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디스트 ‘양대 거두’ 빈라덴·오마르 역사 속으로

지하디스트 ‘양대 거두’ 빈라덴·오마르 역사 속으로

입력 2015-07-29 21:39
수정 2015-07-29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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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이 이어 탈레반 지도자 물라 모하마드 오마르가 2∼3년 전 사망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이슬람 강경 무장조직의 ‘양대 거두’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1957년생인 빈라덴과 1960년 안팎에 태어난 둘은 20대부터 무장투쟁에 가담하면서 각각 세계가 주목하는 무장조직을 결성한 지도력과 조직력을 보였다. 때로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결국 서로 후원하는 동지가 됐다.

두 인물의 출발점은 전혀 다르다.

빈라덴은 사우디아라비아 부호 출신으로 무장투쟁보다는 1980년대 중반부터 파키스탄을 주무대로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조직을 지원하고 대원을 모집하는 ‘서비스오피스’로 지하드(이슬람성전)를 시작했다.

빈라덴도 1987년 인슐린을 맞아가며 소련군에 버틴 자지전투을 계기로 무장 지하디스트로 명성을 날리긴 하지만 출신은 재정 여력이 충분했고 전투적인 면모보다는 학자 또는 경영자에 가까웠다.

서비스오피스는 1980년대 후반 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제적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모태가 된다.

반면 오마르는 아프간 탈레반의 칸다하르에서 군벌에 가담해 소련 침공과 내전을 몸소 겪은 그야말로 야전 전투형이다.

둘의 결합은 빈라덴이 수단에서 알카에다를 조직하던 중 1996년 5월 미국의 압박에 쫓겨 갈 곳이 없어진 그를 오마르가 아프간으로 받아들인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오마르의 탈레반은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아 카불 진격을 눈앞에 둘만큼 확장기였다.

오마르 역시 초기엔 자신을 이슬람 지하디스트의 대표로 선전하는 빈라덴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사우디 정부와 공조해 본국으로 추방하려고도 했다.

19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국 대사관에서 알카에다의 연쇄폭탄테러가 일어났고 이를 보복한다며 미국이 토마호크 미사일을 동아프리카의 알카에다 근거지로 대량 발사하는 사태로 확대하자 빈라덴은 아프간에서 대미항전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오마르는 ‘빈라덴 때문에 미국을 적으로 돌릴 수 없다’는 조직 내부의 반발에도 그를 받아들인다. 여기엔 사우디로 추방위기에 몰린 빈라덴이 오마르에 손으로 쓴 충성맹세 서약을 눈물과 함께 건넸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후 두 인물은 사상적 동반자로 반미 항전을 이끈다.

탈레반은 강경 이슬람 무장단체 중 유일하게 한 나라의 정권을 잡아 알카에다의 울타리가 됐고 빈라덴은 오마르의 보호 속에 탈레반에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했다.

아프간 정권을 잡은 탈레반은 반서방 항전의 기지로 역할했던 반면 알카에다는 세계 각국에 세포조직을 침투시켜 외국에서 반서방 테러를 지휘했다.

그러나 2001년 알카에다가 저지른 9·11 테러 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탈레반은 직격탄을 맞았다.

빈라덴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미국은 아프간 전쟁을 감행, 탈레반을 변방으로 내쫓고 친미 정권을 수립했다.

탈레반이라는 보호막을 잃으면서 ‘순망치한’격으로 알카에다도 본거지를 상실하고 예멘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결국 2011년 빈라덴은 파키스탄에 숨어 있다 미군에 사살되고 그의 친구 오마르 역시 2∼3년 뒤 숨지면서 한 시대를 휩쓸었던 두 테러조직의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게 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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