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경쟁에서 천천히 달리기가 필요한 이유/박성국 산업부 차장

[마감 후] 경쟁에서 천천히 달리기가 필요한 이유/박성국 산업부 차장

박성국 기자
박성국 기자
입력 2023-05-10 00:15
수정 2023-05-10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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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국 산업부 차장
박성국 산업부 차장
20년 전 이맘때였다. 토요일 낮 연병장 소집령이 떨어졌다. 영문도 모른 채 달려간 연병장 초입엔 옆 중대 간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일일이 사병들의 가슴에 손을 대며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숨을 들이마셔라”라고 했다. 평생 담배엔 관심이 없었던 덕에 폐활량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렇게 한 무리의 끝에 합류해 군번과 이름을 적어 냈다. 그게 여단 체육대회 마라톤 대표팀 명단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평범한 스무 살 청년 인생에 예고 없이 훅 들어온 마라톤은 강렬한 추억을 끝도 없이 만들어 줬다. 몸이 가벼워야 빠르게 잘 뛸 수 있다는 이유로 하루 세 끼 배식량은 기존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고, 21㎞ 하프마라톤대회를 위해 동료 업고 선착순 달리기, 산악 구보 및 40㎞ 달리기 등 상상도 못 한 다양한 괴롭힘(?)이 이어졌다. 대회 평가 방식도 결승선 통과 순으로 순위를 매기는 방식이 아니라 참가 부대별 총원의 완주 평균 기록으로 각 부대의 등수를 매기는 잔인한 방식이어서 ‘들어가서 쓰러지자’는 마음으로 뛰었다.

뜬금없이 20년도 지난 ‘라떼는 말이야’ 식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건 마흔이 넘어 이 징글징글한 마라톤의 마수에 다시 빠졌기 때문이다. 코로나 엔데믹을 맞아 폭발한 달리기 열풍은 취업과 직장생활에 밀려 잊혀졌던 42.195㎞ 풀코스 완주라는 미련한 꿈에 불을 지폈다. 술 약속이 없는 저녁과 주말이면 10~20㎞를 달리고, 술자리가 끝나면 걸어서 퇴근하는 생활을 3개월째 이어 가고 있다.

요즘은 스마트워치의 페이스보다는 평균 심박수에 집중하며 ‘천천히 달리기’를 실천하려 노력 중이다. 빨라지기 위해서는 평소 천천히 달리며 신체의 ‘산소통’부터 먼저 키워야 한다는 운동 전문가들의 조언을 접하면서다.

당구에 눈뜬 학생들의 눈에는 교실 칠판만 봐도 공이 가는 길이 보인다고 했던가. 운동복으로 갈아입기 전까지는 반도체 업계의 흐름을 쫓는 기자의 눈에는 불황의 늪에 빠진 우리 기업들도 경쟁에서 더 빠르게 치고 나가기 위해 지금은 천천히 달리는 중이라는 인상으로 다가왔다.

그간 대한민국 수출을 견인해 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최근 2개 분기 연속으로 최악의 실적 기록을 새로 쓰며 위기론이 번지고 있지만, 모두 외부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저마다의 긴 호흡으로 기술과 연구에 투자를 이어 가고 있다. 삼성은 1분기 반도체에서만 4조 5800억원 적자를 내고도 연구개발에는 역대 분기 최대인 9조 8000억원을 썼다.

지난해 하반기 불황의 시작과 함께 업계의 희망이 담겨 나왔던 ‘2023년 하반기 반등론’은 기업들의 재고 조정 노력에 힘입어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 우리 기업의 장기 투자 결정을 어렵게 했던 미국과 중국 등 대외 불확실성도 하나하나 해소되는 분위기다. 올가을부터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대만 TSMC, 미국 마이크론 등 반도체 공룡들의 기술 경쟁 레이스가 재점화될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기업들은 경쟁의 출발선에 다시 서기 위해 꾸준히 내실을 다져 왔다. 반도체 경쟁에서 ‘팀 코리아’의 선전을 위해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의 관심과 정치권의 초당적 협력이 지속되길 기대해 본다.
2023-05-1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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