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위상학/한병철 지음/김태환 옮김/김영사/232쪽/1만 4800원
이런 죽임의 폭력은 황제 숭배의 본질적 요소이며 화려하게 연출된다. 만인 앞에 무시무시한 피의 폭력을 보여 줘 지배자의 권력과 위엄을 다지는 양식이다. 이런 국가 차원의 전시적 폭력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약자에 대한 물리적 폭력과 혐오 범죄가 쏟아지고 은폐된 폭력을 까발리는 증언이 폭발한다.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베를린예술대 교수를 지낸 재독 철학자 한병철 박사는 `폭력의 위상학´을 통해 그 폭력의 역사성과 본질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특히 지금 시대의 폭력이 오히려 과거의 야만적인 전시성 폭력보다 더 위험하다고 강조해 눈길을 끈다.
폭력의 위상은 다양하게 변해 내려온다. 태고의 희생 제의에서 흔한 `피의 폭력´, 참수를 명하는 고대 `주권자의 폭력´, 중세의 무자비한 `고문 폭력´과 가스실의 `무혈 폭력´, 감정을 짓밟는 `언어 폭력´까지. 폭력은 점차 정당성을 상실해 갔지만 지금 세계에서 폭력은 더 내면화하고 심리화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지론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라고 단정한 저자는 타인이나 외부에서 오는 테러보다 내재적 테러가 더 위협적이라고 경고한다. 효율성에 쫓긴 사람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가 되며 자기 착취와 우울증, 소진의 덫에 걸린다. 이런 `긍정성´의 폭력은 경고도 없고 뚜렷한 적도 없기 때문에 `부정성´의 폭력보다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역자의 후기가 인상적이다. “이 책의 어조는 성과사회의 필연적인 파괴와 몰락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역설적으로 이 저주스러운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를 묻고 또 묻는 저자의 번민을 드러내 준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2020-06-19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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