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가 아니라 열여섯 문재학… 5월을 지켜낸 이름입니다

빨갱이가 아니라 열여섯 문재학… 5월을 지켜낸 이름입니다

입력 2020-05-17 22:08
수정 2020-05-18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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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싸운 ‘10대 시민군 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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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재수복하기 위해 진격을 개시한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 남아 있던 문재학·박성용·안종필군은 끝까지 저항하다 M16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사진은 친구와 함께 인근 산에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은 박군(왼쪽)의 모습. 유족 제공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재수복하기 위해 진격을 개시한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 남아 있던 문재학·박성용·안종필군은 끝까지 저항하다 M16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사진은 친구와 함께 인근 산에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은 박군(왼쪽)의 모습.
유족 제공
용기는 나이에 비례하지 않는다. 전두환 신군부 계엄군이 곧 들이닥칠 걸 알면서도 까까머리 소년들은 끝끝내 도청에 남았다. 누군들 죽음이 두렵지 않았을까. 한사코 말리는 가족을 뒤로하고 총을 든 10대 시민군은 장렬히 산화했다. 지금 그들이 살아 있다면, 50대 중반의 나이다. 평범했을지도 모를 삶이 국가 폭력으로 사라진 후 야속한 40년이 흘렀다. 서울신문은 17일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문재학(당시 16·광주상고1), 박성용(17·조대부고3), 안종필(16·광주상고1)군의 유족을 만났다. ‘빨갱이’의 가족으로 몰려 모진 세월을 보낸 이들이다. 생때같은 아들과 동생의 죽음을 부정당할 때마다 마음속 상처는 수없이 덧났다. 유족들은 지금 재학이, 성용이, 종필이 나이인 소년·소녀들에게 한 가지만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놓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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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군의 누나 안경순씨가 소복을 입고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를 기리는 행사에서 추도문을 읽고 있다.  유족 제공
안군의 누나 안경순씨가 소복을 입고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를 기리는 행사에서 추도문을 읽고 있다.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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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군을 기리고자 고등학교 동창이 조대부고 교정에 세운 추모비. 유족 제공
박군을 기리고자 고등학교 동창이 조대부고 교정에 세운 추모비.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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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쉼터’ 모습. 유족 제공
‘5월의 쉼터’ 모습.
유족 제공
“혼자 어찌 가겄어요”… 열흘 만에 ‘관 번호 94’로 돌아온 재학이

문재학 (1964년 6월~1980년 5월)

●가족 먼저 생각하고 애교 많던 막내
김길자씨
김길자씨
어려서부터 그랬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 생활이 어려워지자 재학이는 상업고등학교에 가겠다고 자청했다. 어머니 김길자(80)씨가 “누나도 인문계 갔는데, 너는 왜 상고 갈라 그라냐” 묻자 “공부 잘해 은행 취직하면 아부지 돈 찾기 쉽지 않것어요”라고 답하던 아들이었다. 재학이는 3남매 중 막내였다. 애교도 많았다. 세 사람 누우면 꽉 차는 좁은 다락방에서 막내 재학이는 꼭 엄마와 아빠 사이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들의 온기는 따듯했다.

“엄마, 창근이가 죽어갖고 드러누워 있어요. 관에 담아지지도 않고 그라는디, 어찌 놔두고 가겄어요.”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전남도청 재수복 작전)이 시행되기 이틀 전인 25일 도청에서 시신을 수습하던 재학이, 엄마에게 한 말이다. 재학은 전날부터 도청에서 시신 수습하고 유족 안내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시위 도중 총에 맞아 사망한 초등학교 동창 양창근(16·숭일고1)군을 본 것이다. 김씨는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내 자식만 살리자고 재학이를 데리고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창근이 시신만 수습하고 집에 오겠다는 아들을 김씨는 믿었다.

