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올 필요 없답니다 민주화가 되었답니다/민주화되었으니 흔들지 말랍니다/민주 정부 되었으니 전화하지 말랍니다/민주화되었으니 개소리하지 말랍니다//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겨울비 온다/어깨에 머리에 찬비 내린다 배가 고파온다/이제 나도 저기 젖은 겨울나무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48~49쪽, 시 ‘겨울비’ 일부)
한국 노동시를 대표하는 백무산(65) 시인이 열 번째 시집을 냈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다.
대기업 공장노동자 출신의 시인은 1984년 무크지 ‘민중시’로 데뷔한 이래 줄곧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대변해왔다. 시작 36년을 맞는 시인은 그간 노동 현실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원적 비판이나 생태 문제 등으로 시 세계의 폭을 넓혀 왔다. 가령 이번 시집에서는 특히 시간에 대한 남다른 통찰과 전복적 사고를 보여준다. 그는 ‘혁명의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정지의 힘’을 예찬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와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58쪽, 시 ‘정지의 힘’ 일부)를 찾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저항하는 방법도 그와 다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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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시인
ⓒ구정회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시인은 현실 정치는 소모적인 일상, 스스로를 소외하는 지친 삶에 기생하고 그러한 현실을 재생산한다고 말했다. 이어 “문학인이 그러한 제도권 정당정치에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위임하고, 수동적으로 동원되는 일은 문학정신에도 어긋난다는 생각”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시인 자신은 향후 삶의 계획에 대해 “별 수 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란다. ‘죄 없는 자들일수록 더 많이 참회하고/적게 먹는 자들이 더 많이 감사하고/타락하지 않은 자들이 더 많이 뉘우치고/힘들여 사는 자들일수록 고행의 순례길을 떠나고/적게 살생한 자들이 더 많이 속죄한다는//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그것이 나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20쪽, 시 ‘히말라야에서’ 일부) 그가 ‘별 수 없는 삶’ 속 열 권의 시집을 낸 지난 36년이, 그에게는 무감동이라지만 읽는 이에게는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132쪽. 9000원.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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