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씨는 이름처럼 살았을까

‘순자’씨는 이름처럼 살았을까

이슬기 기자
입력 2020-10-04 20:38
수정 2020-10-05 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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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출간한 황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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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를 쓰는 작가 황정은에게 코로나19 시대의 일상을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플까 봐 매일 걱정하죠. 기후변화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서 요즘 그걸 공부하고 있습니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당대를 쓰는 작가 황정은에게 코로나19 시대의 일상을 물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플까 봐 매일 걱정하죠. 기후변화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서 요즘 그걸 공부하고 있습니다.”
박윤슬 기자 seul@seoul.co.kr
사는 동안 많이 만났던 ‘순자’라는 이름
순하게 사는 게 뭘까 의문에서 글 시작
‘1946년생 순자’ 이순일과 두 딸 이야기
“살면서 무엇을 이어갈지 선택할 수 있어”

“‘디디의 우산’을 쓰며 ‘대대손손’이라는 말을 생각하다가, ‘연년세세’를 떠올렸어요. 대대손손은 수직적인데, 연년세세는 수평적으로 과거·현재·미래를 오갈 수 있는 말처럼 보였어요. 우리가 살면서 무엇을 이어갈지 조금 더 선택할 수 있는 말 같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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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年年歲歲). 황정은의 신작 연작소설 제목이다. ‘해마다 또는 매년’을 이르는 단어를 사전에서는 ‘대대손손’ 등과 바꿔 쓰기도 한다고 적었지만, 작가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다. “쓰는 내내 인물들의 삶이 내게 너무 가까웠다”고 말하는 작가를, 최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만났다.

책에는 ‘파묘’, ‘하고 싶은 말’, ‘무명’, ‘다가오는 것들’ 네 편이 연작으로 실렸다. ‘1946년생 순자씨’ 이순일과 그의 두 딸 한영진, 한세진의 이야기가 각각 시점을 달리해 이어진다. 소설은 ‘순자’라는 이름에서 비롯됐다. ‘작가의 말’에 “사는 동안 순자,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며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썼다. 아기 이름을 지을 때 자신들의 소망을 담는 경우가 많은데, ‘순자’라는 이름을 붙였다면, 그 아이가 순하게 살기를 바라겠구나, 하는. 작가는 “자기한테 주어지는 삶의 조건이 있는 시대에 한 사람이 순하게 산다는 건 대체 뭘까, 순하게 살기를 요구받는다는 건 뭘까 생각했다”고 부연했다.

순자씨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악덕 고모네에서 식모처럼 일한다. 이름이 같던 친구 순자의 소개로 병원에서 간호조무일을 하지만, 그의 배신으로 다시 고모네로 끌려온다. 한중언과 결혼해 호적을 떼어 본 뒤에야 본명이 ‘이순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단편의 이름이 ‘무명’이다. “순자가 자기 이름인 줄 알고, 순자로서의 삶을 살아버렸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특정 세대를 구분 짓거나 관계로 사람을 부르지 않고, 성까지 붙여 호명한다. 그것이 그가, 소설 속 개개인의 존엄을 지키는 방식이다.

이순일은 남편과 함께 맏딸 한영진 부부의 집에 머물며 두 집 살림을 한다. 백화점에서 침구 판매원으로 일하는 한영진은 “엄마가 좋은 걸 써야 한다”고 호객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못 돌보는 인물이다. 둘째 딸 한세진은 이순일이 외조부의 묘를 파헤치는 길에 동행하지만 함께 살지는 않고, 막내아들 한만수는 일자리를 찾아 뉴질랜드로 떠났다.

엄마와 가장 밀착된 한영진이 이순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하고 싶은 말’ 중, 81쪽) 그들에게는 그것이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 ‘용서를 구할 수 없는 일’(‘무명’ 중, 142쪽)이기 때문이다. “저는 그게 한영진 나름의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하려면 이순일이 살아온 삶 자체를 ‘잘못 살았어’라고 당사자를 앞에 두고 부정해야 하니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순일 세대는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많지 않았고, 한영진에게는 살림이라는 것을 말 그대로 ‘사람을 살리는 일’로 여겼던 이순일에 대한 이해가 있다. “변화 가능성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던 삶에 대고 ‘당신은 왜 변하지 않았냐’고 묻는 건 잔혹한 일인 것 같”다고, “그리고 그것이 이번 소설을 통해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다”고 작가는 힘주어 말했다.

책의 표지에는 서로 교차하며 접점을 만드는 크고 작은 타원들이 그려져 있다. 작가는 이를 “함께 밀어내며 나아가는 ‘연년세세’ 같은 고리”로 봤다. 소설 속 모녀는 서로에게 못 하는 말들이 있지만, 작가는 현실에서는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의 독자들은 무엇을 이어갈지를 선택할 수 있으니까, 소설 바깥에서 각자의 삶으로요. 소설 속에서도 한세진과 하미영은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초판 사인본에 적힌 작가의 글귀가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20-10-0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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