다음날에도 아들은 집에 오지 않았다. 김씨는 남편과 함께 도청에 갔다. 본관에 들어서자 재학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1층으로 내려왔다. 집에 가자고 사정했지만 아들은 통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설득에 실패하고 재학이를 두고 집에 왔다. 그날 통금 시간인 오후 7시 재학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차가 끊겨 못 온다는 말에 김씨는 맥이 풀렸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담긴 재학이

27일 새벽 3시쯤 됐을까. 도청에서 나는 총소리는 꼭 번개 같았다. 김씨는 발만 동동 굴렀다. 그래도 학생은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살아 있을 거란 작은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김씨는 남편과 함께 도청으로 갔다. 새벽 6시쯤 도착했는데, 시민군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물청소까지 하고 난 뒤였다.

열흘 동안 아들을 찾아다녔다. 6월 6일 재학이 학교 담임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남일보에 사망자 명단이 실렸는데, 재학이가 있다는 것이다. 계엄사 4-3, 묘지번호 104, 관 번호 94. 국가는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시신을 망월동에 묻었다. 재학의 이야기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담겼다. 친구 정대의 시신을 수습하겠다며 도청에 남은 주인공 동호가 재학이다.

오월이 되면 김씨는 아들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 자식 죽은 것도 서럽고, ‘빨갱이’로 낙인찍혀 사람 대접 못 받은 세월도 분하다. 지금은 크게 바라는 것 없다. 아들 재학의 죽음이, 5·18의 역사가 잊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지가 무식해서 무슨 할 말이 있당가요. 재학이 같은 선배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갔다는 걸 꼭 기억해 줬으면 좋겠지요. 그거면 됐어요.”

“무고한 사람들을 왜 때린다요”… 계엄군 만행에 잠 설치던 성용이

박성용 (1963년 1월~1980년 5월)

●경찰 꿈꾸며 손에서 책 놓지 않던 모범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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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숙씨
박해숙씨
성용이는 경찰이 되고 싶었다. 공부도 잘해 경찰대학을 지망했다. 천상 사내였다. 말이 없었지만 우직하고 인내심이 강했다. 한여름 폭염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큰누나 박해숙(68)씨가 “안 더웁냐”라고 물으면, 성용이는 “여름이니까 덥지”하고 말았다. 자기 할 일은 알아서 했다. 주변 정리도 깔끔해 남동생 셋 중에 성용에게 유독 마음이 더 갔다. 그런 성용이가 27일 도청에서 끝까지 남아 계엄군과 싸우다가 총에 맞아 숨졌다. 시신도 열흘 뒤 망월동에서 찾았다. 제대로 된 관도 구하지 못해 박판(베니어·원목을 칼로 얇게 켠 것)으로 만든 관이었다. 썩은 피가 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장 귀하게 여겼던 둘째 동생 성용이는 그렇게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무자비한 실탄 발포가 있었던 21일 광주는 분노로 가득 찼다. 성용이도 마찬가지였다. 계엄군의 총칼은 아이와 여성, 노인을 가리지 않았다. 처참한 광경을 본 성용은 집에 와서도 잠도 못 자고 씩씩거렸다. 박씨도 분했지만, 동생 걱정이 앞섰다.

“너같이 어린 것이 나가서 뭣을 하것냐. 너도 개죽음당하기 십상이여. 긍게 성용아. 지발 나가지 말고 집에 좀 있어라잉. 어미 말 좀 들어.”

●성용이 잃고 화병으로 아버지도 떠나

어머니의 걱정에도 성용이는 자주 집을 나갔다가 돌아와 목격한 참상을 가족에게 얘기했다. 성용이는 자취하는 친구가 걱정된다며 26일 집을 나갔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도청에 들어간 것이다. 형들은 어린 성용을 집으로 보내려 했지만 성용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성용이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화병에 매일 술로 지새우다 1년 뒤 결국 숨을 거뒀다. 어머니는 재학이 엄마 김씨와 함께 5·18 참상을 알리려고 매일같이 시위현장에 나가 최루탄을 뒤집어썼다.

그로부터 40년이 흘렀다. 얼마 전 조대부고 동창 150여명이 기금 3000여만원을 모아 2020년 5월 17일 성용이를 기리는 추모비를 교정에 세운다고 연락이 왔다. 그 옆에 학교 후배들이 쉴 수 있도록 ‘오월의 쉼터’도 만들었다고 한다. 누나 박씨는 지금 학생들이 5·18이 왜 발생했는지 원인과 결과까지 폭넓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5월 광주에 있었던 사실을 있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했다.

