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성에 갇힌 역사학, 해방은 언제 오나

식민성에 갇힌 역사학, 해방은 언제 오나

안동환 기자
안동환 기자
입력 2016-11-11 18:08
수정 2016-11-11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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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부터 축적된 韓 역사학 조명

한국 역사학의 기원/신주백 지음/휴머니스트/448쪽/2만 3000원

식민주의 역사학에 맞서 출간됐던 민족주의 사학 서적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신채호의 ‘조선사 연구초’,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 문일평의 ‘조선사화’,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휴머니스트 제공
식민주의 역사학에 맞서 출간됐던 민족주의 사학 서적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신채호의 ‘조선사 연구초’,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 문일평의 ‘조선사화’,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휴머니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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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연구자로, 조선의 정신으로 조선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조선학 운동’을 펼쳤던 민족주의 사학자 안재홍(1891~1965). 휴머니스트 제공
식민지 조선의 연구자로, 조선의 정신으로 조선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조선학 운동’을 펼쳤던 민족주의 사학자 안재홍(1891~1965).
휴머니스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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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연구자로, 조선의 정신으로 조선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조선학 운동’을 펼쳤던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1893~1950). 휴머니스트 제공
식민지 조선의 연구자로, 조선의 정신으로 조선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조선학 운동’을 펼쳤던 민족주의 사학자 정인보(1893~1950).
휴머니스트 제공
한국 역사학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일제 강점기로 인한 식민성과 분절성, 그리고 분단성에서 자유롭지 않은 ‘구속된 학문’이라는 점에서다. 역사학이 여타 다른 학문보다 해명해야 할 부분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70년이 흘렀지만 극복되지 않는 식민사관 또한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다. 식민주의를 근대의 일부로 여겨 우리 역사학을 근대 역사학의 산물로 위치 짓는 시각부터 반대로 예외적인 역사 인식으로 간주하며 근대 역사학의 영역에서 배제하는 경향까지 상호 모순적 접근도 공존한다.

이 책은 19세기 말부터 1950년대까지의 ‘한국 역사학의 역사’를 제도와 주체, 역사 인식이라는 세 측면에서 세세히 관찰하며 그동안 축적된 역사학의 지형들을 더듬어 나간다.

저자는 우리 역사학의 식민성이 내재화되는 과정을 좇는다. 박은식의 ‘한국통사’, 정인보의 ‘조선사연구’(서울신문사),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민우사) 등의 민족주의 역사학과 식민주의 역사학의 대립 구도를 짚어 내는 동시에 일제에 포섭되어 간 우리 역사학의 부끄러운 장면들을 되살려 낸다.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영구적 근본적인 사업은 조선인의 심리연구이자 역사적 연구로 저들의 민족정신을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라는 발언대로 총독부는 한반도 강점 초기부터 조선 역사에 적극 개입해 왔다. 바로 식민지 지배담론을 장악하려는 ‘관제 사학’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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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 기술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 총독부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이끌 중심축으로 경성제국대학을 활용한다. 1926년 4월 경성제국대학 시업식.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는 “지나문화와 조선문화가 일본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한 최적의 땅이 경성”이라며 “여러 방면에 걸쳐 조선연구를 행하여 동양문화연구의 권위가 되어 달라”고 훈시한다. 저자는 경성제국대학이 식민지 조선의 차별적 고등교육체계의 최고 정점에 위치하며 일본 도쿄제국대학이 소화하는 서구 학문체계와 내용을 조선인 사회에 유입시키는 창구 역할을 했다고 규정한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개강 당시 조선사 강좌 교수는 조선사학 최초의 박사였던 이마니시 류와 총독부 학무국 편찬과장을 지낸 오다 쇼고다. 두 사람 모두 조선사편찬위원회와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으로 식민주의 역사학 형성에 관여했다. 이마니시 류는 단군이 고려 중기에 이르러 개국시조로 가작됐다고 봤고, 오다 쇼고는 조선사에서 단군과 기자 항목 기술을 배제시켰다.

저자는 “1929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한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는 식민주의 역사학을 확대 재생산하는 도구가 됐다”고 지적한다. 이 지점에서 들여다볼 인물이 총독부의 조선사 집필에 참여하며 일제의 제도권 사학 주축이 된 이병도다. 그는 해방 이후 역사학계 주류로 떠오른 이른바 ‘서울대학파’의 학맥을 대표하는 ‘학문 권력’이 된다.

식민성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 대학의 역사학이 ‘국사’(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등 3분과 체제로 고착된 건 명백히 일제에 의해 이식된 잔재다. 동북아시아 국가 중 역사를 3분과 체제로 나눈 건 한국과 일본뿐이다. 저자는 이를 제도로서의 ‘식민성 내재화’로 규정한다.

저자는 한국 역사학의 식민성이 해명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 분단을 꼽는다. 민족주의 사학과 마르크스주의사학은 좌우 대결과 6·25 전쟁을 거치며 사라졌다. 분단은 한국 사회에서 서로 다른 이념 간의 체제 갈등을 압축하는 말이자 ‘역사적 사실’과 인식을 지배하는 강력한 잣대로 작동했다. 저자는 “분단 체제는 지금까지도 우리 역사학계를 문헌 고증사학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일원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이는 역사학계 내부에 고착화된 식민성을 되돌아볼 기회마저 놓치게 했다”고 말한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2016-11-1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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