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이후에도 가끔씩 엘리베이터 자리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낯익은 광주리를 보면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는데, 언젠가는 “나누는 기쁨이 더욱 크니 저희에게 감사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란 쪽지를 남겨 놓기도 했다. 아마도 주민 누군가가 고마움을 표하고자 작은 음료수 병 2개를 광주리에 담아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감사합니다”란 메모를 남겨 둔 것에 대한 수줍은 응답이었던가 보다.
가장 최근에 주민들을 반겨 주었던 광주리 속엔 사과에, 배추 고갱이에, 무처럼 생긴 콜라비가 담겨 있었다. 광주리에 담겨 있던 사과는 군데군데 멍도 들고 흠집도 있었지만, 이웃과 함께 콩알 반쪽도 나누고자 하는 주인장 마음씨만큼이나 맛이 일품이었고, 특별히 밭에서 갓 캐 온 배추 고갱이의 고소함과 아삭함은 지금도 입가에 맴돌 만큼 근사했다. 두어 주 전에 드디어 광주리의 주인공이 밝혀졌는데, 요즘은 ‘올해 유난히 잘 떴다는 담뿍장’ 나누랴, ‘오징어 얹어 따끈따끈 부쳐 낸 김치전’ 나누랴 분주한 모습이다. 나눔이 자연스레 몸에 밴 이웃이 있어 사는 재미를 되새기도록 해 주는 곳, 세종시 조치원읍 아파트 단지에서 경험한 일이다.
이토록 사는 재미를 쏠쏠히 누리다가 며칠 전 서울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선 참으로 서먹한 일을 겪었다. 먼저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내가 16층을 누르니, 함께 탄 중년의 남자분이 멋쩍게 웃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입주한 지도 어느새 4년여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 남자분과는 처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거였다. 동일한 층에 거주하는 4가족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거나 제대로 통성명을 한 적이 없는 ‘무늬만’의 이웃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옆집엔 초등학교 6학년 누나와 3학년 남동생이 살고 있어 가끔씩 마주치긴 하지만 인사 한번 받아 본 적 없고, 앞집엔 내 발자국 소릴 들을 때마다 짖어 대는 강아지 덕분에 누군가 살고 있겠지 추측만 할 뿐이다.
하지만 주말농장 덕분에 임시로 살게 된 조치원읍 아파트 분위기는 정말 다르다. 2500가구가 거주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임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나 주차장에서 마주치는 이곳의 주민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정답게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한번은 4층에 살고 있는 부부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내가 5층을 누르자 자신들이 이미 눌러 놓은 4층을 취소하고는 “에너지 절약도 할 겸 한 층은 걸어서 내려가겠다”고 한다. 이렇게 건전한 생각과 건강한 웃음을 지닌 이웃과 함께 산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도심 속 마을’이란 표현도 있듯이 익명성을 기반으로 저마다 고립화되고 파편화되기 쉬운 도시의 일상 속에서도, 나눔을 실현하고 이타주의를 생활화할 수 있는 공동체적 삶의 양식이 가능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저희 밭에 다녀왔습니다” 식의 작은 정성과 진정 어린 배려가 이웃의 마음을 얼마나 풍성하게 해 주었는지 기억할 일이요, 작은 광주리를 통해 오고 갔던 따스한 정을 기억하는 어린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됐을 때 모습 또한 상상해 볼 일이다. 아파트의 가치와 품격은 평당 가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삶의 향취로부터 결정되는 것임을 새삼 새기자니 밥 안 먹고도 배가 불러온다.
2014-12-1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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