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자금 착취 리포트-늙은 지갑을 탐하다] <3>보험의 그림자… 노년층 노린 불완전판매
“저축성보험 가입했는데 알고보니 종신보험”… 칠순 고객의 분노
저축성보험 상품에 가입하고 싶었던 홍영희씨는 성당에서 알고 지냈던 보험설계사 최모씨에게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딸과 며느리가 죽어야 돈을 받는 종신보험에 사인했다고 주장했다. 홍씨는 지난 14일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에 위치한 자택에서 통장과 금융감독원 민원서류 등을 보여 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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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를 당해 힘들 때도 쓸 돈 줄여 가며 부은 보험인데, 암에 걸리니 입원비를 못 준다네요.”
유방암 2기인 김모(66·여)씨는 직장생활을 하던 1990년대 초 2개의 삼성생명 암보험에 가입했다. 주변 부탁을 마다하지 못해 들었지만 ‘혹시 아플 때 가족에게 짐이 되지는 않겠다’며 악착같이 납입했다. 그는 환갑을 바라보던 2010년 암 진단을 받았다. 진단비와 수술비 명목으로 보험금 일부를 받았지만 암 전문 요양병원 입원비 297일치(5061만원)는 받지 못했다. 가입 당시 보험설계사는 “암으로 입원하면 입원일과 상관없이 보험금을 준다”고 했고 보험 증권에도 같은 취지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요양병원에서 암의 직접 치료를 받았다고 볼 수 없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김씨는 “요양병원에서도 암세포를 죽이는 ‘압노바 치료’ 등을 받았는데 직접 치료가 아니라고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금융감독원은 2018년 김씨 손을 들어줬다. 요양병원 입원은 꼭 필요한 치료 과정이라며 보험금 미지급 결정을 재검토하라고 했다. 사실상 보험금 지급을 권고한 것이다. 그러나 삼성생명은 따르지 않았다. 금감원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김씨처럼 지급 권고를 받고도 보험금을 타지 못한 삼성생명 암보험 가입자는 71명(2019년 10월 기준)이다. 삼성생명 보험설계사 출신이기도 한 ‘보험사에 대응하는 암환우 모임’의 김근아 대표는 15일 “삼성생명이 1990년대 암보험 판매 당시에는 직접 치료라는 표현 자체를 쓰지 않았고 설계사 교육 때도 치료 목적으로 입원하면 보험금을 주는 상품이라고 가르쳤다”면서 “나도 그렇게 설명하며 팔았다”고 말했다.
모호한 약관을 보험사가 유리한 대로 해석해 돈을 주지 않는 건 노인을 울리는 대표 수법이다. 가입 땐 크게 따지지 않고 보험금을 내줄 것처럼 약속했던 보험사들이 정작 보험금을 청구하면 처음 듣는 단서조항들을 들이민다. 2018~2020년 상반기까지 60대 이상 노인이 생명보험 관련 피해를 봤다며 금감원에 제기한 민원 중 약관을 둘러싼 다툼인 ‘면부책 결정’ 민원이 3206건(22.4%)이었다.
최근 노령층에 집중적으로 팔린 유병자보험도 고객을 ‘약관의 함정’에 곧잘 빠뜨린다. 유병자보험은 암 병력이나 고혈압·당뇨 등 만성질환이 있어도 가입할 수 있는 상품이다. ‘간편보험’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2015~2019년 888만 1000개가 팔렸는데 4년 새 판매량이 4배(74만 6000개→300만 1000개) 이상으로 늘었다.
한 노인이 통장을 보고 있는 모습.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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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보험을 팔 땐 보험금을 받을 수 없는 조건인 면부책 조항을 정확히 알리지 않는 일이 흔하다는 점이다. 7년 전 위암을 앓고 회복한 한 60대 환자는 “암에 걸리면 수술비와 치료비, 입원비 등을 주겠다”는 말을 믿고 유병자보험에 가입했다. 설계사는 “5년 내 암 발병 사실이 없으면 가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인은 보험 가입 1년 뒤 위암이 재발해 보험금을 청구했는데, 보험사는 “새로운 암에 걸렸을 때만 보험금을 준다는 걸 몰랐느냐”고 반문했다. 가입 때 전혀 듣지 못한 조항이었다.
불완전판매에 따른 비난은 보험설계사에게 쏟아진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보험사가 ‘진범’이라고 지목한다. 윤용찬 보험약관교실 와이 대표는 “보험사는 설계사들을 제대로 교육하지 않는다. 보험금을 받을 수 없는 단서조항을 판매 과정에서 강조하면 노인 고객이 가입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설계사는 회사 말만 믿고 “어떤 상황에도 보장받으니 걱정 말라”는 식으로 팔게 된다는 얘기다. 현직 설계사 김모(57·여)씨는 “신입 때를 제외하면 신상품 관련 교육을 3~6개월마다 1시간 정도 받는 게 교육의 전부”라고 밝혔다.
