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아빠는 딸의 역사가 됐다

“오월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아빠는 딸의 역사가 됐다

입력 2020-05-18 18:04
수정 2020-05-19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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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소년이 40년 후 소년에게] (중) 아빠가 된 소년 시민군

다시 오월, 父女의 이야기

1980년 5월 폭력의 기억은 여전히 트라우마다. 40년이 흘렀지만 누군가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 닥치면 지금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조건반사처럼 그 끔찍한 고문과 조사관이 떠오른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매를 맞다 정신을 잃으면 고향집 앞 마당이었고, 양동이 물로 정신이 돌아오면 505보안부대 조사실이었다. 그렇게 이봉주(59) 조선대 물리학과 교수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다. 그의 나이 19세, 광주 금호고 2학년(1년 휴학)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소년은 중년이 됐고, 당시 소년만 한 나이의 딸이 생겼다. 딸 재민(19)양은 올해 고려대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했다. 이 교수는 딸이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고문당한 얘기를 털어놨고, 종종 그때 얘기를 나누곤 한다. 이 교수는 딸과 그 또래에게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끔찍했던 경험 탓인지 혹시라도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라고 얘기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럽다. 다만 “우리 사회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했다. 딸 재민양은 아빠에게 “모진 고문에도 살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아빠의 트라우마가 더는 우리 사회에서 반복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서울신문은 지난 13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했던 옛 전남도청 앞 광주 동구 금남로의 한 사무실에서 이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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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이틀 앞둔 지난 16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에서 광주 시민군이었던 이봉주 조선대 교수와 그의 딸 재민양이 손을 잡고 걷고 있다.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이틀 앞둔 지난 16일 서울 성북구 안암동 고려대에서 광주 시민군이었던 이봉주 조선대 교수와 그의 딸 재민양이 손을 잡고 걷고 있다.
오장환 기자 5zzang@seoul.co.kr
●까까머리 소년, 계엄군 만행에 분노하다

40여년 전 소년은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교직에 계셨던 아버지는 당시 박정희 군부 정권을 대놓고 비판은 못했다. 다만 가끔 가족에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소년은 스스로 찾아봤다. 당시 ‘신동아’ 잡지에 실린 유신헌법을 비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대 김상진(당시 26세) 열사의 기사를 읽고 ‘고귀한 죽음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무고한 희생을 볼 때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본가가 전남 나주였지만 광주에서 유학했다. 1980년 금호고 2학년 시절 3㎞ 거리에 전남대가 있었다. 비상계엄령이 확대될 무렵 등교할 때마다 대학생 형들의 시위를 목격했다. 교련복 입은 전남대생들이 “전두환은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를 외치며 전경, 군인들과 대치했다. 그리고 대학생 형들이 계엄군이 휘두르는 곤봉에 맥없이 꼬꾸라지는 모습을 봤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그때 소년은 아버지의 혼잣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17일부터 시위에 참여해 구호를 외쳤다.

●“광주는 어떠냐” 묻고 따라오라더니 고문

20일 광주 지역 중·고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때마침 나주에 계신 부모님이 모내기 일손이 부족하다고 연락이 왔다. 소년은 본가에 내려갔다. 광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22일 오후 2시쯤 큰집 사촌 형이 영산포 시내에 시민군 버스가 돌아다닌다고 전해 줬다. 설마 싶었다. 영산포 시내로 나갔는데, 진짜였다. 손을 번쩍 들고 광주에서 영암 방면으로 향하는 버스를 세워 탔다.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구호는 세 가지였다. 이후 영암군에서 지프차와 군용레커차, 앞 유리가 깨진 광주고속버스 등을 포함해 차량 7~8대가 일렬로 행진했다. 시민군은 인근 경찰 지서(지금의 파출소)에서 카빈소총과 폭탄 등 무기를 빼냈다. 시민군은 무기를 확보하고자 전남 지역으로 내려온 듯했다. 소년도 카빈소총과 철모, 탄띠로 무장했다. 시민군은 해남 군부대로 향했으나 더는 진격하지 않고, 원래 목적지인 광주로 향했다. 그러나 광주로 가는 길목은 모두 계엄군에 의해 차단당했다. 하늘에선 헬기 소리가 들렸다. 시민군 대열은 광주 효촌동 앞 연탄공장, 송정리 광주비행장 입구, 송정기차역 등에서 모두 저지당했다. 특히 광주비행장 입구에서 계엄군 탱크가 포신을 시민군 쪽으로 돌렸을 때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이미 하루가 지난 터라 부모님이 걱정하실 것 같았다. 23일 오전 10시쯤 나주 본가로 돌아가기 위해 광주비행장에서 남쪽인 영산포를 향해 걸었다. 송정리 민가에 들러 카빈소총 등을 맡겼다. 어떤 마을 경찰 지서(파출소)를 지나고 있을 때 낯선 사람이 “광주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데모하고 그럽디다” 하고 답했더니 잠깐 따라오라고 그랬다. 따라갔더니 파출소 숙직실이었다. 그는 무전기로 “폭도 2명을 잡았다”고 보고했다. 30분 만에 장갑차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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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인간의 잔인함과 비참함의 끝을 보다

