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의 기억 소환한 ‘더 글로리’ 흥행
처벌로만 채워진 학폭위 10년 바꿔야
글로리가 처벌주의 부추기지 말았으면
유영규 기획취재부장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의 희생자가 자신의 인생을 걸고 사적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다. 고교 시절 문동은(송혜교)은 끔찍한 학교폭력에 시달린다. 재력가의 딸 박연진(임지연) 일당이 가하는 이유 없는 폭력은 동은의 삶을 지옥으로 끌어내린다. 때리고 목을 조르는 것은 일상이다. 성폭행하고 고문을 즐기듯 고데기로 온몸을 지진다. 가난한 미혼모의 딸이 도움을 청할 곳은 없다. 담임도 경찰도 친구들도 심지어 유일한 혈육인 엄마조차 침묵하고 방관한다. 남은 방법은 사적 복수뿐이다. 복수를 위한 준비는 무려 17년 동안이나 이어진다. 그렇게 드라마 전반에는 학폭의 잔혹함과 치밀한 응징이 깔려 있었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시작한 몰아보기는 어느새 시즌1의 마지막 편까지 이어졌다. 엄청난 몰입도에 ‘시간 순삭’을 경험했지만,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학교폭력의 잔혹함을 강조하려다 보니 현실과 드라마의 괴리감이 점점 커졌다는 생각에서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요즘 학교에선 박연진 일당은 모습을 감춘 듯하다. 과거 일진들이 가하는 집단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은 일선 학교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학폭을 바라보는 ‘사회적 민감도’ 역시 높아졌다. 작은 장난이나 험한 말도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퍼져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가 자리잡았다.
강력한 ‘처벌’을 내세우며 2012년 등장한 학폭법은 학교폭력의 판도를 바꿨다. 교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폭력행위를 학폭위에 올리고 가장 가벼운 처분인 서면사과조차도 모두 생활기록부에 기록하도록 했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온통 처벌로만 채워진 제도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우선 학교폭력을 지나치게 넓게 정의하는 바람에 어린 학생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나 갈등조차 모두 폭력행위로 간주한다. 통계상 학교폭력이 줄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큰불은 잡았지만 작은 불이 끊이지 않는 셈이다. 입법 당시 취지는 일진 학생의 반복적인 폭력과 심각한 집단따돌림 등으로부터 피해 학생을 보호하고 가해 학생을 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학교도 한몫 거든다.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는 민원이 제기될까 두려워 무조건 학폭위를 열어 버리는 면피성 행정이 넘쳐난다.
학폭의 의미도 혼란스럽다.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학폭은 여전히 힘센 학생이 약한 학생을, 다수가 소수를 괴롭히는 행위지만 학교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다르다. 학폭법대로라면 평소 친했던 짝꿍 사이 우발적인 다툼도 예외 없이 학폭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든 고 3이든 잣대는 같다. 박연진(가해자)은 사라졌는데 문동은(피해자)은 넘쳐나는 꼴이다.
최근 서울시교육감과 경기도교육감이 초등학교 저학년을 학폭위 처분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학폭법 전면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처벌 중심의 학폭 제도가 학교를 법정처럼 만들고 학폭 문제의 교육적 해결을 가로막는다는 판단에서다. 법을 바꾸는 주체는 국회이기에 일단 심포지엄 등을 통한 공론화 과정을 이어 간다는 계획이다. 벌써부터 일부에서 반대 목소리가 고개를 든다. 엄벌주의를 포기하면 학폭이 또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논리다.
언론에서 큼지막한 학교폭력 사례가 보도되면 그때마다 ‘엄격한 법’ 집행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때론 영화나 드라마가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문동은의 고통을 그려 낸 더 글로리의 흥행이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2023-01-19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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