또 보험사의 반협박 탓에 설계사들이 가입자들에게 권리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특정 설계사가 가입시킨 고객들이 보험금 청구를 많이 하면 보험사가 영업정지 같은 벌칙을 주기도 한다”는 증언도 나온다. 설계사 김씨는 “내가 가입시킨 고객이 보험금을 청구하면 보험사 보상과에서 연락이 와 ‘최대한 보험금을 낮춰 보라’고 종용한다”며 “허리뼈가 부러진 지인에게 5000만원까지 나오는 상해보험금을 ‘1500만원만 받을 수 있다’고 속였는데 평생 죄인이 된 심정”이라고 말했다.
관계에 의지해 파는 보험의 판매 관행도 불완전판매 피해를 낳는 큰 원인이다. 친인척이나 친구 등이 가입을 권하는데 꼼꼼히 따져 보긴 어렵다. 경북 지역에서 15년째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이모(52·여)씨는 “나이 들수록 낯선 사람은 경계하고 아는 사람은 믿는다”면서 “‘알아서 잘해 줬겠지’라며 가입했다가 당하는 일이 흔하다”고 전했다.
●전문가 “징벌적 손배 등 대책 마련을”
같은 성당 신자였던 설계사 최모(65·여)씨에게 보험을 가입한 홍영희(71·여)씨도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그는 2017년 딸과 아들 명의로 저축성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최씨로부터 상품을 추천받았다.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최씨를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믿음은 배신으로 돌아왔다. 최씨는 자신에게 수당이 많이 떨어지는 종신보험을 저축보험으로 안내하고 팔았다. 홍씨의 딸(46)과 며느리(39)를 피보험자로 해 100만~200만원씩 10~20년간 내는 상품이었다. 딸과 며느리가 사망하면 홍씨가 보험금을 타는 구조였다.
이미 수천만원을 부었을 때 우연히 가입 상품이 저축성보험이 아닌 종신보험임을 알아챘고, 판매사인 교보생명에 해지를 요청해 지난해 3월 딸 앞으로 든 보험에 대해선 돈을 돌려받았다. 홍씨는 “칠순이 넘은 나이에 딸, 며느리가 죽으면 보험금을 받는 상품에 가입할 리가 있겠느냐”며 “계약자와 피보험자가 다를 땐 피보험자의 확인서를 반드시 받아야 하는데 우리 딸 서명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서류를 꾸몄다”고 말했다. 그러나 며느리 명의로 가입한 보험은 자필 서명과 ‘해피콜’(불완전판매 여부를 점검하는 통화) 본인 녹취 등이 있다는 이유로 해지 신청이 금감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교보생명 관계자는 “금감원이 불수용한 민원에 대해서는 우리 회사에 귀책사유가 없다”고 밝혔다. 반면 홍씨는 “피보험자인 우리 며느리가 최씨를 만나 서명한 건 다른 보험사의 상품 가입서”라면서 “최씨가 며느리에게 ‘해피콜 전화가 오면 모든 질문에 ‘네’라고만 하면 된다’고 해 그렇게 했다”며 억울해했다.
현직 보험설계사인 황모(56)씨는 “잔인하게 말하면 노인은 등쳐 먹기 딱 좋은 존재”라며 “젊은 사람들은 피해를 보면 금감원에 민원도 내고 보험사와 싸우지만, 노인들은 싸울 힘도 없어 그냥 넘어가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노년기는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시기인 만큼 보험 상품 가입 때 보험사가 설명·고지 의무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성남 목포대 금융보험학과 교수는 “저축성보험이나 변액보험 등 불완전판매 비율이 높은 상품은 고객에게 설명 여부와 가입 의사를 반복 확인해야 한다”며 “5년 이상 장기계약 보험은 계약 취소권을 현행 15일에서 1년까지 연장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윤 대표는 “보험금을 받을 수 없는 면책조항을 가입자가 직접 따라 쓰도록 강제하면 불완전판매가 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대표는 “지난해 금융소비자보호법이 만들어질 때 알맹이가 빠졌다”면서 “징벌적 손해배상이나 집단소송 등 처벌받을 수 있는 조항이 있어야 보험사가 약관 등을 둘러싼 불완전판매 소지를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dynamic@seoul.co.kr
특별취재팀
유대근·홍인기·나상현·윤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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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6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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