끌려간 곳은 광주비행장 조사실이었다. 이름과 나이, 부모의 직업을 비롯해 그간의 행적을 모두 불라고 했다. 겁에 질린 소년은 빠짐없이 사실대로 다 말했다. 무장했다는 사실까지 털어놨다. 폭행은 가차 없었다. 고등학생이 공부 안 하고 시위에 참여했다고 무수히 맞았다. 한 시간쯤 조사받고 광주 서구 화정동에 있는 505보안대로 인계됐다. 백열전구 하나 켜진 조사실은 입구부터 피비린내가 났다. 2차 조사가 시작됐다. 물고문도 두 종류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코와 입에 천을 대고 물주전자를 붓는 것과, 물을 계속 먹이고 뛰게 하는 것. 사람이 많이 맞으면 피오줌이 나온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됐다.

소년은 그곳에서 인간의 잔인함과 비참함의 끝을 봤다. 매를 피하려고 개처럼 의자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자신을, 살려 달라고 비는 소년을 비웃으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성인 남성을 목격했다. 돌이켜 보면 정신이 나갔었다. 눈 감으면 나주 집 마당에서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눈 뜨면 고문이 시작됐다. 조사가 끝나도 폭행은 멈추지 않았다. 수감실은 파놉티콘(원형감옥) 형태였다. 보안사 직원 한 명이 모든 재소자를 볼 수 있다. 재소자들이 이 직원을 정점으로 일렬로 무릎 꿇고 있는데, 자세가 흐트러질라 치면 보안사 직원은 군화로 무릎을 짓이겼다. 역설적이게도 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수복되는 날, 소년은 한결 편해졌다. 잡혀 온 사람이 많아지면서 감시도 매의 빈도도 낮아진 것이다. 그렇게 103일간 구속돼 고문을 받았다. 속으로 ‘10년 정도 옥살이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행히 검찰은 소년에게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다.

●40년 후… 진실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

소년은 1982년 조선대 물리학과에 진학했고, 일본에 유학을 가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0년 모교로 돌아와 물리학과 교수가 됐다. 이 교수는 유학 생활이 힘들 때면 5·18민주화운동 때 받았던 고문을 생각했다. 그러면 조금은 위안이 됐다. 딸 재민양은 1993년 결혼해 낳은 둘째다. 딱 40살 차이 나는 늦둥이다. 이 교수는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5·18민주화운동 행사에 데려가 그간 겪었던 일들을 설명해 줬다. 당시 재민양은 아버지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교과서에서만 듣던 얘기가 아빠의 역사일 줄은 몰라서다. 재민양은 아버지에게 자부심도 느꼈다. 중학교 때는 학교 공개수업 때 주제가 5·18민주화운동이면 본인이 발표하겠다고 자원했다. 1차 자료를 인터넷이 아닌 아버지에게 얻었다. 실제로 5·18은 재민양에게 학창 시절 내내 주요 ‘화두’였다. 이 관심은 민주화운동으로, 나아가 근현대사로 확장됐다.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주 사람인데도 ‘북한에서 지령받은 사람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오해하고 있을 때마다 진상이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께 항상 죄송하고 감사해요. 아버지가 인류애를 상실할 만한 일을 당하던 똑같은 시기에 저는 교실에서 편하게 공부만 했잖아요. 힘들다고 응석 부린 걸 생각하면 자식으로서 죄송해요. 아버지가 트라우마로 여기고 피해 사실을 계속 외면할 수도 있는데, 제게 말씀해 주신 것도 감사하죠. 덕분에 제 시야가 트였고, 인생의 목표를 찾는 데도 도움이 컸어요. 아버지는 제 은인이에요.” -딸 재민이 아빠에게

“진로에 대해 한 번도 ‘이것 해라, 저것 해라’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제 아버지도 정부가 잘못됐다는 말은 해도, 나가서 싸우라고 한 적은 없거든요. 부모가 그래요. 자기 생각을 강요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딸이 스스로 억울한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기특할 따름입니다. 또래 친구들도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어요.” -40년 전 시민군 아빠가 딸에게

광주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광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2020-05-19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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