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79세 노익장 조방장 정걸
임진왜란 발발 15년 전 전라좌수사
수십년 왜군 상대로 수군 전술 체득
부산포해전에는 직접 출전하기도
행주대첩 당시 화살 떨어져 갈 때
전선으로 화살 운반, 승리 큰 기여
충청수군절도사 땐 한강으로 항해
용산창 접근해서 왜군에 함포사격
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고흥 발포진 전경. 이순신이 1580년 발포만호로 부임하면서 멀지 않은 포두가 고향인 정걸과 처음 만났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한다.
행주대첩비 너머로 바라보이는 한강. 정걸과 충청수군은 물길로 화살을 행주산성에 전해주어 승전으로 이끌었다.
조정은 이준경을 전라도도순찰사로 임명해 토벌 작전에 나선다. 이준경은 “환란이 있어도 진장(鎭將)이 살해된 적은 있었지만 주장이 죽은 일은 없었다. 직접 나주로 먼저 가서 군마를 점검하고 싶지만 혹시 늦어질까 염려된다”면서 “군관 김세명과 정걸을, 숙배(肅拜)를 생략하고 먼저 내려보내 각 고을로 하여금 군마를 정돈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서울을 떠나 임지로 가는 관원이 임금에게 부임인사를 하는 것이 숙배다.
새로운 지휘부가 현지에서 전열을 새롭게 갖추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지역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무장을 다급하게 물색했고, 그 결과 정걸과 김세명이 천거된 것이다. 정걸은 1553년 평안도 지역 병마만호에 임명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을묘년 전라도 왜구 방어에 다급하게 투입됐을 당시는 북방이 아닌 고향에 머물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진도 출신 김세명은 1554년 흑산도에서 왜선을 나포하고 왜구를 참해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왜구는 녹도전투에서 참패하고는 물러났다. 명종실록은 ‘녹도에서 포위를 푼 뒤 왜선 28척이 금당도로 물러갔는데 6월 3일 전라도좌방어사 남치근이 병사·수사와 함께 전함 60척 남짓을 셋으로 나누어 추격하자, 왜선 26척이 먼저 패주하고 2척은 그 뒤를 막으며 대항했다. 우리 군사들이 난사하자 왜적이 거의 모두 화살에 맞아, 한 배에 합쳐 타고 다른 한 척은 버리고 도망갔다’고 적었다. 정걸·김세명의 활약이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
정걸은 와중에 남도포 수군만호에 임명된다. 지금도 남도진성이 남아 있는 진도남단의 남도포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최전선이다. 고려시대에는 몽골에 쫓긴 삼별초가 항쟁하기도 했다. 정걸은 상황이 진정된 이듬해 완도 가리포첨사로 승진한 데 이어 부안현감에 오른다. 을묘왜변을 평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을묘왜변은 조선 수군의 무장과 전술에서 변화가 일어난 계기가 됐다. 조선 전기 수군의 주력은 대형 맹선(猛船)이었다. 판옥선처럼 바닥이 평평한 맹선은 기동력이 떨어졌다. 반면 조선을 침범한 왜구의 배는 빠른 소형선이어서 우리 전선도 소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결과 수군은 1510년(중종 5년) 이후 맹선을 조운선으로 돌리고 비거도선(鼻居刀船)과 포작선(鮑作船)을 주력전선으로 삼게 된다. 빠르기는 했지만 비거도선은 불과 4~5명이 탈 수 있었고 포작선은 고기잡이배와 다르지 않았다.
고양 행주서원.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과 정걸·선거이·조경·변이중·이빈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왜변 당시 왜구의 배는 과거보다 훨씬 커진 데다 방패막이까지 둘러 대적하기가 버거워졌다. 무엇보다 전통적으로 왜구의 주력전술은 칼과 창을 이용한 단병접전이었는데, 조선은 수군이나 육군 모두 활이 주력 개인 무기였다. 해전에서도 일단 아군 전선에 오른 적에게 힘을 쓰기가 어려웠다. 적선이 크고 높아지면서 적이 우리 소형 전선에 뛰어들기는 더욱 쉬워졌다.
