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적 여성들 유고집 잇단 출간
실비아 플라스
산문으로 온 허수경 ‘오늘의 착각’
허수경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은 60여년 만에 최초 공개되는 플라스의 미발표 소설이다. 1952년에 쓰인 소설은 정식 출간되지 않은 채 미국 인디애나대에 보관돼 있다가 지난해 영국 출판사 페이버 앤드 페이버에서 초고를 그대로 살린 판본으로 펴냈다. 여덟 살에 보스턴 헤럴드지에 시를 발표했던 플라스는 스미스대학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장학생으로 들어가 겉으로는 전형적인 모범생의 삶을 살았다. 불세출의 천재인 그의 시 전집은 1981년 작가 사후에 출간된 책으로는 유일하게 퓰리처상 시 부문을 수상했다. 그는 생애 내내 여성은 분노도, 경력에 대한 야심도 표출하지 않고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는 데서 성취감을 찾아야 한다는 당대의 여성관과 부단히 싸웠다. 결국 영국 계관시인 테드 휴스와의 불행했던 결혼 생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소설은 메리 벤투라라는 소녀가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 홀로 기차 여행에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소녀가 알고 있는 사실은 손에 쥔 티켓이 종착역 ‘아홉 번째 왕국’으로 향하는 편도행이라는 것뿐이다. ‘10대 여성의 나 홀로 여행’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설정의 책은 여성들 사이 우정과 연대, 삶에 대한 주체적 선택을 주제로 한다. 시대와 불화했지만 스스로와는 화해한 시인의 자전적인 얘기로도 들린다. 60여쪽의 짧은 소설을 진은영 시인이 한국어로 옮겼다.
허 시인의 생일인 6월 9일에 맞춰 출간된 ‘오늘의 착각’은 2014~2016년 8회에 걸쳐 문학 계간지 ‘발견’에 연재한 산문을 모았다. 책은 시인 특유의 시론이자 ‘착각론’이다. 그는 착각이란 ‘우리 앞에 옆에 뒤에 그리고 언제나’ 있으며, ‘시인이 이 지상에 개점한 여관에 든 최초의 손님들 가운데 하나’(4쪽)라고 말한다. ‘시인의 영혼에게 가장 많은 잔심부름을 시키는 이 손님을 시인은 내몰 수가 없다. 잔심부름의 대가로 시인이 얻는/잃는 것이 너무나 많기에.’(4~5쪽).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20-06-15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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