어 고향 바다를 그렇게 간절히 회억했으리라. 하지만 이 노래는 ‘마산 예찬곡’으로만 머물지 않았다. 국민 애창곡이 되어 광복 이후 교과서에까지 실린 것은 구구절절 노랫말이 일제강점기 잃어버린 조국을 외쳐 부른 통한의 절창이기도 했기 때문이다.활기찼던 옛 모습이 사라진 몽고정로. 중고가구, 싱크대 수리 등을 주로 하는 가게들이 모여 있다.
누군가 “마산” 했을 때 대번 기억의 회로를 돌아 자동으로 점등되는 대명사는 이 노래 제목뿐만이 아니다. 한번 가보지 않고서도 들어본 적이 있다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대표 지물(地物) ‘몽고정’(夢古井)이다. 오래전 시인이 꿈에서조차 그렸던 남쪽 바닷가 지척에 몽고정은 자리해 있다. 마산만의 평화를 요란스럽게 들깨우는 어시장 입구에서 부지런히 10여분만 걸음을 재촉하면 만날 수 있는 옛 우물이다.
몽고정의 연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몽고군이 일본을 정벌하고자 고려와 합세해 여·몽 연합군을 조직한 1281년(고려 충렬왕 원년). 당시 합포(지금의 마산)에 주둔하게 된 병사들의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팠던 우물이다. 몽고 군사와 그들이 부리던 말도 함께 우물물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몽고정 옆에는 직경 1.4m의 바퀴 모양 석물이 하나 있는데, 당시 물을 길어 올릴 때 발판으로 쓴 것으로 추정된다.
몽고정의 원래 이름은 ‘고려정’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 초기 마산에 살았던 한 일본 지식인이 쓴 기록물 마산항지(馬山港誌)에는 “고려정이라 불리던 우물을 일본인들이 몽고정으로 개명했다.”고 적혀 있다. 몽고군이 거쳐간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우물은 지역민들의 식수원으로 사랑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여러 향토 기록에는 1906년쯤까지 이 우물에는 ‘서성리수백년지음정’(西城里數百年之飮井), 즉 마산포 서성리 사람들이 수백년간 이용한 우물이었다는 표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경남문화재 제82호로 등록된 몽고정. 고려시대 몽고군의 식수원으로 팠던 우물이다.
7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우물은 그러나 세월의 더깨를 그대로 뒤집어쓴 채 도심 한구석에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다. 근처 음악학원에서 나오는 초등학교 5학년 남자 아이를 붙들어 짐짓 우물의 내력을 아느냐고 물었다. “고려 때 몽고 군사가 물 마시던 곳”이라고 기특한 답변을 내놓는다. 꼬마는 “오며 가며 표석에 새겨진 유래를 읽어서 잘 안다.”고 했다. 700여년을 붙박이로 버텨온 공력이 그래도 영 헛되지는 않았음이다.
몽고정로의 끝지점에 상징물처럼 자리 잡은 건물이 몽고간장 공장이다. 몽고정의 물은 미네랄과 칼슘이 유달리 풍부해 장류 식품 제조에 더없이 좋은 수질로 꼽혀 왔다. 그런 배경으로 1905년 일본인이 장유공장을 처음 차렸고, 이후 1945년 김홍구 사장이 지금의 이름으로 재창업해 마산의 명물로 컸다.
몽고정에서 출발해 몽고정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마산의 명소들이 요소요소에서 곁가지로 뻗어 나가 있다. 마산 출신의 조각가 문신(1923~1995)을 기리는 문신미술관도 왼편 언덕배기 쪽으로 1㎞쯤 가면 닿는다. 몽고정로 중간쯤인 추산동에 자리한 사찰 정법사도 길손의 발길을 잡아 끈다. 통도사의 마산포교당으로 1912년 일제시대 민생구제라는 담대한 뜻을 품고 창건된 유서 깊은 공간이라고 입구 안내판이 친절히 귀띔해 준다.
몽고정 표지석.
세월의 힘은 사물의 생기를 속수무책으로 무력화하기도 한다. 안타깝지만 몽고정로 일대에도 그건 통하는 얘기다. 한때 50만명을 넘어섰던 ‘대도시’ 마산의 쇠락한 현주소를 대변하듯 생기를 잃고 침잠한 모습에 옛 고향을 모처럼 찾은 이들은 가슴이 헛헛해진다. 중고 가구, 싱크대 제작, 맞춤복 등을 취급하는 작은 점포들만 즐비할 뿐 한낮에도 거리는 적막하기만 하다.
20여년 전 이 길은 젊은 발자국 소리로 요란했다. 근처에 명문으로 꼽히는 중고교들이 몰려 있어 그들이 단체 영화를 보거나 미팅을 갈 때면 삼삼오오 어깨를 붙이고 들떠서 걷던 길이었다. 마산합포구 새주소 담당인 손대근씨는 “예전에 이 길은 마산에서도 번화한 축에 들었다.”면서 “십수년 만에 들른 사람이라면 뒷골목처럼 밀려난 지금의 모습에 씁쓸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창동예술촌 골목에서 만나는 기발한 벽 장식물. 젊은이들에게 ‘포토존’으로 사랑받고 있다.
몽고정로에서도 1번지에 해당하는 자리는 예전에 마산 시내에서도 최고로 쳤던 중앙극장이 있었던 곳. 지금 극장은 자취를 감췄고 그 자리에 대형 아웃렛 가구 매장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주인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장 담벽에서는 ‘몽고정로 1’이라는 도로명 주소판을 찾아볼 수 없다.
몽고정로를 벗어나 그 앞길인 북마산가구거리에 들어서면 비로소 한때 50만 인구를 자랑했던 도시의 위용이 읽힌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도 짬을 내서 한 번쯤은 둘러볼 만한 곳이다. 각종 ‘브랜드’ 가구들을 판매하는, 5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명소다.
비탈진 가구거리를 걸어내려와 3·15대로를 만나는 즈음에서 꼭 한 번 찾아봄 직한 곳이 어시장이다. 고적한 몽고정로와 지근거리에 있는데도 분위기는 딴판이다. 횟집촌, 온갖 물 좋은 생선과 푸성귀들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모여 대단지를 이룬다. 사람 사는 냄새에 파묻혀 긴장을 풀 만한 곳으로 시장통만 한 곳이 또 있을까. 이곳에서는 버스를 타더라도 마산역이나 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20여분이면 충분하다.
글 사진 창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26회에는 전북 군산시 창길을 소개합니다
2012-11-07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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