이런 판단에 따라 대맹선(大猛船)보다 큰 판옥선이 본격 건조되기 시작했다. 판옥선은 많게는 300명 이상의 승조원이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전선이 대형화하면서 무게가 많이 나가는 화포도 10문 이상 장착할 수 있게 됐다. ‘지봉유설’에는 ‘우리 전함은 제도가 굉장하다. 왜선 수십 척이 우리 전선 한 척을 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판옥선은 90명 남짓 타는 일본의 대선 안타케부네(安宅船)보다 강력했다. 적이 오르지 못하는 대형 전선에서 거리를 두고 화포로 공격하는 조선 수군의 전술은 이렇게 태어났다. 판옥선 건조와 대형 화포 탑재, 전선과 무장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전술의 고안을 모두 정걸의 공로로 돌리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하지만 수군의 변화는 16세기 중반 이후 단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렇다 해도 결정적 변화의 계기는 을묘왜변이었고, 정걸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정걸은 왜구의 침범 양상 변화에 따른 조선 수군의 무기 체계 및 전술 개선의 필요성과 그 성과를 실제 전장에서 체득했다. 수군 경력이 많지 않았던 이순신에게 정걸이 쌓은 경험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정걸이 임진왜란 첫 접전인 5월 7~8일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에 나섰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3차 출전인 7월 8일 한산도대첩에도 출전 기록은 없다. 2차 출전인 5월 29일~6월 5일 사천·당포·당항포 해전에서는 ‘정걸을 흥양현에 머물러 지키면서 계책에 맞게 호응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는 내용이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 나온다. 1·3차 출전에서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령이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정걸은 9월 1일 부산포해전에 나섰다. 전라좌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 모두 참여한 통합수군이었으니 정걸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걸은 조정에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장수였던 것 같다. 오늘날의 감각으로는 100세 노인과 다름없는 80세의 정걸이 1593년에 접어들면서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기용된 것에서도 드러난다. 앞서 전라좌수군의 조방장으로 부른 것도 이순신이 아닌 조정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정걸과 충청수군에 주어진 역할은 한강 하구를 중심으로 왜수군의 준동을 막아 평안도에 머물던 선조의 안전을 도모하면서 도성 탈환에 힘을 보태는 것이었다.
보령 오천의 충청수영성 전경. 바다에 면한 언덕 위에 호쾌한 풍광을 자랑하는 영보정(永保亭)이 보인다.
이 시기 정걸의 가장 큰 공로는 행주산성전투의 승리에 기여한 것을 들어야 한다. 선조실록에는 전라도 고산현감 신경희가 전황을 알리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기병과 보병이 섞인 적이 들판을 뒤덮었는데 숫자를 알 수 없었다. 적군이 진격해 물러가기를 8∼9차례나 했다. 화살이 떨어져 가는데 마침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 와서 위급을 구해 주었다”고 했다. 3만의 왜군이 몰려든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이 이끈 조선군이 마지막에는 부녀자까지 나서 돌팔매로 적을 막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정걸이 수군 전선으로 공급한 화살이 없었다면 행주산성 전투의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정걸의 충청수군은 한강을 더욱 거슬러 올라가 2월 15일에는 왜군 2만이 몰려들어 진을 치고 있던 용산창(龍山倉)으로 접근해 포사격을 가하기도 했다. 당시 사헌부는 “경성을 수복하는 시기를 놓치지 말라”고 청하면서 문제점의 하나로 ‘적을 죽이거나 막을 책임을 수백 명에 불과한 정걸의 피곤한 병사들에게 맡기는 것’을 들고 있다. 당시 한강에 진입한 충청수군의 전선 규모는 기록이 없지만 판옥선 3척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정걸이 노익장을 과시한 충청수군의 역할은 인상적이었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정걸이 관직에서 떠나 있던 시기에도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에 머물며 이순신의 고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594년 선조실록에는 ‘전 수사 정걸은 80세의 나이에도 나라 일에 힘을 바치려고 아직 한산도 진중에 머물러 있다고 들었다. 이 사람에게도 은사가 내려진다면 군사들도 필시 감동할 것’이라고 비변사가 상주한 내용이 나온다.
정걸의 자는 영중(英中), 호는 송정(松亭)이다. 1544년 무과에 급제했다.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1595년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 여름 세상을 떠났다. 전남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의 안동사(安洞祠)에 배향됐다.
2023-04-24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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