“지만원도 그렇고 우리를 여전히 빨갱이로 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전혀 아니었어요. 광주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였어요. 김밥이며, 음료수 값이며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내놨어요. 4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건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예요.”
그날 죽음 예견한 듯… 인적 사항 적어 주머니에 넣고 싸운 종필이

안종필 (1964년 7월~1980년 5월)

●맨손으로 동네 꼬마 코 닦아주던 정 많은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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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순씨
안경순씨
27일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시민군 가운데 교련복 차림의 소년이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얼마 전 산 교복 영수증과 500원, 그리고 인적 사항이 적힌 쪽지가 나왔다. 광주상고 1학년 안종필. 종필이는 계엄군이 몰려오는 날 도청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했다. 이 쪽지 덕에 가족들은 다음날인 28일 종필의 사망소식을 접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족들은 종필이를 찾아 수십일씩 헤맬 필요가 없었다. 죽음 직전에서도 가족을 배려한 종필이었다.

누나 안경순(63)씨 기억에 종필이는 참 사랑이 많았다. 동네 꼬마들이 코 흘리고 있으면 맨손으로 닦아 줬다. “더럽지도 않냐”고 물으면 “더럽긴요. 닦아 줘야죠”하고 종필은 답했다. 먹을 것 생겨도 자기 입으로 먼저 들어가지 않았다. 가족을 챙겼고, 배고픈 친구를 먼저 챙겼다. 어머니가 하는 식당에서 어려운 친구들 밥 먹이고 고기도 먹였다. 종필이가 엄마 심부름으로 고기 사러 가면 정육점 주인은 더 좋은 부위를 골라 줬다. 동네 사람들은 고기 살 일 있으면 종필에게 부탁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 심부름까지 하는 게 언짢아 한마디 하면 종필은 “나 믿고 시킨 일을 어떻게 안 한단가. 그것 좀 해주믄 또 어찐단가. 엄마 그러지 마”라며 타박을 무색케 했다. 어머니 가게에 들어선 손님들은 종필이부터 찾았다. 누나 안씨는 인터뷰 내내 울먹였다. 인터뷰하고 나면 동생이 너무 보고 싶어져 처음엔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러나 동생의 흔적을 남겨야 했다. 그리고 남기고 싶었다.

●누나는 어린 동생 폭도로 모는 신군부와 투쟁

종필이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 참다 못한 어머니가 26일 종필의 신발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옷을 죄다 물에 담가도 종필은 몰래 집을 빠져나갔다. 입을 옷이 없어서 두꺼운 겨울용 교련복을 꺼내 입었다. 하필 아버지 기일이었다. 제사 준비에 정신이 없었다. 27일 새벽, 총소리가 창문을 뚫었다. 어머니는 종필이가 죽었다고 직감했다. 28일 광주시청 간부에게서 연락이 왔다. 종필이 시신이 상무관에 안치됐다는 전보였다.

도청에 실려오는 무연고 시신을 보며 종필은 분노했을 것이다. 누나 안씨는 ‘자신마저 도청을 떠나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누가 돌보느냐’는 책임감으로 종필이 맞섰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종필을 신군부가 폭도라 몰았을 때 누나 안씨는 결심했다. ‘너는 절대 폭도가 아니다. 그러니 누나가 열심히 투쟁할게.’ 안씨는 유족회에서 수년간 총무를 맡아 줄기차게 싸웠다.

누나 안씨는 소년들이 정의감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야 살 만한 세상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좌우가 너무 극과 극으로 갈리니까 가슴 아파요. 서로 믿고 따듯한 사회가 와야 종필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거잖아요. 전두환부터 본인 입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청소년들도 거짓됨 없이 진실한 삶을 살지 않을까요.”

광주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광주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서울 손지민 기자 sjm@seoul.co.kr
2020-05-18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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