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생태환경사
최악의 가뭄은 사람뿐 아니라 야생동물들에게도 큰 시련이다. 먹이가 없어 인가로 내려왔던 야생동물들이 이번에는 가뭄에 마실 물이 없는 고초를 겪고 있다.사실 난개발로 인한 동물들의 피해는 어제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난개발이 줄을 이었고, 동물들은 그때마다 피해를 입었다. 한국교원대 김동진 교수의 ‘조선의 생태환경사’(푸른역사)는 생태환경의 변화가 촉진한 조선의 시대상을 조명하면서, 갖가지 동물들의 수난사도 제법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조선 건국과 함께 가장 큰 화를 입은 것은 호랑이다.
“백성은 하늘이었고,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은 먹을거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중농정책을 추진한 조선은 농지를 늘리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다. 대개의 황무지와 산림천택(山林川澤)은 논밭으로 변했다. 산림이 논밭으로 변하자 호랑이는 안방을 잃어버렸고, 결국 민가로 내려와 가축을 잡아먹는 등 민초들의 삶에 피해를 주었다. 조선이 건국 초기부터 포호정책(捕虎政策)을 실행한 이유인데, 죽어서 남긴 가죽이 고가에 팔리자 무분별한 사냥도 횡행했다. 그렇게 서서히 한반도의 호랑이는 절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생태계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가 이 정도라면, 여타 동물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세조 때부터 성종 무렵까지 한번에 1000여 마리를 사냥할 수 있었던 꽃사슴은 17세기 이후 거의 사라졌다. 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말은 군사적 필요와 교통수단 확보를 위해 대개 국가에서 관리했는데, 1만∼10만 마리로 늘고 줄기를 반복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최소 3만에서 최고 8만 마리를 유지했지만, 이후 교통수단의 발달과 농기계 등의 도입으로 개체 수가 확연히 감소했다.
조선시대 중농정책이 모든 동물을 죽음의 길로 내몬 것은 아니다. 노동력을 제공한 소는 15세기 초 2만∼3만 마리에 불과했는데, 18세기 후반에는 무려 100만 마리 이상으로 늘어났다. 늘어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역시 인간의 탐욕이 원인이었다. 산림천택 중 천택, 즉 내와 못 주변도 농지로 만드는, 이른바 ‘무너미’ 땅 개간이 역효과를 낳았다. 습한 토양 조건에서 각종 해충이 생겨나면서 동물과 인간에게 전염병을 옮겼던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숙종 33년에 함경도에서만 홍역으로 “1만 수천 명”이 죽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장동석 출판평론가
2017-06-1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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