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인맥 대해부 (5부)업종별 기업&기업인 <11>종근당] 한국 제약사 최초 자체 연구소… 토종기업 첫 3번째 신약 눈앞

[재계 인맥 대해부 (5부)업종별 기업&기업인 <11>종근당] 한국 제약사 최초 자체 연구소… 토종기업 첫 3번째 신약 눈앞

김진아 기자
김진아 기자
입력 2015-07-15 23:06
수정 2015-07-1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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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있는 약’ 신념의 제약기업 ‘종근당’

“흔히들 기업은 경영자의 분신이라고 한다. 종근당(鐘根堂)이라고 사명에 내 이름을 붙인 것은 도매업을 할 때 쌓은 작고 순수한 내 개인의 신용을 토대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1969년부터는 다시 한글로 사명을 바꿔 종근당이라는 기업의 성공을 위해 부단히 도전하고 응전해 왔다. 1941년 5월 7일 창업 이래 숱한 어려움을 극복해 오면서 남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부단히 힘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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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종근당 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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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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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토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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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 26일 종근당의 제24회 정기 주주총회에서 창업주 고(故) 이종근 사장이 회장으로 추대되고 경영 일선에서 한발 물러서면서 한 말이다. 지난해 5441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매출액 기준 제약업계 6위를 기록한 종근당은 고촌(高村) 이종근 창업주의 신념으로 만들어진 역사가 오래된 기업이다.

이 창업주는 1919년 11월 1일 충남 당진시 고대면 성산리 작동마을에서 아버지 고 이택기씨, 어머니 고 신택순씨의 5남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이 창업주가 제약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4년 봄이었다. 그는 서울 종로3가에 있던 4년제 화광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해 졸업한 뒤 한동안 이종사촌 형이 운영하는 동춘당약방에 나가 일을 도왔다. 이때 처음으로 약이 무엇이고 약국이 뭘 하는 곳인지 알게 됐다. 이런 경험으로 이 창업주는 1941년 5월 7일 아현동 282-3에 ‘궁본약방’(宮本藥房)이라는 약방을 열었다. 그는 도매상에서 약을 구입해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서울 외곽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약을 팔았다. 하지만 일제시대 당시 일본이 전쟁 물자 조달을 위해 소규모 업자들을 통폐합하면서 궁본약방은 문을 닫았다.

이 창업주는 포기하지 않았다. 광복 후 그는 1946년 4월 1일 마포구 아현동 85에서 40㎡의 1층짜리 가게를 얻어 ‘종근당약국’(鐘根堂藥局)이라는 간판을 걸고 다시 시작했다. 이때도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약을 팔았다. 그러나 1948년 당시 인플레이션으로 약값이 두 차례나 인상되면서 판매가 어려워졌고 그때 인상되지 않은 값으로 활명수를 공급하겠다는 사람이 이 창업주를 찾아왔다. 이 창업주는 그 사람을 통해 활명수를 구입해 공급했으나 활명수가 가짜 제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이때 그는 약을 사서 판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믿을 수 있는 약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광복 이후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 이 창업주는 종근당약국이 들어선 건물 2층에 대광화학연구소라는 제약회사를 설립하고 바셀린에 다이아진 분말을 혼합해 튜브에 넣은 ‘다이아졸연고’를 종근당 최초의 제조약으로 출시했다.

6·25 전쟁 이후 피란을 갔다 서울로 돌아온 이 창업주는 1956년 1월 당시 자본금 500만환(약 3454만원)을 가지고 종근당제약사를 정식 법인으로 해 새 출발했다. 이어 이 창업주는 원료의약품의 국산화가 필요하다고 봤고 1963년 6월 신도림동 부지를 매입해 국내 최초의 합성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1965년 10월 종근당은 국내 수요가 가장 많으면서도 종근당이 가장 먼저 수입했던 클로람페니콜을 합성하게 됐다.

1970년대는 종근당의 자신감이 하늘로 치솟은 시기다. 해외의 선진 제약회사들과 기술 및 제품 제휴를 추진한 데 이어 1972년 5월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자체 연구소를 신설했다. 이어 1980년대는 종근당이 현재의 충정로 종근당빌딩을 완공하며 연구에 좀 더 박차를 가하던 때다.

회사가 성장해도 이 창업주는 어렵게 자랐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73년 사재 2000만원을 털어 종근당고촌재단을 설립했고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12월 5일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종근당고촌재단은 설립 이후부터 지금까지 국내 제약업계에서 최대 규모인 6730명에게 358억원의 장학금 등을 지원했다.

1993년 2월 7일 74세로 타계한 이 창업주는 1941년 3월 23살 때 3살 아래인 경기 수원 출신의 김옥란(2014년 작고)씨를 중매로 만나 결혼해 2남 3녀를 뒀다. 이 창업주의 5남매 가운데 셋째이자 장남인 이장한(63) 회장은 종근당을 20년 넘게 이끌어 오고 있다. 그는 부인 정재정(52)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뒀다. 3남매는 모두 종근당 관련 지분을 조금씩 가지고 있으며 현재 해외 유학 중이다.

이 창업주의 막내이자 차남인 이덕한(57)씨는 중견 제약회사인 메디카코리아의 회장이다.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 미국 에머리대, 조지아주립대, 일본 와세다대 상학부에서 공부한 뒤 1996년 7월 동일신약을 인수했고 메디카코리아로 사명을 바꿨다.

이 창업주의 막내동생인 이종문(87) 암벡스벤처그룹 회장은 한때 종근당 전무까지 지냈지만 1970년 미국으로 건너가 실리콘밸리 신화를 쓴 인물로 유명하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2015-07-1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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