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에 어쩌다 ‘천한 피’ 한 방울이 튄
송익필 가문 몰락으로 본 조선 신분제
당시 인포데믹·붕당정치 대립 엿보여
나는 선비로소이다/임상혁 지음/역사비평사/312쪽/1만 8000원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 중 ‘종로에서 치도곤을 때리다’란 제목의 그림. 당대의 대학자였던 송익필도 아버지에 대한 판결에 항의하러 사법기관을 찾았다가 이처럼 볼기를 깐 채 곤장을 맞았을 것이다.
역사비평사 제공
역사비평사 제공
당시 피고 측이었던 송씨 가문은 학문으로 명망이 높고 왕실과도 혼맥이 닿은 거족이었다. 원고 측인 안씨 가문도 뒤질 게 없었다. 1521년에 권신 제거 모의를 했다는 죄(신사무옥)로 몰락했지만 수십 년 뒤 복권되고 나라님이 시호까지 내려준 집안이었다. 두 집안이 무슨 사연으로 이 같은 송사를 벌였을까.
‘나는 선비로소이다’는 이 신분 확인 소송의 판결문인 ‘안가노안’(安家奴案)을 토대로 당시의 법과 정치를 들여다본 책이다. 법학자인 저자가 이끄는 대로 이 노비소송을 따라가다 보면 조선의 신분제도뿐 아니라 ‘경국대전’의 각종 법률 규정, 더 나아가 당시의 ‘인포데믹’(잘못된 정보가 전염병처럼 퍼지는 현상)과 붕당정치로 대립하는 정치 상황까지 파악할 수 있다.
송씨 집안 70여명 생사가 걸린 이 소송에서 주인공은 단연 구봉 송익필(1534~1599)이었다. 그리 귀에 익은 이름은 아니지만 시와 문장에 뛰어나 당대의 문장가로 꼽혔고, 이이나 성혼 등과 돈독한 우정을 나눴으며, 예학의 대가이자 대유학자로 사림의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인조 때의 명재상인 김류는 그를 중국의 제갈공명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소송에 져 한순간에 노비로 전락하고 만다. ‘천한 피’가 족보에 한 방울 튀었다는 걸 빌미로 당대 최고의 학자를 파멸로 몰아간 것이다.
당시 소송 과정을 요약하면 이렇다. 송익필의 할머니 감정이 안씨 가문 안돈후의 비첩의 소생이었던 게 문제가 됐다. 안씨 집안에선 당시 신분제에 따라 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이면 그 자녀도 노비라는 논리를 앞세웠고, 송씨 집안에선 천첩자녀들이긴 하나 보충대(천인이 일정 기간 복무하면 양인이 됐던 제도)에 편성됨으로써 양인의 자격을 얻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결과는 송씨 집안의 완패, 신분제의 완승이었다.
저자는 이 판결에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 많다는 입장이다. 우선 발단부터 그렇다. 두 집안 싸움의 불씨가 된 건 1521년 신사무옥이었다. 당시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의 고변으로 권신이었던 안씨 집안의 안당과 두 아들이 사형을 당했고 가문도 몰락했다.
저자는 ‘안가노안’에 견강부회의 법 적용이 많아 보인다고 했다. 당시 정치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아울러 아버지 송사련의 공소시효를 두고 당시 법과 법리 적용이 타당했는지도 묻고 있다. 1589년 기축옥사 때 송익필의 이름이 또 한번 지목된다. 이 옥사를 기획하고 조정한 막후 인물이 송익필이라는 건데, 저자는 이 역시 인포데믹이라고 지적한다.
이 책의 전편 격인 ‘나는 노비로소이다’(248쪽, 1만 6000원)가 2010년 초판 이후 10년 만에 재출간돼 다시 나왔다. ‘나는 노비로소이다’가 조선시대 법과 소송에 대한 입문서라면 ‘나는 선비로소이다’는 이에 대한 심화편이다.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2020-07-24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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